어디서 어떻게 보더라도 무난함 그 자체의 사람이라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다. 튀는 곳도 없었고, 다른 친구들처럼 꾸미는 것에만 빠져 살지도 않았다. 공부는 그럭저럭 조금 하는 편이었고, 성적은 들이는 노력보다는 아주 조금 낮은 편.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이 크게 성적으로 무어라 하는 것은 또 아니었으니 그만큼 나름 만족감을 가진 인생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난하게 살아온 18세 인생이라고 해서 반배정과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떨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제 잠들기 전부터 조금 기도했었다. 제발 새로운 짝은 저처럼 무난한 사람으로 해주세요. 이왕이면 옆에 남자 말고 여자를 앉혀주세요. 그러면 진짜! 저 열심히 그 애랑 친해질게요.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등교한 첫 날, 진우는 배치표를 보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 왜... 왜 하필 쟤야.”
진우의 새 짝꿍이 될 사람은 기도와는 애석하게도 남자였고, 하필 학교에서 제일 유명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겨우 같은 반으로 올라온 몇 명의 친구들은 그런 진우의 처진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지만, 손톱만큼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수업 시작에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새 학기의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짝꿍을 상상하면 한숨만 자꾸 나왔다. 싫다. 왜 이래, 제가 어제 그렇게 기도했잖아요. 친한 친구들은 모두 무난한 짝꿍과 앉아서 어색하게나마 얼굴을 익히고 있는데 진우는 그사이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었다. 그것도 맨 뒤. 창가에. 3월이라고 하더라도 아직 덜 풀린 날씨에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마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추워. 이럴 거면 레깅스 잘 입고 올걸.
2학년 6반 김진우. 이름이 조금 남자아이 같다며 놀림을 받을 때가 있지만, 그런 사소한 놀림따위는 이제 흥, 하고 넘길 줄을 아는 18살, 여고생입니다.
I’m in the moon for dancing.
w. MTR
그 짝꿍은 조회시간을 한참 넘기고서 다음 교시가 시작되고 나서야 들어왔다. 툭, 하고 별로 물건도 들어있지 않아 보이는 가방을 걸고 교복 넥타이를 풀어내는 모습에 진우는 흠칫 놀랐다. 양아치. 정말 그림에 그려 둔 것 같은 양아치다. 진우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드디어 얼굴을 마주한 짝꿍은 흘끔, 진우의 모양새를 살폈다. 훑어보는 눈매는 조금 무서운 것 같기도 했고, 왠지 어딘가 얼어붙을 것만 같은 느낌에 시선을 칠판으로 돌렸다. 어려운 공식. 예습하느라 학원에 다니긴 했지만, 여전히 어려운 곳만 잔뜩이라 진우가 잠시 미간을 찡그리자 그 짝꿍은 가벼워 보이는 가방에서 볼펜을 하나 꺼내 들었다. 뭐, 뭐지. 쟤도 공부 같은 거 하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짝꿍은 지이이익. 진우와 제 책상 사이에 금을 주우욱 그려 내렸다.
“...뭐, 뭐야.”
“이거 넘어오지 말라고.”
초등학생이냐!
“넘어오면 뒤진다. 나 잘 거니까 깨워도 죽어.”
“...”
참 나, 주무시던가! 좋은 꿈이라도 꾸시던가! 그렇게 얘기라도 하면 속이 시원할 것을. 진우는 애석하게도 엎드려서 잘 준비를 하는 짝에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어이야 이미 가출해서 저 멀리 별나라 달나라를 유영하며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얘 뭐야! 나 얘 진짜 싫어. 어디서 이런 애랑 짝꿍이 된 거야?! 혹여 조금이라도 금을 넘을까 봐 진우가 흠칫흠칫 몸을 창가에 더 기대자 멀리서 분필이 하나 날아와 그 양아치 같은 짝꿍의 노오란 머리칼 사이에 쿡 박혔다.
“송민호, 일어나.”
“아 씨. 뭔데요.”
“첫날부터 자는 새끼가 어딨어?! 일어나.”
“책 없어요.”
“책 없다고 자냐? 짝꿍한테 빌려.”
역시나 유명인은 유명인이다. 첫 교시로 들어온 선생님임에도 불구하고 양아치, 아니. 민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선생님은 당차게 분필을 던진 것이다. 칠판을 노려보는 것에 이러다가 교사랑 싸움이라도 나는 거 아닌가, 하고 조금 쫄았던 진우는 오히려 머리를 긁적이며 솔직하게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양아치의 행동에 놀라버렸다. 야. 책 내놔. 금 넘으면 뒤진다며? 그렇게 또 한 마디를 건네지도 못하고 그대로 교과서를 금 너머로 내밀고야 만 것이다. 진우의 새 수학 교과서는 그렇게, 반은 민호에게 걸친 채로. 반은 진우에게 걸친 채로 첫 개시를 시작했다.
솔직히 하나도 알아듣기가 어렵다. 아, 이게 뭐야. 나 학원 다 다녔는데. 연습문제를 두고 진우의 얼굴이 점점 울상에 물들어가는 것을 턱을 괴고 가만히 지켜보던 민호는 쯧, 혀를 찼다. 그 짧은소리에 진우가 울컥한 것이다. 입을 앙 다물고 꾸욱 노려보자 민호는 제 머리칼을 또 긁적거렸다. 뭘 봐. 입 모양으로 하는 그 말. 그리고 그 뒤에 이어서는, 금 넘어오면 뒤진다고. 이미 책으로 평화적 영토 침범을 하고야 만 후인데. 뭔데. 얘 진짜 뭐야. 그리고 이 문제는 또 뭐야! 왜 이렇게 안 풀려!
“넌 공부 잘하게 생겨서 그것도 모르냐.”
“...넌 알어? 어이없어 진ㅉ...”
“줘봐.”
민호는 드물게 말대꾸를 한 진우의 손에 곱게 들려있던 분홍색 샤프를 빼앗았다. 그리고 슥슥, 익숙하게 그 교과서 위에 문제를 풀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이없어. 내 교과서인데. 쟤 풀지도 못하면서 내 교과서에 낙서만 하는 거 아냐?! 진우는 내내 꼭 교과서가 물가에 내놓은 제 자식이라도 되는 마냥 바라보았지만, 애석하게도 그 교과서가 낙서로 채워지는 일은 없었다. 빼곡하게 들어차는 공식. 하나하나 답이 들어가는 공식. 와, 얘 뭐야. 공부 하나도 못 하게 생겨서 이거 다 풀었어. 이상한 애야. 송민호 진짜 이상해. 이렇게 잘할 거면서 왜 교과서도 안 가지고 다니고 양아치같이 하고 다녀?!
“뭘 봐. 금 넘지 말라고. 뒤지고 싶냐?”
“아, 아.”
“아 뭐.”
“아, 말 좀 예쁘게 하라고!!!”
“거기, 조용히 안 해?”
참다못한 진우가 빽 소리를 지른 순간, 선생님의 분필은 둘의 책상 사이에 정확하게 날아왔다. 입을 더욱 꾹 다물었다. 민호도 진우도 선생님의 말씀에 무언가 얘기하지도 못하고 서로 날이 선 눈빛만을 교환했다. 양아치 주제에. 공부는 잘하는 양아치! 그게 무슨 양아치야! 곧 민호는 포기라도 한 것처럼 진우에게 분홍색 샤프를 툭 던졌다. 그리고 멀뚱하게 시선은 칠판으로 옮기는 것이다. 마치 소중한 물건이라도 돌려받은 것처럼 샤프를 손에 꼭 쥐자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올라왔다.
...집에 가면, 샤프 버려야겠다. 알바 가기 전에.
**
그 뒤로도 양아치 같은 짝꿍, 민호와 진우의 사이가 좋아졌냐 하면 그런 것도 딱히 없었다. 눈만 마주치면 둘이 으르렁거리기 바빴고, 민호 역시 제가 보기엔 꼭 참새처럼 작은 여자애가 덤비는 것이 같잖아 상대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을 했건만 쫑쫑거리며 부리를 세우고야 마는 진우에게 같이 대적하고 말았다. 빽빽인지, 쫑쫑인지 짹짹인지. 어디 하나 분간이 가지 않는 모습에 꾹꾹 참던 민호가 진우의 입술을 꽈악 손가락으로 잡게 된 것은 4월이 되어서였다.
“참새처럼 짹짹거리지 좀 말라고. 개 시끄러워 진짜.”
“으브븝, 븝. 브브븝!”
“뭐.”
“아 담배 냄새 짜증 나! 잡지 말라고!”
“어쩌라고. 시끄러워서 못 자겠다고, 너 때문에.”
“학생이 학교 와서 잠만 자니까 그렇지!”
너 성적도 바닥이지? 수학 잘 푼 것도 다 우연이지? 사실은 할 줄 아는 거 하나도 없지? 그렇게 민호에게 카운터 펀치를 먹인 진우가 나름 뿌듯한 얼굴을 하자, 민호는 작게 중얼거렸다. 성적도 나보다 안 좋은 주제에.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딱히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민호의 말대로 진우의 성적은 민호보다 아래였고, 저 양아치는 정말 보기보다 공부 하나는 잘했으니 말이다. 반에서 이렇게까지 민호에게 대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이지 남자와 여자를 모두 통틀어도 진우 뿐이었다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송민호 진짜 미친놈같애.”
“김진우 진짜 미친... 아, 씨. 이게 진짜. 콩알만한게. 나 아직 다 안 했거든? 존나 어이없어.”
“나야말로 어이없거든! 너 뭔데! 송민호 존나 싫어!”
“웃기시네 죽을래? 나도 너 싫거든?”
“너도 죽어!”
바락바락 소리 지르며 대드는 것도 진우 하나. 반 친구들은 그걸 보면서 늘 지치지 않고 시비를 거는 송민호도 송민호지만, 그것에 바로바로 지지 않고 반격을 하는 김진우도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어떻게 저렇게 덤빌 수가 있을까. 반 그 누구도 민호에게 덤빌 생각을 하지 않는데. 심지어 진우는 민호의 노오란 머리에 조금이라도 뿌리가 올라올라치면 너 잔디에 경계 생긴 거 같아, 재수 없어. 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까맣고 동글동글한 쇼트커트 차림의 여자애. 거기에 노오란 머리를 늘 대충 손질하거나 자다 만 채로 등교하는 남자애. 누가 봐도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리는 사이는 아니었다.
“너 사실 송민호랑 친한 거 아냐?”
“안 친해! 양아치!”
“송민호가 반에서 얘기하는 거 너밖에 없잖아. 쟤 맨날 밖에서는 사람 치고 다닌대!”
“양아치잖아!”
“그러니까! 저번에도 학폭위 열릴 뻔한 거 송민호네 집 좋아서 막았단 얘기도 있던데?”
