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개(滿開)하다 (Written by. PARAN)
2018. 5. 28. 21:19
만개(滿開)하다
w. 파란
* 일부 지명 및 인명 등은 역사 속에서 차용했습니다. 실제와 다름을 미리 밝힙니다.
* 모자란 글임에도 불구하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가 몰래 들어온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민호는 한숨을 쉬며 바닥에 난잡하게 흩어진 도안을 집어 들었다. 내려가기 전에 분명 책상 위에 올려둔 종이였다. 발이 달리지 않은 이상 멋대로 바닥에 떨어져 있을 리 없다. 저 말고 누군가 다녀간 게 분명했다. 언제부턴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요 근래 들어 물건의 배치가 하나둘 달라져 있었다. 빳빳하게 펼쳐져 있던 종이가 조금 구겨져 있거나 순서가 바뀌기도 했다. 곧 있을 축제 때문에 공방일이 바빠져 민호가 한참 정신이 없는 시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 일을 단순하게 생각했다. 제 건망증 때문이라고 치부한 게 완전히 틀려먹었다.
민호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곳은, 한 평 남짓한 크기로 순전히 그를 위한 공간이었다. 시쳇말로 하자면 아지트라는 소리다. 열셋에 도읍 상경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가 공방 사람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공방 뒷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그 때 함께 따라간 민호는 정상 부근에서 제 맘에 쏙 드는 나무를 하나 발견했다. 그 위에 집을 짓고 싶다고 생각만 하려던 걸 자신도 모르게 말로 뱉었다. 일부러 한 말은 아니었지만 어른들은 제 능력을 동원해 그 말을 현실로 바꾸어 주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장인’이라고 불리는 재주꾼들이었다. 나랏님의 명을 받고 지방에서 도읍 상경으로 올라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민호 아버지를 포함한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처자식을 두고 상경에 올라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선뜻 행동으로 옮긴 것은 민호를 보고 제 자식을 떠오른 모양일 것이리라.
어릴 때부터 공방에서 놀고먹던 민호는 자연스레 제 아비의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상경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위에선 그걸 퍽 기특하게 여기는 모양인지 공방에서는 늘 저를 챙겨주는 손길들이 많았다. 그런 만큼 민호는 공방의 우두머리인 아버지에게 깨지기도 많이 깨졌다. 만든 장신구가 하나같이 형편이 없다는 게 주 이유였다. ‘이래 가지곤 어디에 내놓겠냐!’라고 잔뜩 혼나고 있노라면 옆에서 ‘아이고, 성님. 애를 잡겠소. 이 정도면 잘 만들었지. 민호 정도면 제 또래보다 훨씬 낫구먼.’의 말들로 장인들-민호에게는 아저씨들-이 감싸주었다. 고우이 현(오늘날 행정지면 ‘군’에 해당)에서는 아버지의 제자들이 민호가 꾸지람 받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여기선 달랐다. 그건 민호 딴에 유일한 상경에 와서 좋은 점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내내 머리 굴려 그린 도안을 바탕으로 만든 장신구를 내놓이자마자 찬찬히 살펴보던 제 아비는 금방 인상을 찌푸렸다. 집에서는 한없이 좋은 아버지이지만 공방에선 달랐다. 이 곳의 책임자를 맡은 이후로는 공방에서 제게 더 엄하게 굴었다. 민호는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속으로 섭섭했다. 그렇게 형편이 없나. 한소리를 들으면서 숙인 고개엔 굳은살과 상처투성이인 손이 보였다. 뭐라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만, 아버지의 말에 추임새 넣듯 대답을 한 민호는 공방에 나오자마자 곧장 뒷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제 공간에서 마주한 낯선 이의 흔적은 그의 기분을 더욱 더 불쾌하게 만들었다. 이 침입자는 물건을 훔쳐가는 일은 없었는데, 다만 제가 다녀갔다는 걸 의도적으로 남기는 모양인지 아님 몰래 다녀갔다는 게 서툰 건지 민호가 정리해둔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게 미안했는지 어떤 때에는 간식 보따리가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기도 했다. 민호 입장에선 미안하고 자시고 들어오지 말았으면 하는 게 큰 바램이었지만, 침입자를 막을 어떠한 방도가 없었다. 끄응, 민호가 낮은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았다.
