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戀情) (Written by. 요정의 솜)
2017. 11. 26. 21:10

연정(戀情)

 


 

w. 요정의 솜



 

 준아, 거기서 뭐 하는게냐~”

 

두 손으로 땅을 꽝꽝 누르며 꽃송이를 심던 아이가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본다.

 

내 약조한 것이 있어, 그렇소! 거의 다 되었소!”

 

다시 몇 번이나 땅을 꽝꽝 누르던 아이가 벌떡 일어나 발로 또 몇 번 바닥을 밟더니, 이내 만족스럽다는 듯 손을 탈탈 털고, 무릎도 털어본다. 그리고 한 참 물끄러미 꽃송이를 바라보더니, 얼른 뒤 돌아 제 어미에게 뛰어간다.

 

준아, 그게 무엇이길래 그렇게 열심히인게냐.”

선물이요. 선물.”

네 선물?”

에이, 나 배고프오! 얼른 집에 가오!”

 

싱겁기는- 아이의 어미는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언덕을 내려간다. 아이는 어미의 손을 꼭 쥐었다가 고개를 몇 번 이고 돌아보았다. 돌아보는 통에 어미의 속도가 늦어지면 번뜩 하고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걸음을 서두른다. 그렇게 여러 번. 멀어져 보이지도 않는 꽃자리를 아이는 그렇게 자꾸만 돌아본다.

 

 

*

 

, 살려주오!”

 

유독 칠흙 같이 까만 밤, 달빛만 어둠을 헤치는 그런 까만 밤이었다. 신발을 신은 채 집 안으로 들어온 사내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거친 숨을 몰아 내쉰다. 그에게서 떨어진 비릿한 물기가 후두둑- 하고 바닥을 두들긴다. 따닥따닥- 이를 부딪치며 어깨를 부르르 하고 떠는 꼴에도 결코 내려놓지 않은 작은 총구의 방향은 호롱불 하나에 의지 해 평화롭게 서적을 읽고 있던 남자를 향해있다. 낯선 이의 등장에 자세를 고쳐 앉은 주인과 온 몸으로 울음을 토해내는 하얀 손님의 눈이 붉은 허공에서 마주친다. 살려주오. 살려주오. 살려 주오. 칠흑 같은 어둠을 뚫는 것이 비단 달빛만이 아님을. 살려주오. 살려주오. 살려주오.

 

그 총부터 내려놔야, 도와줄 수 있지 않겠소.”

 

두 손으로 꼭 잡았던 총을 천천히 내리는 사이에도 목울대를 크게 동하던 사내의 눈은 여전히 불안하게 이리저리 허공을 두들긴다. 앉아있던 남자는 그런 그의 팔을 끌어 자신의 옆에 주저앉혔다. 사내는 작은 힘에도 금방 주저앉았고, 남자가 마주한 그의 눈동자 안에는 일렁이는 별들이 한가득하다.

 

부서질 듯 일렁이는 어깨와 바람에 찢겨 떨어지는 꽃잎 같은 숨소리, 비바람을 모두 떠안고 온 듯 온 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까지. 흠뻑 젖어 물먹은 솜마냥 무거워 보이기까지 한 그의 모습에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입가에 작은 웃음을 물어, 그의 어깨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토닥이는 손의 박자에 맞춰 사내의 가슴에 묶여있던 숨이 긴장의 끈을 놓으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터진 숨 안에는 말이 담겨있다. 살려주오. 살려주오. 살려주오. 온통 잿빛이던 사내의 눈동자에 별 하나가 반짝인다. 괜찮소. 이제 다 괜찮소. 사내의 눈동자에 담긴 남자의 얼굴이 별처럼 반짝이던 순간이었다.

 

다 뒤져서라도, 이 새끼 찾아내!!!”

 

질척질척- 거리는 구둣발 소리. 이웃 집 싸리문을 쳐대는 소리. 건넛집 아이가 놀라 우는 소리. 번개가 번쩍하고 천둥이 우르릉 쾅쾅- 하는 소리. 남자의 귓속을 파고드는 그 수많은 고함들에 심장이 달음박 치기 시작한 순간, 그는 그 소리가 자신의 앞에서 떨고 있는 사내를 찾음으로 인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남자는 급히 떨고 있는 그를 재촉해 안쪽으로 몸을 눕게 했고 곱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몸을 돌려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정자세로 고쳐 앉았다. 내 등에서 얼굴을 때지 마시오. 반드시 그래야 하오. 차분한 음성에 마음을 기댄 사내는 조심스레 그의 등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이불을 끄집어 올려 작은 숨을 숨겼다.

 

타다다다닥- 벌컥- 급히 열리는 문소리에 사내는 더욱 눈을 꼭 감고 고개를 기댄 등에 다시금 깊이 얼굴을 파묻었다. 문틈으로 실려 들어온 수많은 고함이 사내의 온 몸을 찌르는 듯한 기분에 그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살려주오. 살려주오. 살려주오.

 

이게 무슨 짓이요?”

“... 여기 사내 놈 하나 들어오지 않았나?”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자신을 찾는 소리에 사내는 몸을 떨었지만, 남자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제복을 입은 낯선 이를 바라본다.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자연스럽게 숨을 뱉었다. 심장이 땅으로 꺼질 것처럼 두려웠으나, 등으로 닿아오는 바들바들 떨리는 숨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봐, 거기 뒤에는 누구지?”