“...진짜?”
점심시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운동장이나 뱅글뱅글 돌던 같은 반 여자애들이 하는 말에 진우는 귀를 쫑긋 세웠다. 송민호가 고등학생 주제에 담배를 피우기는 하고, 거기에 정말 양아치같이 행동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막 사람을 치고 다닐 애로는 안 보이는데. 가만있어. 내가 왜 송민호 변호를 하는 거야! 걔가 밖에서 사람을 치건 벽을 치건 내가 알 바 아니잖아. 진우가 말이 없자 친구들은 풀던 이야기보따리를 잠시 잡아두고 진우에게 다시 넌지시 시선을 건넸다.
“송민호 어때?”
“뭐가 어때야, 양아치잖아.”
“사실 송민호가 양아치여서 그렇지 좀 잘생기긴 했잖아.”
“잘 생기면 뭐해...”
“걔 너한테는 말도 하고 잘해주는 거 보면 마음 있는 거 아냐?”
“아, 양아치랑 무슨 마음이야! 그런 얘기 하지두 말어.”
지금도 아마, 점심시간인데 옥상에서 담배나 피우고 있을걸? 그런 애랑 나랑 무슨, 마음이 있어. 그리고 송민호가 마음이 있다고 해도 나는 싫어! 싫으니까! 운동장을 뱅뱅 도는 것은 발인데, 머릿속을 뱅뱅 도는 것은 민호였다. 왜. 어차피 그냥 짝꿍이고, 곧 자리 배치를 바꾸면 다른 자리로 멀어질 사이인데.
진우는 저도 모르게 민호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본관 옥상으로 시선을 던졌다. 날은 아직 봄날, 조금씩 날씨가 풀려가던 날이었다.
**
점심시간을 보내고도 민호에 대해 한참 고민하던 진우는 수업 중에도 민호를 향해 계속해서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뭘 봐, 하는 입 모양의 답이 돌아왔지만, 오늘의 진우는 궁금한 것을 민호를 통해 풀어야 했다. 지이익, 하고 노트 한편을 찢었다. 어차피 집중이라고는 하지도 않는 시간. 결국, 첫날 버리지 못한 분홍색 샤프. 그것으로 글자를 끄적거렸다.
[야.]
흘끔, 진우의 얼굴을 본 민호는 유일하게 학교에 가지고 다니는 파란색 볼펜을 들었다.
[왜.]
[너 진짜 밖에서 사람 때렸어?]
[왜 물어봐 그건.]
[아 대답좀 하라니까ㅡㅡ]
[누가 그래 내가 사람친다고]
[애들이 다 그래]
애들이 다 그래. 그렇게 써진 진우의 글씨를 잠시 보던 민호는 펜 꼭지를 입에 물었다. 동그란 눈으로 저를 보는 진우. 호기심인지, 아니면 소문의 진위라도 확인을 하고 싶은 것인지. 민호로서는 이 작달막한 여자애의 속을 모조리 들여다볼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시간을 보내던 민호는 쪽지에 답을 써내렸다.
[안때려]
[진짜?]
[ㅇㅇ 그리고 안싸워 나그런거안해]
[근데 담배피잔아]
[담배랑 뭔상관이야]
[너사람때리면 큰일나는거알지?]
[안때린다고 뭐야니가그리고 뭔참견인데]
그러게, 나 왜 참견이지. 아까의 민호처럼 샤프 꼭지를 입에 물었다. 희미하게 올라오는 담배 냄새. 여전히 진우가 문제를 풀지 못할 때면, 민호가 샤프를 가져다가 풀어냈기 때문일까. 특유의 냄새는 단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아까 운동장을 맴돌던 사이에 뱅뱅 돌던 것이 민호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안 좋은 일에 휘말릴까 봐 그런 것일까. 정확하게 무언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걱정되니까글치]
[ㅡㅡ지랄 니가 우리엄마냐]
[걱정해줘두지랄이야! 말이쁘게하라니까?]
[너나이쁘게해]
그리고 혀를 쑥 내밀었다가 넣는 민호의 얼굴. 그것은, 참. 그렇게 여러 소문을 달고 다니는 무서운 양아치라고 생각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냥 그럭저럭 순진한 소년처럼 보였다. 그것에 아주, 아주 조금. 머릿속을 뱅뱅 돌던 민호가 뚝 멈춰섰다. 노란 머리. 매번 거친 입. 교복을 입었어도 매번 올라오는 담배 냄새. 저에게만 말을 거는 민호.
아직 책상에 그어진 금은 사라지지 않은 4월이었다.
**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그 노래에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고등학생. 2학년 1학기의 중간까지 왔을 때의 일이었다.
“...뭐야.”
“넌 뭔데. 주문이나 받아.”
“너 줄 햄버거 없어! 가!”
“클레임 넣어서 잘리게 해줄까?”
다음 고객님 이쪽에서 도와드릴게요! 하고 주문을 받으려던 순간이었다.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진우는 유니폼 차림이었고, 생글생글 영업용 미소를 걸고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진우의 얼굴에는 그늘이 잔뜩 끼었다. 미간도 같이 어그러졌다. 빨간 유니폼을 입은 저와 다르게 검은 라이더에 고글을 쓴 민호. 사복 차림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무심코 시비를 걸어버리자 그것에 한 번을 져버리지 않고 말대꾸를 하는 것에 포스기 앞에 선 진우는 울며 겨자 먹기로 민호의 주문을 전부 받았다.
“네, 고객님. 주문하시겠어요?”
“자본주의의 노예 같은 새끼.”
“아, 주문하실 거 없으시다고요? 다음 고객님 도와...”
둘이 주고받는 눈빛이 점점 커져서 그사이에 불꽃이 아주 화려하게 튈 무렵, 툭툭. 민호가 손끝으로 건든 것은 주문하는 카운터 위에 놓인 메뉴판이었다. 치킨버거 라지세트 하나. 콜라. 거기에 감자튀김 작은 거를 하나 더 추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에 진우는 겨우겨우 입꼬리를 올리고 당연한 멘트를 건넸다.
“포장이신가요?”
“어. 뭐 하나라도 남기면 죽어.”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양아치야.”
“너 진짜 잘리고 싶냐. 야, 카드.”
“결제 다 했으니까 이쪽 줄에서 기다려주세요, 양아치야.”
말끝마다 주변 캐셔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양아치야 라고 덧붙이는 진우를 보고 민호도 욱하는 감정이 또 치밀었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 법에 따르고 패스트푸드점에 왔으면 패스트푸드점의 법에 따라야 하는 법. 올라오는 성질을 꾹꾹 누르고 줄에 서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진우의 모습이 눈에 전부 들어왔다. 음료를 따르고 나온 음식들을 쟁반 위로 옮기고. 순서대로 손님들을 향해 그 준비된 것들을 내밀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 맛있게 드세요, 하는 멘트까지 하는 것에 왜인지 또 장난을 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남의 영업점에서 그러는 것은 상도덕에 어긋나는 짓이지만, 왜인지 남자 손님에게 그럴 때마다 더욱 무언가 울컥 치미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도 일하는 진우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이에 민호의 차례가 왔고, 진우는 패스트푸드점 특유의 노오란 봉투에 음식을 차곡차곡 담아 건네었다. 생글생글, 그 영업용 웃음을 한껏 걸치고.
“...놔라.”
“손님, 맛있게 드세요?”
“맛있게 드실 거니까 놓으라고.”
탁, 놓이는 손의 힘. 진우의 손에서 민호의 손으로 넘어온 봉투. 그리고, 소곤소곤 전하는 작은 말.
“...다신 오지 마세요. 손님!”
“너 진짜 시발, 내가 클레임 넣어버린다.”
“빨리 가세요. 손님, 다음 고객님들 기다리세요. 양아치야.”
“다음에 두고 보자.”
그렇게 두고 나오고 나면, 좀 속이 편할 줄 알았지. 포장한 햄버거를 들고나와 바이크에 올라타기 전에 안을 보면 진우는 아직도 환하게 웃으면서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생글생글 웃다가 손님이 건네는 말에 입가를 살며시 가리기도 하고, 눈꼬리가 휘어지라 웃어 보이기도 하고. 어린 손님에게는 눈을 맞춰서 이야기를 건네고 나이가 지긋한 분들에게는 조금 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 같은 액션을 취하는 모습. 속이, 조금 유별나게 모양새를 바꾸는 것이 느껴졌다.
“...쟤 잘 시간은 있나.”
학원도 다니는 거로 아는데.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거에 비교해서 성적은 영 아니올시다셨지만. 학원과 아르바이트. 그렇게 일하다 보면 지칠 텐데. 제집처럼 부모덕을 보고 살 수도 없는 건가. 무언가 자꾸만 툭툭 변화하는 진우를 향한 감정에 민호는 더 고민해서 무엇하리, 하는 생각으로 바이크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기세 좋게 도로를 가르고 질주하는 바이크에 불어오는 봄의 밤바람이 기분이 좋았지만, 오늘은 어딘가에 놀러 나가기보다 이대로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학교에 가면 저 녀석이 아르바이트에 나가는 날을 알아보자. 아니, 물어보는 것은 가오가 서지 않으니 매일 찾아와보자.
민호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진우를 알았다고 한들 둘은 여전히 시비를 걸기 바빴다. 주변에서 보기에는 투덕거림이 심해질 때면 혹여라도 소문이 좋지 않은 민호가 진우에게 손찌검하거나 하지 않을지 조마조마한 마음은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피가 튀는 전쟁은 없었다. 민호는 진우를 짹짹거리는 참새 정도로 생각했고, 진우는 조금 호감도는 올라가고 친해졌지만 그래도 시비 거는 양아치로만 생각했으니 말이다. 새로 받은 자리 배치표에서도 서로가 옆자리인 것에 욱했지만, 나중에 조용히 사정을 들어보자 결국 민호를 잡고 있을 수 있는 상대가 2학년 6반에서 진우가 유일하다는 이유 하나였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학교 밖으로 나가면 둘의 사정이 조금은 달라졌다.
정말로 민호가 그 뒤로 진우의 아르바이트를 훼방 놓기 위해 매일 찾아왔다는 것은 기정사실과도 같았다. 너 오늘은 왜 왔는데! 하고 부루퉁한 얼굴을 하는 진우의 앞에 서서 하는 주문은 거의 늘 비슷했다. 세트에 무언가를 더 추가하고, 조금 시간이 걸린다는 메뉴도 서슴지 않고 주문을 했다. 시간이 걸리는 것은 딱히 달갑지 않은 일은 아니었다. 그럴수록 민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는 것이었으니, 민호에게 딱히 손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진우의 처지에서 생각하자면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학교에서도 매번 지켜보는 짝꿍이 아르바이트하는 곳까지 찾아와서 저렇게 지켜보는데. 세상 어느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겠어. 게다가 매번, 저렇게 이상한 주문까지 하고.
“...오늘도 포장이야?”
“아니.”
“왜?”
“아니라면 아닌 거지 뭔 말이 많어.”
“...송민호 진짜 개 싸가지.”
“손님한테 말이 너무 거친 거 아니냐, 너?”
“...아 몰라. 먹구 가 그럼. 콜라 큰 거?”
“어.”
“애플파이는?”
“그거 추가. 그리고 뭐냐, 저기 새로 나온 것도 같이 줘.”
“...시간 오래 걸리는데.”
“상관없어. 내가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봤냐?”
진우가 아르바이트하는 가게 동료들도 점점 진우의 앞에서만 주문을 받으려고 하는 민호를 보고 둘이 친구 사이라는 것을 짐작해버렸다. 그래서 애매하게 사용하던 존댓말을 그만두었고, 그저 자연스럽게 둘이 말을 주고받았다. 여전히 진우가 바쁘게 오가면서 음식들을 차근차근 찾아오는 것을 지켜볼 때면 민호의 마음속 모양새가 조금은 더 간지러운 모양으로 변화하였지만, 그것을 꼭 짚어서 이름을 뽑아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진우는 화, 수. 그리고 주말 중 토요일을 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머지 월, 목, 금은 학원을 간다. 민호는 화, 수, 토요일이면 늘 패스트푸드점 마감 시간에 얼굴을 내밀었고, 저렇게 주문을 하고 기다렸다. 처음 몇 번은 포장해서 돌아가더니 이제 가게 안에 죽치고 앉아서 먹는 것이다. 물론, 그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시선은 진우가 눈치를 채지 않을 정도로만 흘끗거렸지만 말이다. 진우는 늘 친절하게 고객들을 대했고, 어디 하나 클레임이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잘하네. 다 먹어갈 즈음에 턱을 괴고 콜라를 쪼옥 빨아들이면 진우도 흘끔, 민호를 바라보았다. 뭘 봐. 입 모양으로 전해지는 말에 민호는 고개를 돌렸다. 진우에게 보이지 않게 아주 작게, 작게 웃었다.
“...아니, 주문한 걸 그대로 내놓아야 할 거 아냐!”
“고객님,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바로...”
“지금 이게 내놓는다고 해결될 일이야?!”
그날도 토요일, 사복을 입은 채로 방문한 체인점에서 민호는 주문을 마치고 제 몫의 식사를 해결하며 진우를 관찰하던 때였다. 플라스틱 쟁반이 바닥으로 낙하하는 커다란 굉음이 들렸다. 잠깐 핸드폰으로 눈을 돌린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빈틈없이 일하던 진우였지만, 아무래도 조금 술이 들어간 것 같은 중년 고객의 주문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것 같았다. 진우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까만 머리꼭지가 민호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늘 샤프를 쥐고 고민하던 손이 모여서 작게 떨리는 것이 민호의 눈에 들어왔다. 꾸욱, 제 주먹이 쥐어지는 것에 민호는 당장 고민을 그만두고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과 콜라 컵을 내려두고 그 뒤로 다가갔다. 바닥에 널브러진 감자튀김이며 먹거리들. 여전히 분노를 토해내고 있는 손님. 고개를 숙인 진우. 그게, 싫었다.
“뭐 하십니까.”
“넌 또 뭐야?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네 일 아니니까 저리 꺼져!”
“저기 직원 울 것 같은 거 안 보이냐구요. 나이 처먹었음 다야? 씨발, 사람이 주문 좀 틀릴 수도 있지.”
“뭐 이 새끼야?”
“술 처마셨으면 곱게 집에 들어가던가 애한테 왜 시비질이냐고. 뭐 씨발, 햄버거에 금이라도 처발랐어? 한 돈백은 내셨나 봐?”
“손님, 그만...”
“가만히 있어.”
중년의 고객은 술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민호에게 마주했다. 민호는 흘끔, 진우를 보았다. 정말로 꽤나 당황했는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일하면서 이러한 고객을 마주하는 것이 아무래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손은 여전히 떨고 있었고, 말리려는 듯 민호를 손님이라고 칭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호는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중년 고객은 벌게진 얼굴로 민호에게 이 새끼가 어디서, 라며 알콜이 오른 주먹을 올렸지만, 그것은 민호의 손에 쉽게 막히고야 말았다.
“이 가게는, 어? 씨발, 손님한테 이딴 식으로...”
“진상 부리는 새끼는 손님이라고 안 해. 개새끼라고 하지.”
“그러니까 넌 뭔데 시비냐고! 처먹고 조용히 꺼지면 될 거 아냐! 점장 나와, 나오라고 해!”
“점장이 이딴 일에 왜 나와. 경찰 불러 줄까? 택시 말고 경찰차 타고 집에 가고 싶냐고, 아저씨. 어?”
“...송민호, 그만.”
“뭐야. 이름? 이름 불렀어. 방금? 저년이랑 아는 사이야? 그래서 나섰구만, 어?! 저거 당장 자르라고 해! 점장 나오라고 하라고!”
계속해서 중년 고객에게 날이 선 말을 던지는 민호를 보고 진우가 참다못해 이름을 뱉은 순간, 그것이 오히려 그 진상에게 불을 지르기라도 했는지 더욱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마감 시간, 사람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은 점 내의 모든 시선은 민호와 진우, 그리고 그 손님. 그 셋에게 향해있었다. 민호는 정말로 그 고객을 끌어낼 생각인지 꽉 잡은 손을 그 등 뒤로 돌려 꺾어버렸고, 중년 고객은 여전히 얼굴이 벌개진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너 씨발! 저년이랑 무슨 사이야! 뭔데 나서서 지랄이야!
“무슨 사이냐고? 그걸 댁이 알아서 뭐 하려고. 곱게 집에 가서 자라고 했잖아, 내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 니네 학교 어디야!”
“내 학교가 어딘지 알기 전에 댁 직장에 망신당할 준비나 해.”
“허, 아이고. 대단한 것들 나섰네. 니들 이러고 가만있을 것 같아?! 계집애 하나 그냥 못 보고 나선 주제에! 어린 새끼들이 연애질하느라 자기 여자 치마폭에 싸여서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지?”
여자 치마폭에 싸여서. 그 말에 민호는 정말로, 제가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앞뒤도 생각하지 않고 휘둘러버리자고 마음을 먹고 주먹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송민호! 그만! 그만해. 경찰... 경찰 불렀어. 그만. 그만하자, 민호야. 응?”
“...김진우.”
카운터 밖으로 나온 진우는 민호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말릴 수가 없으리라 생각했던 순간의 행동이었지만, 정말로 민호는 당장이라도 후려치려던 주먹을 거두고야 말았다. 꾹 쥔 주먹을 감싼 작은 손.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떨리는 시선. 경찰을 불렀다는 말에 점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서 중년 고객을 안쪽 자리로 데리고 갔다. 다른 동료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쟁반이며 음식물을 치웠고, 손님들도 모두 각자의 하던 일로 돌아갔다. 멈춰선 채로 있는 것은 민호의 손을 감싼 진우와 그런 진우의 까만 머리꼭지를 바라보고 있는 민호 뿐이었다.
“...”
“진우 먼저 퇴근해.”
“...어, 아. 네.”
“화요일에 또 나와야 한다? 이런 일 있다고 그만두고 그러지 말고.”
“...네.”
그 고객을 데리고 들어갔던 점장은 잠시 나와 여전히 카운터 앞에서 서 있는 진우의 어깨를 툭툭 감쌌다. 일을 잘리지는 않는구나. 그때가 되어서야 진우는 제가 감싸고 있던 민호의 손을 놓았다. 어색하게도 툭 떨어져 나가는 손. 미약한 체온이 남은 그 손을 가만히 라이더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진우는 잠시 시선을 유영시키다 카운터 안쪽으로 가서 라커룸으로 사라졌고 그것을 보고 나서야 민호도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저, 학생.
“...아, 네.”
“오늘은 고마웠어요.”
“소란 피운 것뿐인데요.”
“진우가 이렇게 클레임 걸리는 일이 거의 없어요. 워낙 친절하게 잘하는 애니까.”
그렇겠지. 아이에게는 시선을 숙일 줄 알고, 생글생글 잘 웃고 바지런히 움직이니까.
“남자친구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네.”
“저 남자친구 아닌데요.”
“...진짜? 난 진우 남자친구인 줄 알았는데.”
저번에 진우한테 남자친구 맨날 온다고 했더니 그냥 웃더라고? 그래서 그런 줄 알았지 뭐. 넉살 좋아 보이게 웃는 점장의 말. 민호는 미약하게 진우의 체온이 남아있는 손을 주머니 안에서 다시 꽉 쥐었다.
저, 여기 뒷문 있죠. 거기 어디예요?
**
발치에 걸리적거리는 자갈을 몇 번인가 툭툭 걷어찼다. 주머니에 넣은 손은 여전히 뺄 생각이 없었다. 아직은 굳게 닫힌 채로 열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철문 앞에서 민호는 담배를 하나 물었다. 마침 가게 안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느라 세워 두었던 바이크를 주차한 바로 앞이 직원들이 다니는 뒷문이었다. 먼저 퇴근해도 된다는 점장의 말에 진우가 라커룸으로 사라진 지 벌써 삼십 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안에서 혹시 우나.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있던 일에 관해 설명이라도 하나. 그 사이에 경찰차는 와서 그 고객을 데리고 갔고, 민호는 문 앞에 삼십 분이나 다 되어가도록 서 있는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둘이 아녔다. 담배는 타들어 가지만 그것보다 속이 더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송민호, 그만.]
그렇게 얘기하던 진우의 목소리는 귓가에 웅웅 맴돌았다. 여자 치마폭에 싸여서 정신을 못 차린다 하는 그 주정뱅이의 말도 같이 맴돌았다. 정말, 이래서야 김진우 치마폭에 싸여서 매번 일하는 곳에 찾아오는 꼴이 아닌가. 내가 얘 일하는 곳에 왜 찾아오게 되었더라. 처음에는 학교랑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신기해서. 그다음은, 저에게 같잖게 친절하게 대할 때면 변하는 표정이 즐거워서. 일하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어서. 그 싸가지없고 재수 없는 김진우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일하는 것이 좋아서. 웃는 김진우가. 좋아서.
[저번에 진우한테 남자친구 맨날 온다고 했더니 그냥 웃더라고? 그래서 그런 줄 알았지 뭐.]