 

낯선 이의 음성은 긴 장총의 끝에 달린 매서운 칼끝으로 금방이라도 이불더미를 쑤셔 놓을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내 처요. 당신들 소리에 복중에 아이가 놀라 하혈을 하였으니, 더 놀라게 하지 말아주시오. 부탁하오.”

 

이불더미 끝자락이 핏빛이 도는 것을 힐끗 본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남자는 더욱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대도 처자식이 있다면, 부디. 어지러운 난국이라고는 하나, 아이의 눈이 세상의 빛조차 보지 못한 채 감긴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소. 내게 더 이상 무언가를 빼앗아 가지 말아주오. 부탁하오.

 

여긴 없다, 가자!”

 

문지방을 우악스럽게 밟고 지나간 낯선 이의 걸음이 빗속으로 멀어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남자는 참았던 숨을 몸 밖으로 몰아냈다. 살았다. 살렸다. 살렸다. 등에 고집스럽게 얼굴을 묻고, 흘러내린 옷자락을 꽉 쥐고 있던 사내 또한 고개를 때고 손아귀의 힘을 놓아본다. 앉아있던 남자는 자신의 등에서 떨어져 나가는 그 유약한 몸짓에 급히 몸을 돌려 핏빛이 감돌던 부근의 이불을 젖혔다. 그의 다리를 감고 있는 옷자락이 잔뜩 질척였고, 빗물과 핏물이 뒤섞여 비릿한 향이 가득했다.

 

괜찮소?”

 

남자가 그의 다리를 만지자 남자는 소리를 삼키며 몸을 크게 구겼다. 잔뜩 구겨진 하얀 빛의 얼굴에는 핏줄이 요동쳤다. 남자가 옷을 걷어 올리려고 하자 입으로 삼켜내던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갔고 놀란 남자는 다급히 몸을 일으켜 방 옆쪽으로 나 있는 작은 문으로 몸을 옮겼다.

 

하아, 하아- 작고 붉은 방안에 정적이 흐르자 누워있던 이가 눈을 살포시 떠 그제야 생사가 오갔던 작은 공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시골 향이 진한 방, 한 쪽 구석에 잔뜩 쌓여진 서적들, 방 한 가운데 놓아진 낮고 네모 진 상, 벽에 걸린 차분한 몇 벌의 옷가지. 이것이 전부인 소박한 방을 훔치던 눈이 바닥에 머물러 구둣발과 군화 자국들이 흙탕물과 섞여 도장마냥 찍혀있는 꼴을 담는다. 사내는 문득 다리가 욱신거림을 느꼈다.

 

벌컥- 하고 열리는 문에 몸을 급히 일으키며 품안에 두었던 총에 손을 두었으나, 자신을 구해 준 남자인 것을 알고 이내 다시 몸을 바닥에 눕혔다. 자신의 품에 둔 총과 참 어울리지 않는 방이었다.

 

괜찮소? 두 손 가득 들고 온 것을 자신의 옆에 둔 그는 사내의 신과 양말을 벗겨 냈다. 물과 땀으로 잘 벗겨지지 않는 그것들에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가위로 핏내 가득한 바지까지 조심스레 자르기 시작했다. , 생채기를 건드릴 까 천천히 움직이는 가위질에도 별 수 없이 아린 상처에 입술을 깨무는 사내는 결코 소리 한번을 지르지 않았다.

 

이걸 어찌 견딘 게요?”

 

무릎 부근부터 복숭아 뼈 바로 위까지 사선으로 벌어진 살덩이 틈으로 끈적한 피가 사내의 떨림에 맞춰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사내의 다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아래에 하얀 천을 두고 상처 위로도 깨끗한 천을 올려 단단히 내리 눌렀다. 하얀 설원에 피어나는 붉은 매화처럼 핏물이 번져가는 모습에도 사내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다. 그렇게 두개의 설원을 붉게 물들이고 나서야 그의 다리에서 끊임없이 토해 나오던 핏물은 잠잠해 지기 시작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낸 남자는 상처 위로 천천히 소독약을 붓기 시작했다. 상처 틈으로 스며드는 그 독한 기운에도 사내는 그저 몸을 떨며 두 손을 꽉 그러 쥘 뿐. 아픔에 비례해 굳게 닫힌 눈꺼풀의 떨림이 결코 연약하지 않음을 지켜보며 남자는 사내의 삶이 그리 순탄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꽤 넓은 상처를 모두 다독인 후 거즈를 길게 접어 환부에 대고 단단하게 마무리 하는 남자의 손길이 능숙하다. 상처가 깊진 않아, 꾀매지는 않아도 되겠소만. 다 아물 동안은 무리하면 안 되오. 이제 정말 안심해도 되니 푹 주무시구려.

 

아니오. 신세가 많았소.”

 

누워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키려 손으로 바닥을 지탱하자, 놀란 그는 사내의 몸을 다시 눕히려 했다. 나는 가야 하오. 이만 가야 하오.

 

이게 무슨 짓이요! 살려 달라 하지 않았소! 이 몸을 하고 어딜 간단 말이오!”

더 이상 폐를 끼칠 수는.”

환자를 죽이는 의원은 없소.”

허나 나는.”

환자가 죽는 것을 보기만 하는 의원 또한 없소.”

“.........”