남자친구. 민호는 애석하게도 진우와 제 사이에 대해서 책상에 금을 긋듯 완전하게 금을 그어버릴 수가 없었다. 남자친구라는 말을 부정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는 김진우의 속이 궁금하기도 했다. 김진우는 학기가 시작하고 계속해서 제 옆을 지키는 짝꿍이다. 투닥거리며 싸우기도 하고, 풀리지 않는 문제를 두고 말싸움을 하며 같이 답을 내리는 사이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가 조금이라도 까만 뿌리가 올라올 때면 잔디에 난 뿌리 같다고 놀리는 것이 김진우였다. 전날 늦게 잤는지 얼굴이 부어온 것을 보고 네가 호빵이냐고 놀리는 것이 송민호였다. 그러다가 투닥투닥 언성이 높아질 때면 나 너랑 얘기 안 해! 하고 토라지는 것이 김진우였다. 토라진 것에 슬쩍 샤프를 쥐고 교과서며 노트를 오가며 필기를 하는 손을 쿡쿡 볼펜 끝으로 찌르는 것이 송민호였다.
[호빵 기분풀어]
[꺼져]
[말곱게하라더니 지가제일 안고와]
[나건들지마 가만안둬송민호]
[가만안두면어쩔건데]
[머리빡빡밀어버릴거야 엠자야]
[빡빡밀면기분풀려?]
[안풀려]
[그럼풀어]
그렇게 어이없는 대화를 교과서 귀퉁이나 노트 귀퉁이를 통해 주고받고 나면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 분홍색 샤프를 쥔 진우는 살짝 민호를 흘겨보다가 웃는 것이다. 그렇게 풀렸다. 매번 말싸움하고서도 어이없는 이야기로 풀고. 그것은, 반 친구라면 어떻게 봐도 가능한 일이 아닐까. 반에서 유일하게 저에게 편하게 대하는 것은 김진우 하나였다. 모두들 양아치네 일진이네, 그러한 이유를 들어대며 민호를 멀리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민호도, 진우가 조금은 편했다. 더 다채로운 것들을 알고 싶다는 작은 호기심과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서 이렇게 매번 가게에 얼굴을 내밀게 되었다. 오늘 본 표정은, 그랬다. 차마 보고 싶지 않았던 표정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모양새가 달라지던 감정이 의미하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왜 여기 아직두 있어.”
“기다렸는데?”
“왜 기다려.”
“데려다주려고. 집 어디야.”
“...왜 데려다주는데? 너 아까 나 울 것 같아서 그거 놀리려구 그러지?”
“입이 산 거 보니까 괜찮은가 보네. 타, 빨리.”
끼이익, 하고 열린 문. 거기서 나타난 것은 눈이 아주 조금 부어있는 진우의 얼굴이었다. 안에서 참았던 것이 터졌나 보다. 토요일이라 교복이 아닌 사복 치마 차림의 진우에게 민호는 스페어로 하나 더 갖고 다니던 헬멧을 던졌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손에 헬멧을 들고서 꾸욱 민호를 노려보는 진우의 표정에 민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헬멧을 빼앗았고, 동그랗고 까만 머리에 그것을 씌웠다. 이거 해야 사고 나도 안전하다고.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에 진우는 지지 않고 작게 민호를 흘겨본다. 여자애가 이 시간에 혼자 다니는 거 아니야.
“나, 이거 안 타!”
“왜.”
“너 사고 낼 것 같아. 그래서 이거 씌우는 거지?!”
“죽을라고 이게. 내가 저거 얼마나 잘 모는데.”
“너랑 죽기 싫거든?!”
아오. 진짜, 이 기지배 한 마디를 안 져요. 민호가 그렇게 내뱉고 나면 진우는 손을 들어서 민호의 등짝을 퍽 때렸다. 라이더 자켓, 안의 셔츠를 넘어 닿는 아픔. 평소에도 화가 나면 학교에서도 가끔 장난스럽게 때리는 것이 있었기에 익숙하게 그것을 넘겼다. 이렇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추스르고 나왔다는 것이기 때문에. 죽기 전에 타. 그렇게 몇 번을 이야기하니 진우는 졌다는 듯 바이크로 다가갔다. 야.
“왜.”
“나 치마야.”
“뭐 어때서.”
“치마 입구 어떻게 타! 이거 다 뒤집히면 내 팬티 다 보인단 말이야!”
“...진짜 지랄.”
동급생에게 제 속옷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것이 마음에 퍽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민호는 결국 제 몫의 헬멧을 차다가 라이더를 벗었다. 자. 그것을 내밀자 진우는 잠깐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하다가 소매를 허리에 동여맸다. 집 어디냐고. 그렇게 또 퉁명스럽게 이야기하면 웅얼웅얼 아파트 이름을 얘기한다. 제 오피스텔에서 그렇게 거리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지척에 살면서도 등교하거나 하교하는 진우를 본 적이 없었다니, 그건 좀 신기했지만. 모든 준비를 마친 것에 민호가 먼저 바이크에 올라타면, 진우는 그 뒤에 올라탔다. 나 니 허리 잡기 싫어.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것에 그럼 옷자락이라도 잡던가, 하면 가벼운 맨투맨의 허리춤을 잡는다. 저 고집이 어디까지 가나 보자. 출발한다. 그 말과 함께 바로 골목을 빠져나가 도로를 달리는 바이크가 속도를 높이자, 어쩔 수 없이 진우의 팔은 민호의 허리에 꽉 감기고야 말았다.
“야, 나 멀미해... 씨, 미친놈아!”
“하던가 말던... 야! 진짜 이게, 죽고 싶지. 어딜 때려! 운전하는데!”
“아 천천히 가라고! 송민호 진짜 또라이야!”
“김진우 진짜 또라이야 이거. 아...”
됐냐. 조금 속력을 내리며 흘끔 뒤를 돌아보자 헬멧을 쓴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 등에 달라붙은 미약한 체온. 그것은 아까 점 내에서 진우가 제 손을 잡았을 때보다 더욱 큰 면적의 체온이었다. 싫지 않았다. 여자를 바이크 뒤에 태우는 것은 꽤나 귀찮은 일이라 자주 하지 않았지만, 그게 진우라고 생각하니 싫지 않았다. 역시나 제 감정의 모양새는 아무래도 간지러운 모양새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차가 드문 시간의 뻥 뚫린 대로를 달리다 보면 진우는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꾹 감았다. 뺨이며 볼을 스치고 가는 바람이 싫지는 않았다. 꽉 안은 셔츠 너머, 팔이며 기댄 등에서 다가오는 민호의 온기도 마찬가지로 싫지 않았다. 희미하게 올라오는 담배 냄새는 이미 제 분홍색 샤프에도 많이 배어 있는 것과 같았다. 너 왜 이렇게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 그렇게 물어보고 싶지만, 바람이 부는 도로 위에서 그것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아, 미쳤어. 진짜. 너 속도위반으로 잡힐 거야.”
“안 잡혀. 다 잘 지키고 다니거든. 그리고 넌 옷이 그게 뭐냐?”
“그러니까 내가 천천히 가라구 했잖아!”
“천천히 갈 거면 걸어가지 바이크를 왜 타.”
진우의 아파트 앞에 도달해서야 두 사람이 바이크에서 내리고 나면, 바람에 한껏 흩날린 진우의 옷차림은 꽤나 흐트러져있었다. 허리춤에 단단하게 동여맸던 라이더를 민호에게 건네면서 부루퉁한 표정으로 옷차림을 단정히 만드는 진우는 여전히 민호의 헬멧을 쓰고 있는 채였다. 그걸 푸를 생각도 없어 보이는 것에 나선 것은 민호의 손이었고, 턱가에 미어진 버클을 풀어 헬멧을 벗겨내자 머리카락이 볼품없이 흐트러져 흩날렸다. 까만 머리칼이 달빛에 젖어서 흩날리는 것이 즐거운 모양새라 민호는 웃어버렸다. 왜 웃어! 하고 등짝으로 날아온 것은 진우의 손이었지만 말이다.
“너 손 진짜 매워. 어디 가서 사람 때리지 마.”
“그래서 안 때리잖아. 너만 때리지.”
“뭔데, 그거.”
조금 기분 나쁜 부류의 특별취급 아냐? 그렇게 생각하며 사복 차림의 민호는 돌려받은 라이더를 걸치고 그 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평스러운 표정으로 옷차림을 정리하던 진우는 제 앞에서 당당히 담배를 무는 민호를 보고 인상을 더욱 찡그렸다. 야. 그거 피우지 마.
“뭔 참견이래... 야, 그거 안 내놔?”
“피우지 마!”
“네가 뭔데 피우라 마라야, 이게 진짜. 콩만 한 게.”
“고등학생이 담배 피우는 거가 문제거든?”
등짝으로 손이 날아오는 대신에 입가에 너울너울 매달려있던 하얀 담배가 진우의 손으로 옮겨갔다. 불도 붙이기 전인 것이 구겨지려는 것에 민호의 미간은 더 찡그려졌다.
“내놔.”
“싫어.”
“내노라고!”
“싫다고!”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똘망하게 뜨고서 하나 지지 않고 내뱉는 진우에게 민호는 남아있던 어이 마저 사라져버렸다. 허, 하고 콧김을 뱉으면 제가 이겼다는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변하는 것이다. 민호는 담배를 피울 의지마저 상실하고 꺼내려던 라이터도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자, 됐지. 안 피운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진우는 손에 가지고 있던 담배를 볼품없이 분지르고 나서야 다시 또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였다. 저게 하나에 얼만데. 그런데, 그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핀잔이 또. 이상한 것이. 싫지는 않았다. 남이 잔소리를 한다면 싫을 텐데.
“...야.”
“왜.”
“...너 다음에도 올 거야?”
“그건 또 왜 물어봐. 가는 건 내 자유지.”
“다음에 올 때는 그거 타구 오지 마.”
“왜.”
나 그거 타면 멀미하거든! 아까두 니 담배 냄새랑 향수랑 막 섞여서 장난 아니었어. 겨우 참았는데 다음에 또 타게 하면 니 등에 토할지도 몰라! 그렇게 뻔뻔하게 내뱉는 진우의 얼굴. 아까는 울음기가 그득하더니, 지금은 웃음이 그득하다. 그래서 민호는, 저도 모르게 끄덕여지려는 고개를 겨우 멈췄다. 내가 뭔 생각이야. 쟤 말을 들어주려고나 하고.
“너 어차피 또 나 데리구 갈 거지? 그냥 버스 타구 가자!”
“누가 너 데리러 간데.”
“아, 아까 여자애가 늦은 시간에 다니지 말라며!”
“...너 하는 거 봐서.”
“송민호 진짜, 진짜 또라이 같아.”
“김진우 진짜. 개 또라이 같아.”
“아, 아! 넌 왜, 왜 하나를 꼭 안 져?!”