그리고, 환자를 죽게 내버려두는 의원 또한 없소이다. 손을 내밀었으니, 살려주게 해주시오.”

 

작은 방안의 또 다시 부딪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혀 몇 번 깜빡거리자 강제로 눕혀진 사내는 깊은 숨을 내쉬며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얼굴은 그제서야 환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우리- 서로 가장 중요한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소. 그거 아시오? 그 웃음이 참으로 다정하여 봄바람마냥 방 한 가득 살랑인다.

 

무엇을 말이오?”

나는 송민호라 하오. 그대는 이름이 뭐요?”

 

입술을 비집고 나온 탄성에 웃음이 묻어나온다.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채 숨을 한번 들이 쉰 사내가 쉽게 열지 않던 입을 처음으로 쉽게 움직여 말을 이었다.

 

... 진우. 진우라 하오.”

 

환한 웃음과 함께 동그란 이름을 다시금 입에 담는 남자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서로의 웃음이 눈에 맺힌 그 순간 두 사람의 가슴에서 작은 꽃이 싹을 틔우니. 겨울의 문턱에서 불어오는 신기한 봄바람이여라.

 

 

*

 

의사이 되려 했었지요. 지금은 돌팔이 의원이지만.”

 

소매를 걷어붙이고 펌프를 위 아래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움직임이 꽤나 힘차다. 마당 쪽으로 다리를 내려놓은 채로 툇마루에 앉아 끼익- 끼익- 거리며 물을 끌어 올리는 야무진 손을 바라보던 사내의 시선이 그의 등에 가 닿는다. 크고 단단한. 저 등에 기댔던 자신이 떠올라 귀 끝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괜히 하늘을 바람본다. 폭우가 쏟아진 다음 날의 하늘은 청하하기 그지없다.

 

스무 해를 넘기는 동안 내 눈에는 나라도, 사람도 중요치 않았던 것 같소. 그저 나를 밟고 비웃었던 왜놈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그들을 비웃어 주리라, 다짐만 해도 수 백 번은 한 것 같소. 그들을 향한 분노와 화를 어쩔 줄 몰라 나는 그저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갈색의 넓은 들통을 가득 채운 물이 찰랑이다 넘쳐 바짝 마른 땅을 적신다. 그 어떤 발자국도 남지 않은, 바짝 마른 마당에 사내는 어젯밤 일이 까마득하다. 그는 사내 옆쪽에 널브러져 있던 이불더미를 들어 들통 안으로 집어넣었다. 핏물이라잘 빠지지 않을 텐데. 설원의 붉은 꽃이 소담하게 피었으니, 안 빠지면 또 어떻소.

 

그러다 하루는 내가 있던 병원에 한 젊은이가 노모를 업고 온 거요. 젊은이는 노모가 갑자기 쓰러졌다하며 살려 달라 고함을 치더이다. 우리말로 말이오. 그런데 아무도 그를 보지 않는 게요. 말하고 있는 사람을 없는 사람 취급한다는 것이 그런 것이외다. 지나가는 이마다 붙잡으며 살려 달라 우는 그를 참. 참 무서웠지요.”

 

바짓단을 무릎께까지 걷어붙인 그는 망설임 없이 발을 들통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내 시작 된 그의 걸음에 물을 채 먹지 않았던 이불들이 이리저리 물을 먹으며 요동친다. 그의 힘찬 움직임이 아주 천천히 빙글 하고 돌아 툇마루에 앉은 사내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를 잡아주지 못한 내가 말이오.”

 

두 손을 허리에 두고, 고개를 하늘로 향하게 젖히는 그가 뿜어내는 숨이 참 깊고 아득한 것이라, 사내는 문득 제 어미의 등이 기억났다. 선선한 여름밤이면, 방문을 열어놓고 이곳저곳에서 얻어온 바느질꺼리를 소쿠리에 소담히 넣어두곤, 쉼 없이 손을 움직이다 문득 문득, 까만 밤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하늘을 보며 내뱉던 숨으로 들썩이던 등이.

 

그 후로 매일 같이, 잠자리에 들 때면 그가 나를 찾아오더이다. 나를 붙잡으며 살려 달라 고함치던 그 우리네 사람이 말이오. 결국 나는 병원을 그만두고 이 작은 마을로 물어물어 와 돌팔이 의원놀음을 하고 있소.”

 

잠시 멈췄던 움직임을 다시 시작하며 몸을 돌린 그가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꽤 떨어진 두 사람의 사이로 날아다니는 숨을 서로 조심스레 삼키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듯 눈을 깜빡였다.

 

아 그쪽은 혹, 일본 사람이오?”

그렇다면 순사가 잡으러 올 리 없지 않겠소.”

총을 가지고 있길래, 이름 팔아먹은 조선놈이 일본인 흉내내다 내쫒기는 줄 알았소.”

하하, 이 총은 조선의 것이오.”

 

자박거리는 남자의 걸음이 갈색 들통 안에서 쉼 없이 움직이다 문득 움직임이 멈추었고, 획 하고 몸을 돌려 사내를 향해 바로 섰다. 남자는 사내를 향한 얼굴에 웃음을 머금는다. 우리는 같은 조선인이 구료. 참으로 반갑소. 내 천하를 얻은 기분이오. 남자의 너스레에 사내가 작게 웃었다. 그렇지 않소~ 같은 조선인이 모였으니, 천하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지요.