날 이겨 먹어야 그렇게 속이 시원해?! 부루퉁해진 진우의 표정에 민호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아까는 데려다준다고 하면 싫다고 하더니 이제 데려다주는 것을 당연하게 단정을 지어 버리는 그 태도마저도 싫거나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어떨까. 꽤 귀찮고, 싫었을 텐데. 민호는 진우에게 또 한 마디를 남기려다가 그저 손을 뻗어서 아직 붕붕 떠 있는 검은 머리칼을 단정하게 내려주었다. 진우의 눈은, 아주 동그랗게 떠졌다. 달빛이 그 안에 그득하게 담겼다.
“들어가.”
“...너네 집 어딘데.”
“나? 저기 오피스텔.”
“혼자 살아?”
“어.”
“...와, 진짜. 대박. 그러니까 양아치처럼...”
“양아치 아니라고.”
더 늦기 전에 얼른 들어가. 한 번을 더 머리를 쓰다듬으면 진우는 담배 냄새가 난다고 투덜거리지도 않고 얌전히 몸을 돌려 아파트 현관으로 사라졌다. 민호는, 그 모습이 아주 작아질 때까지 달빛을 머금고 바라보기만 했다.
**
진우가 이야기한 대로 민호는 다음부터는 진우를 마중 올 때면 바이크를 타고 오지 않았다. 멀쩡하게 두 발로 걸어와서 햄버거를 시켜서 먹고 철문 앞에서 마감을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횟수가 더 늘어서 진우의 학원마저 알아낸 민호는 이제 아르바이트가 없는 월, 목, 금이면 학원 앞에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또 둘이 버스를 타고 돌아갔다. 승객이 많은 버스를 탈 때면 민호는 꼭 저를 안쪽에 두고 앉는 것이다. 아니면, 덜렁 일인 석에 진우를 앉혀두고 그 앞에 가드를 치는 것처럼 서는 것이다. 미묘했다. 학교에서도 점심시간에 담배를 피우러 사라지는 대신 진우와 함께 급식실에 갔고, 급식실이 질릴 때면 둘이 같이 학교 담을 넘어서 바깥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일도 생겼다. 이건, 꼭. 그래. 다른 반 친구들이 보기에는 뭔지 모를 썸을 타고 있는 것이나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다. 모처럼 진우가 친구들과 점심을 먹기 위해 민호가 아닌 여학생 무리들 사이에서 먹은 날이었나, 또 학기 초처럼 운동장을 빙빙 도는데 또 한 명이 입을 여는 것이다.
“너 요새 송민호랑 더 친한 거 알지?”
“응.”
“얘 이제 부정도 안 하네. 둘이 사귀는 거야?”
“그건 아니구. 안 사귀어, 송민호랑 나랑 그냥 친구.”
“그럼 다행이지.”
왜, 송민호 엄청나게 놀잖아. 분명히 사귄 여자애들도 많을걸? 혹시 알아? 지금도 너랑은 그렇게 친하게 지내면서 다른 여자친구 있을지도. 그렇게 얘기하는 친구의 말에 진우는 어깨만 으쓱했다. 매번 알바가 끝나면 마중 오고, 학원 끝나도 마중 오는 데. 그런데 걔한테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아, 그래도 혼자 산다고 했으니까 집에선 여자친구랑 있을지도 모르지. 그럼... 아니, 만약 들킨다고 해도 우리 아무 사이 아니잖아. 그냥 송민호랑 나랑 친구인데.
“술 마시고 담배도 피우는데 여자라고 없겠어?”
“없을지도 모르지.”
“진우 너 진짜, 송민호랑 아무 사이 아니지?”
“친구라니까?”
“근데 맨날 송민호랑 점심 먹잖아. 옥상도 같이 가?”
“내가 담배 냄새 싫어서 안 가.”
“...되게 잘 안다 너.”
그런데 자꾸, 속이 신경 쓰인다. 혹여라도 송민호가 여자친구가 있으면. 그렇다면 자기랑 그렇게 친하게 지내는 거는 방해가 아닐까? 바이크를 타면서 허리를 안은 거는 그때 한 번이었지만, 버스에서 사람이 많으면 내가 걔 옷 잡고 버티기도 하는데. 여자친구 있는 애한테 실례 아냐? 송민호 여자친구면 사실 그 여자친구도 일진이나 양아치 아닐까? 막 나중에 만화처럼 누가 와서 나한테 송민호 내놓으라고 하면 어떡해. 주기 싫은데.
...주기 싫은데?
뭐가.
송민호가.
학교에서 송민호랑 친한 것은 저 하나다. 그 자리는 누구도 차지하려 하지 않았고, 민호는 여전히 소문이 별로 좋지 않은 양아치였다. 집안 배경 믿고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학교 담벼락 밖에서는 주먹도 휘두르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는 일진 양아치. 그렇지만, 민호가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진우가 잘 알고 있었다. 바이크를 몰고 다니긴 하지만 제가 타기 싫다는 말에 그것은 멈췄고, 싸움질이나 하는 애가 여유롭게 가게나 학원에 나타날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여자친구, 여자친구. 그거. 송민호가 남의 거라면. 문득 제 예전 남자친구를 떠올려본다. 겨우 손만 잡았던 중학교 시절의 남자친구. 송민호는, 소문 화려한 날라리에 반에서 노는 애. 주먹 쓰는 애. 싸움질하고 뒷소문 안 좋은 애. 여자에 관한 이야기도 소문으로 나도는 애. 그게, 자꾸. 자꾸자꾸 마음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진우 너도 꼬드김 안 당하게 조심해!”
“...나랑 송민호 그런 사이 아닌데?!”
그러니까, 진우의 마음의 모양새도 조금 간지럽게 변했다.
**
5교시가 시작되고 나서도 그 뭉근하고 간지러운 감정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민호에게 가지게 된 호감의 종류는 반 친구로서의 호감이라고 생각했다. 인간 대 인간, 그런 거. 점심시간에 친구들이랑 이야기하고 나서 자꾸만 다른 부분이 마음에 걸리지만 말이다. 그래서, 진우는 결국 제 옆자리에서 다시 잘 준비를 하고 엎드려있는 민호의 옆구리를 쿡쿡 분홍색 샤프의 뒤꼬리로 찔렀다. 날씨에 따라 변화하는 바람에 얇은 와이셔츠 차림인 곳에 바로 다이렉트로 와닿는 느낌. 그것에 민호는 인상을 콱 찡그리며 아이씨, 승질을 내고 일어났다. 왜. 진우는 조용히, 다시 노트를 들어 부우욱 찢었다. 끄적끄적, 궁금하던 것을 풀기 위해 글씨를 쓰는 것이다.
[야너여친이써?]
[왜ㅡㅡ 공부나해 멍청아]
[ㅡㅡ있냐고]
[없어 왜물어봐]
없어. 없어. 그럼, 현재 여친은 없음. 그다음으로 궁금했던 거.
[여친있어써????]
[그럼없냐이나이에?]
[존나많았지?]
[말하는거봐라 많건적건뭔상관이야니가]
[ㅡㅡ송민호개싸가지재수없어 죽어]
그리고 팽, 고개가 돌아갔다. 그렇지만, 희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고야 말았다. 송민호가 여자친구가 없다는 사실에. 과거의 여자친구에 대해 입을 쉽사리 열지 않는 것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것보다 지금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봐, 내가 송민호 여자친구 없을 거라고 했잖아. 그렇게 나 데리러 오느라 바쁜데 여자친구 챙길 시간이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왜 이거에 기뻐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고 기쁠까. 그러고 나면 마음이 자꾸만 더 간지러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가만히 다시 잠들려고 하던 민호가 진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 왜.
[넌남친있냐고]
[없는뎅]
[있었어??]
[웅]
[왜]
왜? 민호의 파란 볼펜으로 써진 글씨를 보면서 순간 대답을 잃어버린 것은 진우 쪽이었다. 왜라니, 그거야. 다들 남자친구 정도는 생기고 만들잖아. 그런데, 그런데. 거기에 쉽게 대답을 써 내려 갈 수가 없었다. 타이밍 좋게 친 종이 아니었다면 아마, 추궁을 당했을 것이다.
막 6월, 학교가 학원제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교실이었다.
**
“불만 없지?”
“있는데요.”
“저 진짜 많은데요.”
“송민호 저건 평소에 반 행사 하나도 참가 안 하고. 이럴 때라도 해야지 언제 할 거야.”
“그렇다고 제가 왜 얘랑 춤을 춰요.”
“맞아요! 저 얘랑 춤추기 싫어요!”
“잘생긴 애랑 예쁜 애랑 손님 끌어야지 그럼 누가 끌어.”
학원제의 내용이 정해지고 2학년 6반이 발표할 작품도 선정되었다. 2인 1조의 남녀 커플 댄스. 개중에서는 대중가요에 맞춘 내용도 있었고, 전통무용 비슷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 부문에서 제일 복잡해 보이는 왈츠에 선정된 것이 민호와 진우였다. 조 발표가 된 순간 둘은 동시에 마주 보고 싫어! 를 외쳤고, 반 친구들의 중재에도 선뜻 해결되지 않아 담임 선생님의 앞까지 불려가고야 만 것이다. 싫었다. 송민호랑 춤이라니. 거기에, 미묘하게나마 신경을 쓰는 상대랑 무대 위에서 춤까지 추라니. 춤을 추는 것 자체도 내키지 않는 일인데.
“좀 도와. 2학기 때는 빼줄게.”
“싫어요. 상대 바꿔주세요. 차라리!”
“...허, 야. 이게 진짜. 기분 나쁜 게 누군데...”
“둘 다 조용히 해. 변경 없어. 이대로 가.”
“아 선생니임...”
저 춤 못 춘다고요. 근데 그 못 추는 거를 송민호한테 다 보이라구요? 그런 망신이 또 어딨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입을 꾹 다문 진우는 제 옆에서 완전 귀찮은 것을 떠맡았다는 얼굴을 하고 머리를 긁적거리는 민호를 흘끔거렸다. 그러다가 시선이 미묘하게 부딪히면 민호는 또 뭘 봐, 하고 말을 흐리는 것이다. 더 무언가 말을 할 것도 없이 민호와 진우는 2인 1조로 춤을 추게 되었고, 이제 겨우 학원제를 향해 3주가 남은 시점에 전해 들은 것에 진우는 가볍게 멘탈이 붕괴하였다. 어떡해.
“아 나 진짜... 춤 못춘단말야...”
“춤도 못 추냐.”
“그러는 너는! 야, 왈츠 같은 걸 내가 어떻게 알어!”
“아는데?”
“...뭐?”
“나 안다고.”
교무실에서 쫓겨나 복도에 선 진우가 울상을 지으며 한 말에 민호는 오히려 당당하게 나서는 것이다. 왈츠를 출 줄 아는 고등학교 2학년 남자애. 그것도 하필이면 뒷소문 안 좋은 일진에 날라리. 얘가 할 줄 알아? 진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자 민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니, 그거 그렇게 자랑할 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며 어떡해, 어떡해. 나 망했어. 그런 말만 중얼거리는 진우의 불만과 불안에 가득 찬 목소리에 민호는 교실 문 앞에 서서야 입을 열었다. 야.