 

나의 천하가 되어주는 그대는 무슨 일을 하오?”

 

갈색 들통에 넣었던 발을 빼내어 받아놓은 깨끗한 물을 한바가지 퍼 자신의 발에 붓고 들통을 반쯤 들어 안에 있던 물을 버린다. 설원의 붉은 꽃이 그 붉기가 많이 희미해지긴 했으나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다. 무거워진 이불을 들어 쥐어 짜내어 남은 물기를 털어내는 그는 입을 열어, 나는 돌팔이 의사라고까지 고백하였거늘, 어찌 대답이 없소!

 

하하, 난 그저아무도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나, 누구나 바라는 세상을 되찾기 위한 일을 하오만.”

 

시선을 떨어뜨리어 자신의 다리로 향하는 그의 시선이 자못 씁쓸하다.

내가 삶에 대한 미련이 많아 대업을 이루기엔 너무 유약한 것 같소.”

 

우리는 모두 다 유약한 법이며, 모든 이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미련을 갖는 것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소. 그게 삶이고, 그게 사람인 것을. 내게 총을 들이밀던 기세는 어디 갔소?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이불을 넓게 걸고 이불을 쥐어 양 옆으로 탁탁- 당기는 남자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나, 그를 보고 있었으니.

 

오늘은 하늘이 참으로 좋소.”

 

남자의 목소리가 다정한 바람을 타고 날아가, 그의 귓가에 머무르며 그를 간질이니.

 

참으로 다정한 바람이 근심 없이 불어오는 구료…….”

 

*

 

누구시오?”

 

고개를 들자 시야로 들어온 작고 어린 얼굴에 놀란 사내가 몸을 뒤로하고 눈을 깜빡인다. 사내는 아침부터 부산스레 움직이며 나갈 채비를 하던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필요한 건 없는지 물어오는 그 다감한 목소리에 고개만 설레설레 내 저었던 자신이 문득 떠올라 어쩐지 더운 기운에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파묻고 있던 참이었다. 남자가 계속 눈만 깜빡이고 있자, 아이는 그가 앉은 툇마루 아래 디딤돌에 올라서서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그를 흘겨본다.

 

누군데, 우리 의원님 댁에 있는 거요? 환자요?”

이걸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

 

아이의 단호한 어투에 웃음을 참으며, 사내는 자신의 다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린 아이는 사뭇 진지하게 그 상처를 보더니 손을 들어 머리를 벅벅 긁어댄다. 못 보던 사람이라 나쁜 사람인 줄 알았소. 미안하오. 내 사과하리다. 아이답지 않은 그 말투에 사내는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될성부른 아이구나! 네 이름이 무어냐?”

이름을 물을 때는 자신의 이름부터 말하는 것이 예의라 배웠소!”

그래, 그래. 미안하구나. 나는 진우라 한다.”

진우?”

내 이름이 익숙지 않겠구나. 그럼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면 어떻겠느냐?”

 

좋소! 내가 절 때 이름이 어려워 그리 부르는 건 아니오! 허리에 두 손을 올려놓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아이가 귀여워 사내는 웃음을 머금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사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아이가, 그가 손을 거두자 그의 옆으로 풀썩 튀어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그의 얼굴 쪽으로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너른 마당을 보며 말을 이었다.

 

자신은 저기 저 끝에 보이는 집에 사는 준이라고 하는데, 요즘 자신의 어머니는 동생을 돌보느라 자신은 안중에도 없어 조금은 서운하지만 인생살이가 다 그런 거 아니냐는 너스레부터 시작하여 내년이면 8살이 되는데 민호에게 한글을 배우기로 했다는 이야기, 모든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지치고, 아프기라도 하면 그를 찾는다는 이야기까지. 쉴 새 없이 입술을 조근 거린다.

 

진짜 우리 의원님은 정말 좋은 분 같소.”

그래, 맞다. 정말 좋은 분이지. 너무 좋은 분이라좀 무섭구나.”

?”

아니다~”

! 그리고 참 잘생겼소! , 나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오.”

? 하하, 요 녀석!”

 

사내는 아이가 조잘거리는 틈으로 문득 그가 참 좋은 사람이란 생각과 함께 그 다감한 그 말투와 눈빛이 떠올라,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 하다.

 

 

*

 

뭡니까?”

 

방에서 툇마루로 나온 사내의 얼굴 앞으로 붉은 꽃 한 다발이 불쑥. 꽃다발을 꼭 쥐고 있는 손을 따라가니 고개를 손과 반대편으로 하여 돌리고 있는 그의 쑥스러운 옆얼굴이 사내의 눈에 들어온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팔 떨어지겠소, 하고 말끝을 늘이는 그의 목소리에 꽃을 받아들고는 그를 빤히 바라본다.

 

오는 길에향이 좋기에 그냥 좀 꺾어 왔소.”

 

고개를 여전히 돌린 채, 애써 담담히 말하는 그의 모습에 사내는 그 꽃보다 더 환한 꽃을 얼굴에 담았다가 제 처지가 떠올라 얼굴에 담았던 생기를 조금 덜어낸다. 그럼 나는 옷을 좀 갈아입겠소. 여전히 고개를 멀찌감치 돌리고 있던 그가 바닥에 눈길을 머문 채 급히 방으로 몸을 옮겼다.