“왜. 시비 털지 마, 진짜 죽어.”
“말 곱게 해라. 너 춤 못 춘다며. 도와줄게.”
“...응?”
“도와준다고. 나랑 연습해. 어차피 나랑 둘이 할 거 아냐.”
3주 안에 댄스 마스터로 만들어줄게. 그 자신만만한 말, 드르륵, 아무렇지 않게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이제 거의 지정석이나 마찬가지인 창가 쪽 줄의 마지막 자리에 앉은 민호는 다음 교시의 교과서가 무엇인지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하품했다. 자려는 모양인데, 아니. 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단한 말 해놓고 그렇게 자려고 하기 있어? 진우는 냅다 옆구리를 콱 찔러서 민호가 잠이 들지 않게 최선을 다해 방해했다. 아 씨, 이게 진짜. 졸려 보이는 눈을 하고서 째려보는 민호의 시선. 물론, 그것에 익숙해진 진우의 기가 죽는 일은 없었다.
“너 진짜 가르쳐줄 수 있어?”
“어. 뭐로 들었냐, 할 줄 안다고 했잖아.”
“그럼 연습은 어디서 해.”
“아... 그러게. 그냥 아무 데서나 하면 되는 거 아냐?”
“학교에서 너랑 춤추는 거 보이기 싫어!”
“어차피 축제 때 보일 거잖아.”
“그 전에 보이기 싫어!”
빽 언성을 높이는 것에 조용히 좀 하라고, 라며 민호가 핀잔을 줬지만, 구겨진 진우의 얼굴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대로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자연스럽게 들어온 선생님 덕에 둘의 대화는 잠시 멈추고야 말았다. 어떡해. 나 진짜 보이기 싫은데. 교과서는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서 대충 분홍색 샤프로 밑줄이나 긋고 있으니 툭, 하고 교과서 앞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구긴 종이. 이게 뭐야, 하고 펴보면. 학기 내내 주고받느라 익숙해진 민호의 파란 볼펜으로 적은 글씨가 보였다.
[우리 집에서 연습해 그럼. 사람 아무도 없잖아.]
**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나면 민호는 어김없이 그 철문 앞에 서 있었다. 연습할 시간이 부족하다며 가지고 온 바이크. 진우는 오랜만에 민호가 채워주는 헬멧을 쓰고, 이번엔 제집이 아닌 민호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오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조금 긴장한 얼굴을 하자 민호는 큭큭 웃어버렸지만, 진우는 웃을 수가 없었다. 송민호에게 춤추는 것을 보여야 하고 거기에 얘랑 단둘이 연습까지 해야 하는데 어떻게 웃어.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에도 묘하게 긴장감이 감돌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말에도 한 번에 움직이지를 못했다.
“...담배 냄새.”
“나냐? 한 이틀 안 피웠는데. 평소에는 집에서 피우니까.”
“나 오는 동안에도 피울 거지?”
“아니, 안 피울 건데.”
네 앞에서 피지 말라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풍겨오는 익숙한 담배 냄새에 진우가 잔소리하고야 말았지만, 민호는 아무렇지 않게 되받아쳤다. 이틀. 이틀이면 집에서 연습하자고 했던 그 날. 그날부터 송민호는 집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은 것이다. 조금 묵은 냄새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 탓이 아니었을까. 익숙하게 에어컨을 켜고 헬멧을 내려두는 민호의 뒤를 따라 어색하게 들어가 서면 민호는 큭큭 또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데.
“긴장했냐?”
“...뭐!”
“남자 집에 오면서 긴장 안 하는 여자애도 웃기긴 하는데. 너랑 나랑 별 짓거리 하려고 한 거 아니잖아. 연습하려고 온 거니까 긴장 풀어.”
“...안 했거든!”
“그럼 말고. 뭐 마실래? 근데 우리 집에 맥주밖에 없어. 아, 콜라랑 물은 있다.”
“맥주 마시지 마.”
“그래서 콜라 있다고 했잖아. 콜라 마셔.”
터벅터벅 주방으로 사라지며 하는 말에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맥주 마시지 말라고 하니까, 그래서 콜라가 있다고 했다니. 마치 제가 오는 날에 맞춰서 사둔 것 같잖아. 고등학교 남자애 혼자 사는 거로는 좀 넓어 보이는 오피스텔.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으니 콜라병과 유리잔을 두 개 들고서 터벅터벅 민호가 돌아왔고, 진우는 퍼지는 탄산 냄새에만 집중했다. 조르륵 잔을 채우는 갈색 액체. 그러고 보니까, 민호가 가게에 와서 주문할 때도 음료는 늘 콜라였다.
“곡은 미리 받아왔고... 너, 나랑 손잡을 수 있냐?”
“무슨 상관이야.”
“나랑 손잡고 춰야 해.”
“다른 데 잡으면 가만 안 둘 거야.”
“너한테 뭘 하라고.”
별 짓거리 하려고 온 거 아니라고 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딴 얘기야? 콜라를 기울이면서 하는 말이 당연한 대답이라고는 알고 있지만, 그것에 신경이 쓰이고야 말았다. 그래, 별 짓거리 하는 거 아니잖아. 춤추려면 손잡고 어깨 잡고 하는 거는 당연한 건데. 이건 왈츠고. 진우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고 콜라를 마셨다. 민호는 반쯤 잔을 비우고 나서야 핸드폰을 열어 음악을 미리 틀었고, 조금 빠른 템포의 곡이 거실을 울렸다. 이 곡에 맞춰서 민호와 함께 춤을 추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긴장감이 그득하게 치고 올라왔다.
“이쪽으로 와.”
“...이, 이렇게?”
“어. 그렇게 서서... 자. 여기 손잡고.”
거실에서 제일 넓어 보이는 베란다 앞에 마주 보고 섰다. 민호는 가만히 제 손을 진우의 높이에 맞춰 올렸고, 진우는 그것을 살며시 맞잡았다. 아. 저번에 가게에서 시비가 붙었을 때. 그때 민호의 손을 감쌌던 것보다 더, 더 크게 느껴지는 면적이다. 손의 크기가 제법 차이가 나는 두 손이 겹쳐지자 민호의 반대쪽 팔은 진우의 옆구리, 정확히는 겨드랑이보다 조금 아래에 올 위치에 살며시 올려졌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놓칠 뻔했지만, 최대한 동요하지 않고 진우는. 저도 비슷하게 민호의 옆구리를 잡으려 했다.
“넌 거기 말고 여기. 내 어깨.”
“...여, 여기?”
“어. 거기 잡아. 너무 높나?”
민호는 잠시 진우에게서 손을 떼고 왼손을 잡아 제 어깨에 올려주었다. 이렇게 마주하고 서면, 한참 나는 신장 차이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민호를 올려다보면 가까워진 거리에 숨결까지 느껴질 것만 같았다.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두근, 자꾸 소리를 울리는 것만 같아서 진우는 애써 민호의 어깨와 손만 꽉 잡았다. 아주 조금, 자세가 잡혔다. 여름에 걸맞은 하복을 걸친 고등학생 둘. 환하게 달빛이 투과되는 베란다 유리 앞에 서서 서로 손을 잡고 선 고등학생 둘. 민호는 진우를 내려다보았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이 보였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지만, 웃지 않고 천천히 자세를 이끌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다시. 하나, 둘... 발 뒤로 빼고.”
“어려워!”
“잘하고 있으면서 뭔 소리야. 한 번 더 해보자.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완전하게 민호의 리드에 맞춰서 끌려다니는 꼴이었다. 어색하게 지도받은 스텝으로 원을 그리듯 움직이면, 뻣뻣한 몸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민호가 이야기했던 대로 정말로 왈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지, 완전히 초보인 것이 티가 나는 진우를 자연스럽게도 리드했다. 그것에 하나하나 발을 맞추면서도. 발끝이 스칠 것만 같으면서도 진우의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이 조금 빠른 왈츠의 리듬도 아닌 다른 여자들과도 이렇게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싼 채로 춤을 췄을지. 그런 민호의 모습이 자꾸만 맴도는 것이다. 그저, 춤일 뿐인데. 다른 생각이 한참 머릿속을 차오를 즈음이었나, 민호가 아, 하는 가벼운 소리를 울렸다.
“아 씨, 발 밟았어! 김진우.”
“어? 아. 아퍼? 미안. 미안.”
“춤출 때 다른 생각 하면 이렇게 된다니까... 아, 아프네.”
“진짜 미안. 밟으려고 한 건 아니고 아... 내가 그래서 못 춘다고 했잖아...”
“잘한다니까? 다른 생각만 하지 마.”
밟힌 발등이 꽤나 아픈지 주저앉아 쓰다듬는 와중에도, 어깨를 감싼 손은 풀렸지만 마주 잡은 손은 풀지 않았다. 찡그려진 미간이 저보다 아래에 있었다. 두근, 두근. 또 심장이 제멋대로 펌핑을 시작했다. 그것은 왈츠의 리듬보다도 조금 더 빠른 것만 같았다.
“한 번은 더 해보자.”
“...어, 응. 으응.”
“너 오늘 좀 얌전하다? 잘한다고 해서 그래?”
“아니거든!”
“그럼 됐고.”
자, 손 다시 올려. 그렇게 이야기하면 둘의 어깨가 자연스럽게 잡혔다. 유리창을 비춰 들어오는 달빛은 여전히,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에어컨을 틀어놓은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잔잔하게 땀이 올라올 무렵에서야 첫 연습은 끝이 났다.
민호는 그날도, 기어코 진우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
학원제 날이 성큼 다가왔다. 2주. 학원제는 이 금요일 주말을 지나 다음주의 점검을 끝내고 나면 금요일에 무대를 올린다. 그동안 피나는 노력 끝에 진우는 왈츠 한 곡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말은 주말까지 전부 민호의 집에 들락거렸다는 말과 같았다. 민호는 정말로 진우가 집에 출입하는 동안에는 전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이제 민호의 오피스텔 냉장고를 제 냉장고처럼 열고 다니는 진우는 그 안에 자리 잡은 맥주캔의 숫자도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약속처럼 지키고 있다. 술도, 담배도. 물론, 진우를 기다리느라 학원 앞이나 가게 뒤편에서는 피우곤 했지만, 그것도 진우가 나타나기 전까지였다. 함께 집에 오는 길에도 민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수업 시간에도 잠이 오거나 지루하면 자연스럽게 기댈 수 있었고, 그런 미묘해진 공기를 내색하지 않는다는 듯 민호도 진우도 서로를 그저 편하게만 생각하게 되었다.
“나 오늘 자고 갈래.”
“야, 침실 하나야.”
“이제 겨우 일주일 남았단 말이야! 연습하고 자고 내일 아침부터 또 해.”
“이게 진짜, 남자 집 무서운 거 모르고.”
“별 짓거리 안 한다며!”
너 소파에서 자고 나 침대에서 잘래. 왠지, 학원 끝나고 마중을 왔을 때 진우의 가방이 평소보다 무거워 보인다고 생각했더니 안에 옷가지가 들어있기 때문이었나. 민호는 뻔뻔하게 자고 갈 것을 이야기하는 진우에게 무어라 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또 베란다 앞에서 연습이 이어지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고 움직이는 진우의 발끝에 맞춰 다가가는 민호의 발끝. 교복을 잡은 손. 조금 서로의 가슴이 맞닿아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로지 들리는 것은 음악이었으며, 원을 돌 듯 뱅글뱅글 돌아가며 춤을 추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따라둔 콜라잔의 탄산이 모두 날아가고 나서야 둘의 춤이 잠시 멈추었다.
“아, 나 땀나.”
“씻던가.”
“나 그럼 먼저 씻는다?”
“씻으라니까? 근데 어차피 나와서 또 연습할 건데 뭐하러 씻어.”
“아 지금 찝찝하다고!”
올 때도 너가 계속 안았잖아! 그래서 지금 담배 냄새랑 땀이랑 같이 난단 말이야! 빼액, 언성을 올린 진우가 가방을 뒤적거려 옷가지를 꺼내는 것에 민호는 담배를 들고 베란다로 나섰다. 하도 니코틴이 끊겨 중간중간 집중력이 날아가는 민호에게 그럼 안에 들어오지 않게 피우라는 허락을 준 진우 덕분에 이렇게 간혹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게 되었다. 여자애한테 씻고 온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도, 진우와 제가 늘 이야기하는 별 짓거리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사실, 그랬다. 몸이 닿을 때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잡은 손에 혹여 땀이라도 차올라 진우가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민호는 어울리지 않게 그런 생각마저 했다. 최대한 뻔뻔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춤을 가르치고 같이 리듬을 탔다. 어깨에 닿은 진우의 체온이 날이 갈수록 익숙해졌다.
“...저거 진짜, 아무 생각 없는 거 아냐?”
그래, 친구로 보니까 남자 혼자 사는 집에서 자고 간다는 말이 나오지. 주말 저녁의 만원 버스를 타고 온 덕에 진우에게 혹여 다른 사람이 닿기라도 할까 끌어안은 것은 제 쪽이 맞았지만, 자연스럽게 안겨서 쫑알쫑알 이야기하는 것도 문제가 아닌가 싶긴 했다. 안고서 아무렇지 않게 대하려고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진우와 학원제 준비를 하면서 지금 2주가 넘도록. 그동안 민호는 계속해서 제 애매했던 감정들에게 답을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담배 연기를 뿜어내듯 자연스럽게 뱉어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저는 진우를 좋아한다. 친구. 그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관계를 깨부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기어코 연달아 담배를 피우고 나서야 베란다 문을 닫고 들어오면, 진우는 샤워를 마쳤는지 집에서 입을 법한 편안한 잠옷 차림으로 머리에 수건을 얹고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목욕물 온도에 붉게 달아오른 뺨.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 그것이 모두 시선에 들어오는 것에 잠시 눈을 돌리고 김이 다 빠져 식어버린 콜라를 마셨다, 목이 탔다. 아무렴, 이성으로 신경을 쓰고 있는 여자애가 자기 집에서 자기가 쓰는 수건을 쓰고 욕실에서 나온 것인데. 익숙한 발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캬아, 하는 조금 아저씨 같은 소리까지 내고 터벅터벅 거실로 걸어오는 것에 신경이 곤두섰다.
“아, 담배 냄새.”
“피웠으니까 그렇지.”
“너 빨리 씻어. 나 깨끗하게 했는데 너 그러구 안으면 또 냄새 나잖아.”
“진짜 연습 더 하려고?”
“어. 아, 빨리! 빨리 씻고 나와!”
퍽, 하고 등짝에 날아오는 손바닥에 민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진우에게 시선이 갔다. 홍조를 띄운 뺨, 안으면 아마도 노곤한 체온이 느껴질 몸. 그것에 절로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는 어쩔 수 없는 사춘기. 제길. 생각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저도 옷가지를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다녀오라는 말까지 하는 진우를 두고. 그런데, 그런데.
“저거 진짜 이상한 애야...”
속옷을 왜 여기 두고 나가냐고. 딱 봐도 제 것과는 완전하게 사이즈며 형태가 다른 속옷에 민호는 정말이지 욕실 안에서도 편하게 씻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뭉뚱그려 수건으로 감싸두고 나서야 열에 달뜬 몸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었고, 이미 누가 쓴 것처럼 (실제로도 진우가 사용하고 난 후지만) 제가 늘 쓰는 바디워시 향이 올라오는 샤워볼을 꾹 쥐었다.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
“그러게 말 들으라고 했잖아. 어차피 또 씻을 거 왜 씻었냐고.”
“땀 장난 아니야... 나 다시 씻고 잘 거야. 너 방에 들어오지 마.”
“내 방이거든, 거기?”
“그럼 너랑 같이 자라구?”
편한 차림으로 춤 연습을 하고 나서 진우는 기어코 땀이 또 오른 몸을 가볍게 씻고 말았다. 아까 여기 놨던 내 속옷 어딨어?! 라는 정말이지 무신경한 말에 빨래통에 집어넣었단 말을 했더니 아 네 거랑 내 거랑 섞이잖아! 라는 답이 돌아왔지만 말이다. 그럼 그걸 그냥 둬? 거기 두고 있으면 내가 제정신으로 씻을 것 같냐고. 툴툴거리며 욕실에서 나온 진우를 보자, 아까보다 확실하게 옷을 입은 몸이. 조금, 평평해졌다. 저거 설마.
“그냥 이것도 같이 빨아 그럼.”
“...야.”
“그리구 들어오지 마! 들어오면 발로 찰 거야.”
수건에 둘둘 말린 두 번째 속옷을 부엌 한편에 놓인 빨래통에 쑥 집어넣은 진우는 물을 마시고서 늘 민호가 잠을 자는 침실로 들어가는 것이다. 저게 진짜. 제집임에도 불구하고 거실 소파에서 자게 생긴 민호는 성큼성큼 방문으로 다가갔다. 잠겼겠지. 잠그고 자겠지.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고 문고리를 확 돌린 순간 어이없이 열린 문에 침대 위에 앉아있는 진우와 눈이 마주쳤다. 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저기서 잘 생각인가 봐. 좋아하는 여자애가 자기 침대 위에 앉아있는 이런 기회 좋은 상황에 손 하나 뻗을 수가 없어서 꾸욱 문고리만 잡자 진우는 빽, 또 소리를 질렀다.
“들어오지 말라구!”
“내 방이라고 여기.”
“아 그럼 같이 자냐니까?!”
“같이 자면 뭐 어떤데.”
“...미쳤어. 송민호!”
“안 미쳤거든? 너야말로 집주인 두고 니가 소파에서 자던가. 왜 내 방에서 자는데.”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오자 진우는 제가 먼저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유치권이라도 행사하겠다는 마음인지, 제가 쓰는 베개까지 베고 이불을 올려 얼굴을 감춰버리는 것에 순간 욱한 것이다. 곧장 침대로 가서 이불을 내리니 부루퉁한 얼굴이 보였다. 내 침대라고, 내 건데 왜 네가 뺏긴 얼굴을 하는데. 아직 불을 환하게 켜둔 방에 씻고 나온 직후의 달뜬 얼굴이 보이는 것. 민호는 그래도 개의치 않고 저도 침대 위로 올라가려고 무릎을 올렸다. 퍽, 하고 날아온 주먹이 허벅지를 스쳤지만 계속 전진하려 하자 진우는 또, 얼굴이 더욱 붉어져 버렸다.
“아 그럼 불 꺼!”
“불은 왜 꺼.”
“불 키구 자 그럼?! 빨리 끄라고! 너 씨, 이거 금 넘어오면 죽어.”
베개를 많이 두고 자는 덕에 침대 위에 넉넉하게 놓여있던 것 중의 하나를 들더니 제 옆구리에 두는 진우의 행동에 민호는 허, 기가 찼다. 금 넘어오면 죽는다니 학기 초에 제가 한 말과 같지 않은가. 물론 저 금은 넘어버리면 정말 큰일이 날 금이지만. 분부하시는 대로 방의 불을 끄고 달빛에 의지해서 침대로 돌아오자 진우는 베개를 등지고 벽을 보고 누운 채였다. 쟤 정말 나랑 같이 자도 괜찮은 건가. 아니, 금 넘지 말라고 했으니 같이 자도 되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으면, 등에는 체온이 아닌 베개가 느껴졌다. 쉽사리 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희미하게 올라오는 향이 제 몸에서 나는 향인지 아니면 진우의 몸에서 나는 향인지 그것마저 알 수가 없었다.
“...야.”
“왜.”
“...자?”
“안 자.”
“그럼 나랑 얘기하다 자.”
침대 바뀌어서 그런지 잠 안 와. 진우의 말에 서로 등을 지고 누웠던 자세가 돌아갔다. 여전히 베개는 가운데에 놓여있었고, 어두운 사이에서 빛에 빛나는 눈동자만 조금 보이는 것이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베개에 뉜 진우는 무릎으로 이불을 툭툭 건드렸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참에 얘기를 하자니, 반가운 것이기도 했지만 한 침대에 누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민호에게는 반대로 조금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
“무슨 얘기할 건데.”
“너, 여자친구 엄청 많았지.”
“왜 또 그 얘기를 해.”
“너 그래서 침대 이렇게 큰 거 샀지?”
“뒹굴면서 자느라 산 건데?”
사실 그 침대에 누운 여자는 거의 없어. 온갖 소문을 달고 다니는 제가 그렇게 이야기해야 진우는 믿지도 않을 테지만. 속으로만 말을 삼키니 진우는 거짓말, 이라고 작게 이야기하며 이번엔 민호 대신 베개를 쿡쿡 찌르고 때렸다. 그러다가, 민호도 문득 궁금한 것이 생기고야 마는 것이다.
“...야.”
“왜.”
“남자친구 집에서 잔 적 있냐, 너.”
“없는데. 나 친구 집에서도 안 자.”
“근데 여기선 왜 자는데.”
“연습하려구.”
“너랑 나랑 집 가깝잖아. 십 분이면 가는데 왜 자고 가냐고.”
그게 궁금했다. 기어코 제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하는 것도, 이렇게 침대를 차지하고 누운 것도. 들어오면 발로 찬다고 했던 주제에 차기는커녕 같이 한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것도. 모조리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아무리 연습을 하면서 접촉이 쉬워졌다고 해도 민호와 진우는, 이성이 아닌가. 성별이 다른 둘이 한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이 얼마나 드문 것인데. 게다가 친구의 집에서도 잘 안 잔다는 말. 그럼. 그렇다면.