 

넌 꼭 수줍은 소녀 같은 얼굴을 하고 있구나. 혹 연정을 품었느냐?”

 

살랑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꽃이 그를 향해 고개 짓을 한 번, 두 번. 꽃에 붉은 기운이 사내의 볼에 닿아 수줍게 인사를 고하니 사내의 귀 끝이 괜스레 빨갛게 물이 든다.

 

*

 

솜씨는 없소만, 늦으시기에.”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온 남자의 눈에 밥상을 소담히 마련한 채 앉아있는 그가 닿았다. 한 손에 들었던 수건을 목에 두르며 그를 마주하고 앉아 이게 뭐요? 하고 묻자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그가 작게 입을 땐다.

 

그대가 만든 게요?”

먹고 탈이나 나지 마시오.”

하하. 걱정 마시오. 명색이 내가 의원 아니오. 돌팔이라 그렇지.”

 

몇몇 나물 반찬과 된장국, 김치가 전부인 소박한 저녁상이었으나 남자는 군침이 돌았다. 사내는 남자의 시장기 어린 눈빛에 작게 웃으며, 몸을 뒤로 해 이불 속에 넣어 둔 밥 한 공기를 꺼내 그의 앞에 놓아둔다. 남자가 그가 하는 모양새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아까보다도 더 느릿한 음성으로, 더 작게 입술을 움직인다.

 

내 어미가 항상 아비를 기다리며밥 한 공기만은 따뜻하게 먹이려 하셨던 것이 생각나 흉내내봤소.”

 

남자는 사내의 하얀 두 볼에 선홍빛 꽃물이 소담히 자리를 잡아 자신에게 손짓을 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간질거렸다.

 

당신은 조선 사람을 살리는 중요한 사람이니.. 더 많이 드시오.. ”

하하 고맙소, 그리 말 해 주어서 말이오.”

 

밥을 한입 가득 먹는 기분이 이리도 날아갈 듯 했던 지. 남자는 입 안에 온 하늘을 가득 넣은 듯, 그가 전해 준 온기를 천천히 씹다 문득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자신을 한껏 안아주는 그 밥의 온기가 매일 밤 자신을 노려보던 그 남자의 환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참 따뜻하오. 그대처럼

 

또 다른 자신이 자신을 노려보던 그 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왜 그리 두리번거리는 게야?”

 

툇마루에 앉아 책을 보던 남자의 시선 넘어 이리 저리 오고가는 아이의 머리통이 인사를 대신한다.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연신 마당 이곳저곳을 뒤지는 아이의 손이 부산함에도 영 실속이 없다. 무엇을 찾기에 갈색 들통은 들어다 보는 게야?

 

의원님, 그 형님은 어디 있소?”

형님?”

그 예쁜 형님 말이오~!”

진우를 말하는 게로구나.”

 

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무릎에 놓고 아이가 찾는 이에 대해 가만히 생각하던 남자가 입술 끝을 올리자, 아이가 뭔가 생각 난 듯 쪼르르 달려와 눈을 반짝인다. 아이가 눈에 담은 반짝임은 시대의 고단함이 묻어나지 않는 것이기에, 남자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이리도 티 없이, 눈 안 가득 별을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맞소! 거 참 예쁘지 않소?”

 

남자는 아이의 진지한 눈빛에 호탕한 웃음으로 화답한다. 네가 보기에도 그 사람이 그리 보이더냐? 하하하- 그래그래.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참 예쁜 사내지-

 

그래서, 꼭 내 각시 삼으려 하오.”

하하하, 그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냐?”

“..........”

왜 말이 없어~ 어리다 하여 퇴자라도 맞은 것이야?”

“.. 예쁜 형님은 이미 연정하는 이가 있다하더이다.”

 

호탕한 웃음을 뚝하고 멈춘 남자는, 자꾸만 입가에 맴도는 수줍은 단어를 곱씹어 본다. 연정연정이라……. 그러다 문득 왜 인지 모르게 입에서 쉬이 떨어지지 않는 그 단어가 그리 곱게 들리지 않음에 괜한 부끄러움이 치솟아 입술을 깨물었다.

 

의원님은 뭘 그렇게 중얼거리시오?”

, 아니다. 그런데 아직도 배가 그리 자주 아프더냐?”

 

 

*

 

 

잠원댁, 그 얘기 들었우?”

무슨 소리?”

조만간 그 일본 순사 놈들이 다시 들이닥친다네~”

아니 며칠 전부터 왜 그러는 거야?”

그게우리 동네에 독립군이 숨어들었다고 하더라구.”

독립군?? 세상에, 어디에 숨어있데?”

! 아휴, 좀 조용히! 그건 나도 모르지. 그런데 그 사람 숨겨주고 있는 사람도 큰일이야.”

독립군이면 나라 위해 목숨 받치는 사람이잖우. 숨겨 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 놈들한테는 역적이잖아~ 숨겨준 사람도 목숨부지가 힘들 것이라 하든데?”

독한 놈들 일세.”

누가 듣겠어! 이런 말만 해도 잡혀가는 세상 아닌가. 아휴, 그럼 난 감세~”

 

사내의 어깨가 떨려왔다. 길목 어귀에 선 두 아낙이 자리를 떴음에도, 여전히 그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넘실거렸다. 그러다 번뜩, 정신이 든 사내는 전혀 태연하지 않은 발걸음으로 애써 태연한 척 하며, 길을 걷는다. 아니, 길이 사내의 발에 아주 급하게 닿고 또 닿고 또 닿았다.

 

손가락이 마음대로 요동치고 아랫입술이 떨려와 숨이 갚아짐이 느껴지지만, 차마 걸음을 늦출 수가 없다. 눈가가 시큰거리고 근질거리는 것이 꼭 눈물이 차오르는 듯 했으나, 그 마저도 그 급한 걸음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씻겨 내리듯 안녕을 고한다.

 

왔소?”

 

산책은 잘 다녀왔소? 이제 걸은 만은 하오? 입 꼬리를 올리며 묻는 남자의 천진한 웃음에도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환히 웃는 얼굴로 자신에게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아이의 움직임에도 여전히 우두커니 서서 숨을 삼킨다.

 

“.. 무슨 일이오? 왜 이리 식은땀을 흘리오?”

아니요. 아직은 좀 걷는 게 힘든가 보오. 별 일 아니오.”

 

눈을 급히 깜빡이던 사내가 수돗가 쪽으로 걸음을 옮겨 그를 등지고 서 녹슨 그 펌프를 꼭 잡았다. 끼이익- 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귀에 박혀 들어왔다. 온 몸으로 펌프를 움직이는 그의 몸짓에 물이 쏟아지고, 그 펌프 소리에 맞춰 애꿎은 눈물이 뚝뚝 쏟아진다.

 

*

 

꼬마야, 혹 이 동네에 사는 사람 말고 또 누구 본 적 있느냐?”

! ~ 기 저 건너편 의원님 댁에 예쁜 형님은우리 동네 사람은 아니오!”

원댁? 아이가진 부인이 있다는 그 집을 말하는 게냐?”

큰일 날 소리요! 의원님은 혼인 안 하였소~”

 

그래그래. 고맙다, 얘야.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낯선 이는 한 쪽 입 꼬리를 서늘하게 올리며 한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는다. 그리곤 주머니 속에서 돌아다니던 작은 성냥 곽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웃음을 지워나갔다.

 

“.. 쥐새끼 같은 놈들, 날 가지고 장난을 쳤다, 이건가.”

 

 

*

 

 

"진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남자의 눈에 빗물로 얼룩한 옷 매무새를 정리하던 사내가 들어왔다. 얼른 몸을 일으켜 그의 어깨를 잡자 흠칫하고 그 어깨가 동하지만, 결코 뒤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새벽 어스름이 인사를 나누던, 추적추적 비가오던 검은 밤 두 사내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조우하던 바로 그 시간.

 

이 새벽에 무슨 일이오?”

깼소? 미안하오. 내 너무 급한 일이라, 차마 깨우지 못했소.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소.”

아직 다리가 성하지 않지 않소! 어딜 간단 말이오!”

 

아직 성치 않다고 말하지 않았소. 아직 걸음이 불편하다 하지 않았소. 벌써 이리 가면 어쩐 단 말이오. 왜 이리 급히 가려 한단 말이오. 가슴으로 내 뱉는 수많은 말 들 중 몇 개를 고르고 골라, 사내의 작은 등을 향해 뱉어냈다. 남자는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약속하리다. 내 돌아 올 것이니. 반드시 그리 할 것이니 보내주시오.”

 

몸을 돌려 사내가 마주한 남자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있었다. 짙은 어둠이 한 가득 내려앉은 절망의 얼굴. 그런 얼굴이었다. 사내는 제 어깨에 닿은 남자의 손을 잡아 내려놓으며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단호한 눈빛으로 가야한다 수 백 번을 말하고 있었다.

 

이 동네에 의원은 그대 뿐이니 절 때 아프면 안되오. 그대는 중요한 사람이니, 끼니는 제때 꼭 세끼 다 챙겨야 하오, 알겠소?”

 

다정히 눈을 마주쳐오는 사내의 담담하고 맑은 음성에 남자는 툭 하고 떨어져있는 사내의 손을 잡고만 싶었다.

 

, 그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따뜻한 밥 한 공기는 항상 마련해 놓으리니

 

담담하지 못한 그 음성이 남자의 입을 빠져나가. 그 밥이 식기 전에는 꼭 돌아오라는 말은 꿀꺽 삼킨 채 흐려진다. 손조차 쉬이 잡지 못하는 떨림이 까만 방을 가득 채웠다.

 

문 앞에 선 사내가 몸을 멈춰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웠소. 참 많이 고마웠소.”

 

처음 이 방에 들어왔던 그 날처럼 낮은 숨을 내뱉으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방문을 여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려왔음을 모르는 남자는, 그저 애꿎은 이불만. 희미해져가는 붉은 꽃들이 흐드러져 울고 있는 애꿎은 이불만 꽉 그러쥐며. 다시 닫히는 방문에 눈길을 둔 채.

 

내 기다릴 테니, 빨리 돌아와야 하오. 그래야 하오.”

 

못다 한 인사를 쉽지 않은 음성으로, 들을 수도 없을 만큼 작게.

 

내 당신을온 마음으로 연정하오…….”

 

온 마음과 진심을 담아 그렇게. 허공으로 흩어져 부서질 그 수많은 마음들을 그렇게 뱉어내고 또 뱉어낸다.