“...난 친구 아니냐.”
“친구지.”
“친구 집에서도 안 잔다며.”
“...”
“근데 우리 집에선 잔다고 했잖아.”
“왜 자꾸 물어봐, 나 잘래.”
“잠 안 온다고 해놓고 무슨 잠이야.”
“아, 잔다고 여튼... 야!”
친구 집에서도 안 자는데 우린 친구라며. 네 입에서 친구라는 말이 나오면 나는 그걸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모르겠어. 대답을 피하고 잠을 자겠다고 선언하는 것에 둘 사이에 어색하게 끼워져있던 베개를 치워버렸다. 그리고 몸을 좀 더 침대 안으로 당기자, 무릎이 닿았다. 진우가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려는 사이에, 민호는 손목을 잡아 진우를 다시 침대 위에 눕히고야 말았다. 둘이 연습을 하느라 몇 번이나 잡은 손이고 손목이다. 무릎만 닿았나, 몸 곳곳이 같이 닿았다. 그런데도, 너는 자꾸만 나를 친구라는 틀에 두려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든 다르게 정의하고 싶었다.
“너 이러면 나랑 학원제 발표 못 해.”
“내가 뭘 할 것 같아서 그러는데.”
“...야, 송민호.”
“왜.”
닿은 무릎이 묘하게 꿈지럭거렸다. 얇은 옷감을 사이로 두고 접촉하는 것에 민호의 신경이 더욱 곤두섰다. 숨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깝게 당겼다. 발표 못 한다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시선을 피하는 것. 평소의 김진우라면 저를 걷어차거나 등짝을 때리거나 어딘가 폭력을 행사할 것이 아닌가. 그래도, 진우는 손을 휘두르거나 발을 휘두르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한테 여자친구 얘기는 왜 계속 물어봤어.”
“신경 쓰여서.”
“그게 왜 신경 쓰였는데.”
“...너 여자친구 있는데 나 맨날 데리러 오고 그러면 실례니까.”
“그럼 넌.”
“뭐가.”
“친구 집에서도 안 자고, 하물며 너랑 나랑 그냥 친구라는데. 왜 내 침대에서 잘 생각을 했냐고.”
입을 다물어버린 쪽은 진우였다. 미흡하게 스치던 숨이 옅어지자 이번에는 진우의 손을 꽉 잡아당겼다. 그 손을 허리에 두게 했다. 떨어져 나가려는 것에 꽉 더욱 잡자 진우는 곤란한 눈빛을 했다. 아마, 불이 켜져 있다면. 저 얼굴이 어떤 얼굴일지 더욱 잘 보일 텐데. 불 끄라는 말에 끄는 것이 아니었다. 째깍, 째깍. 멈춰버린 대화에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방을 그득하게 채웠다. 한참의 침묵이 자꾸만 흘렀다. 빠져나가려던 진우의 손이 멈췄다. 어쩌면, 신호탄과도 같았다.
“난 너랑 친구 하기 싫어.”
“송민호.”
“...친구 하지 말자고.”
“그럼 뭐 하는데. 너랑 나랑, 야...”
기어코 그 몸을 제 아래에 두고야 말았다. 이불을 등에 뒤집어쓰고, 어색하게 한쪽 팔로만 제 허리를 안은 진우를. 가만히 내려다보면 눈빛이 마주쳤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진우는 민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무릎, 허리.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닿을 상황이었다. 그대로 입술을 내리고 싶었다. 모든 것을 모조리 머금고,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확연하게 마무리를 먼저 지어야 했다.
“학원제 발표도 할 수 있어.”
“무슨 소리야.”
“친구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친구, 그거 말고 다른 거 하자고.”
“뭔데.”
꿀꺽, 침을 삼키는 얇은 목울대가 보였다. 심장은 왈츠의 리듬보다 훨씬 빠르게 뛰고 있었다.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에 그 맥박이 자잘하게 섞이자, 민호는 제 답을 내려놓았다.
“그냥 친구 말고, 네 남자친구 하고 싶어.”
“송민호.”
“싫으면 걷어차고 나가. 네가 나가도 친구, 그거 아니더라도 학원제 발표는 하도록 노력할게.”
“야!”
“친구 싫다고, 그래서 싫다고 하는 거 아냐.”
민호의 답에 진우는 당황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송민호가 저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는 정말이지 하나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 실험과도 같았다. 자고 가겠다고 했던 것은 그 송민호가 저를 친구로만 보는 것이 조금 싫었기 때문도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결론에 바로 닿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아니었나. 잘 모르겠다. 올려다보면 달빛을 머금은 민호의 표정이 보였다. 그것은 진우가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지금 제 얼굴도 아마, 저런 표정일까. 민호는 천천히 고개를 내리기 시작했고, 진우는. 결국.
“...나, 나도 싫어.”
“뭐가.”
입술이 마주하기 딱, 삼 센티 정도를 남긴 거리였다.
“너랑 친구 싫어.”
“그럼.”
“...네 여자친구 할래.”
내뱉은 답에, 그 짧은 삼 센티가 거리를 좁혔다. 달빛이 조금 더 밝아져서 침실을 훤하게 비추었다. 사이에 존재하던 베개는 이미 저 멀리로 가버린 상태였고, 맞닿은 체온은 그 열기를 더욱 올렸다.
춤을 출 때도 민호의 어깨에만 있던 손. 만원 버스 안에서 끌어안아도 전혀 올라오지 않던 팔. 서로 장난스럽게 때리고 장난칠 때도 등에 닿았던 것은 손바닥뿐. 그렇기에, 민호는 열기로 뒤엎어지는 제 머릿속으로도 생각할 수가 있었다. 일그러지며 차오르는 감정을 내비치는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품이 한참 작은 어깨를 제대로 끌어안으며 향과 달빛을 머금어가던 때였나. 진우의 두 팔이 민호의 등에 감긴 것은, 아마도 처음이었다고.
**
점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려 하는 7월. 2학년 6반의 학원제 댄스 발표는 성공적이었다. 특히나 민호와 진우가 선보인 왈츠는 정말 좋은 반응을 얻었고, 둘이 정말로 사귀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폭발했다. 그 말에 진우는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부정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민호는 늘 그렇듯 굳은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학원제 발표를 일주일 앞둔 그 날, 달빛을 머금고 계속해서 연습했던 애정. 그것이 막힐 틈도 없이 새어 나오는 것이지만 주변 그 누구도 둘의 사이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교실 뒤편은 여전히 민호와 진우의 지정석이나 다름없었고,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둘의 책상에 그어져 있던 금이 사라진 것이다. 수업 중간에 교과서 귀퉁이며 노트로 나누는 분홍색 샤프와 파란 볼펜의 필담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몸을 기대는 것도 조금 더 가까워졌다. 하나 더 달라진 것을 꼽아보자면, 책상 밑으로 몰래 손을 잡고 있기도 했다는 것이다.
[너 얘기안했지]
[뭐를]
[나랑사귄다고]
[아직안했는데?]
꿈틀, 오늘도 필담을 걸었던 민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빨리얘기해]
[왜미친놈아ㅡㅡ 소문다퍼지고싶어?]
[소문퍼지면뭐어때서]
[그건그렇네]
[그럼오늘끝나고얘기해]
[넌얘기할사람없잖아]
[그러니까니가해야지]
[진짜송민호완전 또라이!]
[김진우개또라이]
분홍색 샤프를 잡은 손과 파란색 볼펜을 잡은 손. 꾸욱, 무언가 터트릴 것처럼 민호를 노려보던 진우의 눈이 보였다. 저러다가 또 토라지겠지. 풀어주는 것이야 이제 쉬운 문제이긴 했지만, 토라지는 진우를 보는 것도 꽤 즐거운 것중에 하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해서 이제 제 ‘여자친구’가 된 사람을 매번 토라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말 좀 너무 세게 했나. 어울리지 않는 고민을 민호가 머릿속으로 반복하자 진우는. 잠깐 노려보던 눈을 거두고 씩 웃었다. 눈꼬리가 휘어지게. 그것에 아주 잠시, 또. 두근거렸다.
[너나또라이여두좋아하잖아]
[미쳤네 진짜]
[안조아해? 나는너 또라이여두좋은데]
분홍색 샤프가 노트 위를 달리다가 멈추고, 눈빛이 저를 향한다. 눈이 한참 마주쳤다. 이미 선생님의 설명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고, 창밖에는 체육 시간의 요란한 소리가 푸르른 녹음의 나뭇잎에 섞여 흩날렸다. 필담도 대답도 없는 것에 진우가 왜? 라고 하는 순간이었나, 민호의 입술이 진우의 귓가에 닿았다. 그리고 작게 속삭인 말에, 진우의 손이 참으로 오랜만에 민호의 등짝을 내리쳤다. 거기, 조용히 안 해! 송민호, 김진우. 복도로 나가! 선생님의 말에 둘은 어색하게 의자를 끌고 일어났고, 교실 모두의 시선이 닿았다. 유명한 일진 양아치가 반에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자애랑 같이 나가는 거다. 어느 쪽이 물이 든 건지는 그 누구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너 때문에 복도 나왔잖아,”
“어때, 둘만 있는데.”
“아 진짜 미쳤어. 그러게 그런 말을 왜 하냐구! 그냥 적지!”
“너는 나 또라이여도 좋다며. 그래서 한 건데 왜 그래.”
마침 다른 반은 벌 받는 사람도 없는지, 휑한 복도에 나란히 선 둘은 역시나 나와서도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복도는 여름답게 아주 조금, 더웠다. 그래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더 더워지고 싶은 마음에 민호는 진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앞으로 그런 소리 수업 시간에 또 하면 가만 안 둬. 그 말에도 그저 웃을 뿐이었다. 눈을 마주치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서로의 표정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너 다 좋아해.]
등짝 맞은 이유로는 너무나도 사소한 말이긴 했다. 그래도, 그 말에는 두근거렸다.
푸르른 여름이 성큼 다가와 이제 곧 여름방학을 앞둔 고등학교 복도에 애정이 그득하게 나부꼈다.
“오늘 너네 집 갈래.”
“그래. 마중 갈게.”
“바이크 타고 오지 말구.”
“버스 타고 가게?”
“응.”
너 등 안는 것보다 버스에서 손잡는 거가 더 좋아.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자애가 한 말에, 그 누구도 친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날라리 같은 양아치는 따라 웃어버렸다. 심장 소리는 여전히, 왈츠의 리듬보다는 조금 더 빠른 리듬이었다. 오늘은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에게 모두 이야기하자.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그리고, 그게 자기 짝꿍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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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TR (Twitter Account : @m_tr_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