 

*

 

싸리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온 사내가 자신의 품에 있던 작은 총을 꺼내어 쓰다듬어 본다. 이제 네가 어색하지 않은 세계로 돌아가는 구나. 사내는 눈을 한번 꽉 감았다 뜨곤 결심이 선 듯,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성치 않은 다리에 갑자기 가해진 힘으로 인한 아픔이 그를 마구 쑤셔대지만, 사내는 걸음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

 

어디 가는 게요, 독립투사양반?”

 

한참을 달리던 사내의 길을 막아 선 낯선 그의 서늘한 목소리에 그의 걸음이 급히 멈춰진다. 아낙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그 골목어귀였다. 아직 이곳까지 밖에 오지 않았다는 생각에 사내는 주먹을 꽉 쥐며 달아나야 함을 자신에게 상기시켰다. 그가 사내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자, 그는 뒷걸음질을 치다 몸을 급히 돌려 달리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몇 걸음도 채 때지 못 한 그의 눈앞에 순사들의 빠릿빠릿한 움직임이 펼쳐졌다. 수많은 총구가 사내를 향하여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하, 니가 언제부터 그 자의 처가 됐지?”

 

그가 사내에게 남자의 존재를 상기시키자, 사내는 몸을 틀어 그들에게 뒷모습을 보이지 않게 섰다. 그리곤 품에 안았던 총을 꺼내 자신을 둘러 싼 수많은 총구와 마주했다. 살아야 한다. 그러나 살 수 없다면 죽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 비장한 움직임이 끊임없는 슬픔에 휩쌓여있다.

 

조선을 팔아먹은, 쓰레기 같은 놈들!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 하늘을 향해 총을 한 발 쏜 사내는, 그를 막아선 이들을 향해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와 사내는 참 질긴 인연이었다. 그에게 사내는 경찰청에 숨어들어 폭탄테러를 한 범죄자이자, 자신의 얼굴에 화상자국을 남겨 사랑하는 여자에게 버림받게 만든 원수였고, 사내에게 그는 자신의 나라를 판 매국노이자, 남자를 만나게 해 준 은인이었다.

 

하하하. 저 새끼 산채로 잡아!!!”

 

탕탕탕- 몇 발의 총성이 사내의 귓속으로 파고들며, 차마 감출 수 없는 신음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총을 쥐고 있던 손에 한 발, 왼쪽 무릎에 한 발. 그 외압에 무릎이 꺾여 바닥으로 꼬꾸라지듯 쓰러진 그가 고통에 몸부림치다, 넘어지며 자신과 멀리 떨어져 버린 총을 다시 잡기 위해 팔을 아슬아슬하게 뻗어갔다.

 

에이, 그렇게는 안 되지.”

아악~!!!”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 그가 손을 뻗어내던 사내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손목을 강하게 짓밟는다. 담배꽁초를 비벼 끄듯이 발목을 비틀자, 사내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튕겨져 나왔다. 만족스럽게 웃음을 거는 그의 얼굴에 사내는 문득 어깨가 떨려왔다. 사내의 손목을 밟은 채로 주저앉은 그가 사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 비열한 눈을 마주쳐왔다.

 

조선 놈들은 유독 정에 약하다지?”

…… .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어서 나를 죽여라!!! 죽이란 말이다!!!!”

어차피 갈 목숨이라면, 길동무라도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소. 이새끼한테 재갈 물려!”

날 죽이란 말이다!!! 주우. 우읍!”

 

사내에게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던 그는 작게 실소를 터트리다 고개만 살짝 틀어 두 명의 순사에게 팔을 붙들린 채 몸부림을 치는 그를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잘나신 양반이 매국노 손에 어떻게 놀아나는지 지켜보리다.”

 

*

 

치익- 치익- 주머니에서 뒹굴 던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다, 껐다- 반복하는 그의 행동에 사내는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그는 불을 켤 때 마다 크게 동하며, 무릎이 꿇린 채 재갈 물린 입으로 잘 들리지도 않는 비명을 토해내는 사내가 우스워 더욱 그 행동을 장난스럽게 반복한다. 불을 붙였다, 입으로 후우- 하고 불 때 마다 크게 일렁이는 사내가 고개를 뒤 흔들자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의 집이었다. 그의 집이다.

 

왜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이지?”

 

씩 웃던 그의 뒤로 기름을 부어대는 움직임이 고요했다. 조용한 걸음으로 집안을 뺑 둘러 기름을 쏟아 붓는 그 움직임에 소용이 없음을 알면서도 온 몸을 뒤 흔들며 발을 구르는 사내의 몸짓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 나오라고 하고 싶은 건가?”

 

그는 사내의 절규가 만족스럽다는 듯 마당을 가로 질러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 스산한 밤처럼. 비열하고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치익- 하고 성냥에 불을 붙인 그가 디딤돌에 놓아진 신발 위로 그것을 휙 하고 던지고 유유히 사내의 곁으로 돌아왔다. 화악- 소리를 내며 무서운 기세로 기름에 옮겨 붙은 불길이 금세 집을 감싸 타오르기 시작했다. 잿빛 연기가 피어나고, 불은 집을 집어 삼킬 듯 퍼져 나가자 이내 사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오시오, 나오란 말이오. 왜 그리 가만히 있는 게요. 나를 기다리는 게요. 왜 나오지 않소. 제발 나오시오. 제발!! 재갈에 흡수되는 소리가 처량하기 그지없고, 그의 요동치는 몸이 무너질 듯 애처로워 그의 두 팔을 잡고 있던 순사들까지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길동무가 생겨 너무 좋은 모양이야, 이렇게 감동의 눈물까지 쏟아내고

 

사내를 곁에 둔 채 비아냥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는 것인지 고요한 외침만 지속 하는 사내는. 눈물범벅이 되어 몸부림치는 그 움직임이 너무 처절해 그의 양쪽 팔을 잡고 있는 순사들의 몸까지 크게 휘청이게 한다.

 

길동무에게 인사나 하시지오. 곧 뒤 따라 간다고.”

 

소리를 내 지르고 울음을 버려내는 그 모양새가 꼭 불타 주저 내려앉을 것만 같은 집의 모양새를 닮고 있어라.

 

 

*

 

 

신발 아래 놓아 둔 종이가 자작- 거리는 불길에 신발과 함께 타들어 가는 것을 아무도 모름은. 설원에 핀 붉은 꽃들이 녹아들어 사라져감보다 더 한 아픔일지니. 마음을 주고받은 지도 모르는 이 사내들의 울음이 하늘에 울리고 울려 빗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하늘도 그들의 울음에 함께 눈물을 쏟는 듯. 기약 없는 그 만남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 채. 타들어가는 두 개의 목숨이 한없이 가엽다.

 

그대들이 떠안았던 그 붉은 마음들이 저 먼 우주를 돌고 돌아 서로에게 닿을 수 있기를.

 

 

*

 

 

이리도 작은 글귀로 어찌 제 죄를 다 씻을 수 있겠습니까 만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이리 어리석게도 당신에게 손 수 전하지 못 할 글귀를 울음을 대신 해 적음을 부디 감내하여 주옵소서. 제가 당신에게 감히, 연정을 품었습니다. 감히 제가 송 민호라는 세 글자를 제 가슴에 아로 세기고 말았습니다. 제 비루한 몸과 처지에 한참을 울다 당신이 내민 그 손의 온기가 그리도 좋아 그리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항상 남겨놓겠다던 제 몫의 밥 한공기가 이제 제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지 못함은, 이내 망각하실 저에 대한 기억을 잠시라도 더 붙잡고 싶은 마음이라 여겨주옵소서. 사지로 떠나는 저의 마음은 그리 무서운 것이 아니나, 당신을 향해 품은 연정이 이리도 깊어 제 발걸음이 천근만근한가 봅니다. 허나 이제는 이 무거운 걸음을 때고, 당신의 등에 놓았던 얼굴을 거두어. 저는 이제 꽤 먼 길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검붉은 강을 건너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것보다, 민호 당신을 두고 가야 하는 이 심정이 헤일 수 없이 더 아려옴이 당신에게 품은 연정의 깊이라 생각하며 웃음을 머금고, 울음을 떠안고 먼저 먼 길을 떠나렵니다.

 

감사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 사모합니다.

 

 

*

 

 

준아

?”

내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의원님 부탁이라면, 뭐든 다 되지요~”

이 꽃을 좀 심어주겠느냐?”

한 송이를 말이오? 내 햇볕 제일 잘 드는데다가 심어드리리다!”

하하. 그래, 어디든 좋다. 대신 그 아래 이걸 같이 좀 묻어주겠니?”

이게 뭡니까?”

, 내 그 꽃을 찾아가라 말 할 사람의 것이란다.”

선물 같은 겁니까?”

그렇다고 해 두자.”

근데 누굴 주시려구요?”

.. 그냥 그런 사람이 있다.”

의원님 얼굴이 벌겋습니다.”

하하하. 부탁하마. 꼭 부탁해.”

 

아이는 손에 꽃한송이와 작은 연서를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왔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진우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달려 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에도 여전히 민호의 얼굴이 붉기만 하다.

 

 

*

 

 

내 연정을 한 수저 쯤 덜어 내 그대의 가슴에 담뿍 얹어 드리면, 그대는 제게 미소를 줄는지요. 그대의 가슴에 맺힌 그 눈물 한 방울을 덜어 내 제 손 위에 올려놓아 흩날려 드리면, 그대는 제 손을 잡아 줄는지요. 소담히 담아 아랫목에 넣어 둔 밥 한 공기의 온기에 저는 또 얼마나 위로 받았던지요. 얼마나 사랑을 받았던지요. 그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면서도 사랑이라 생각하고 위로받았던 저였습니다. 그대가 내 옆에 누워 내뱉는 숨이 좋아, 이불더미를 덮고 또 얼마나 두근거렸던지요. 그대의 하얀 얼굴을 마주했던 그 날 그대의 눈 속에서 만난 달빛에 반해버렸습니다. 그대의 상처를 빌미삼아 그대를 잡아 둔 시간들이 어찌나 불안하고 귀하던지. 말도 못하게 좋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내가 사내를 연정한다는 것이 그대에게 얼마나 큰 짐이 되는지 떠올리기조차 어려움에도. 입 안에 담아 둔 말이 너무 무거워 이렇게 이기적인 마음으로 뱉어버려 합니다.

 

진우, 그대가 매일 내게 와 주기를.

항상 돌아봐 주기를. 곁에 있어주기를. 기다려주기를. 매일 바라고 또 바래봅니다.

 

그 미소를, 연정합니다.

 


Written By. 요정의솜 (Twitter Account : @fairyfloss_s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