***
침입자는 쉽게 잡혔다. 아니,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그 날도 민호는 다를 바가 없었다. 양파 껍질 벗기듯 대차게 한 소리를 듣고 터덜이며 나무 위를 올랐다. 도대체 뭘 만들라는 건데에! 허공에 주먹질 한 번 하다 그것도 지쳐 뒤로 발라당 누워버렸다. 내일 그냥 못하겠다고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와중에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짐승이라고 하기엔 너무 사람의 소리이다. 감고 있던 눈이 저절로 뜨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니 웬 팔 하나가 터억, 그리고 말간 얼굴이 올라왔다. 곱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외모를 가진 소년이었다. 서로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놀라 몸을 흠칫거렸다. 하마터면 소년은 뒤로 넘어갈 뻔 한 걸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일단, 민호는 몸을 일으켜 소년이 올라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휴, 떨어지는 줄 알았네. 고마워!”
“예, 근데…뉘신지.”
옷차림을 보니 귀한 집 자제 같았다. 보따리와 서책을 바닥에 내려두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응? 나 저어기에 사는 사람.”
“저어기요?”
“응! 쩌어기이!”
소년의 손가락 끝은 황실 고위관리들이 모여 산다는 구역을 가리키고 있었다. 공방 뒷산 정상에 오르면 상경의 모습이 얼추 눈에 들어왔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가까운 곳이 소년이 가리킨 곳이었다. 올랐던 길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곧장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런 집안의 자제가 무슨 일로 산에 올라 여기까지 온단 말인가? 일단 민호는 그 생각을 잠시 제쳐두었고 당장이라도 여기에 멋대로 들어온 사람이냐고 물으며 이유를 추궁하고 싶은 마음을 삼켜내었다. 신분 차이도 있거니와 제 마음대로 행동했다가 공방에 피해가 간다면 그것도 큰일이었다.
“여기 주인 맞아?”
“…예.”
소년의 표정에 금방 화색이 돈다. 그는 민호를 줄곧 기다렸다고 했다. 소년은 들뜬 마음을 쉽사리 진정시키지 못했다. 그 덕분에 한 번에 여러 이야기를 섞어 버리는 우를 범하였고, 민호가 그의 말을 이해하는데에 시간이 꽤 걸렸다. 민호 딴에 정리한 바로는 소년은 어떠한 우연한 일로 여기를 발견해 호기심으로 올랐는데, 주인이 없이 문만 열려 있어서 버려진 곳인 줄 알았더란다. 자신이 쓸 요량으로 힘겹게 올라 내부를 살폈는데, 금방 임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김이 푹 식었다. 뒤를 돌아 내려오려던 차에 바람 때문인지 뭔지 무슨 이유에서 바닥에 떨어진 도안을 본 것이다. 민호가 그린 도안들이 소년에게는 신기함 반 호기심 반으로 다가왔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았던 탓에 그 후로 계속해서 방문했지만 그 때마다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일전에 내가 두고 간 거 봤어? 그럼 그거 먹었겠네? 맛있지? 우리 어머니가 나 먹으라고 만든 건데, 내가 여기 멋대로 들어온 게 미안해서 계속 두고 갔어.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길래…. 아, 그리고 나 책상 위에 있는 거만 봤어! 남의 물건 건드리지 말라고 배웠으니까. ㅁ, 물론 여기는 무단으로 들어오긴 했지만…그림 구경하고 싶어서 그랬어. 미안해. 장신구를 너무 예쁘게 잘 그려서 자꾸 구경하고 싶었어.”
민호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잇던 소년은 도리어 자기가 눈치를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민호는 침입자를 쏘아붙일 심산이었는데 뒤이어 나오는 ‘그림 솜씨가 좋다’ 라던가 등의 칭찬이 쏟아지자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칭찬이었다. 공방에서 듣던 아버지의 잔소리와 아저씨들의 칭찬으로 포장된 위로만 듣다가 진심으로 제 작품을 반기는 이를 민호는 지금 눈앞에서 처음 만났다. 그 반응에 소년은 자기가 가져온 보따리를 풀면서 앞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두 소년은 마주보고 앉아 말린 과일을 나눠 먹으며 말을 주고받았다. 민호가 도련님하고 부르면 그만인 것을 저 도련님은 일전의 자기 행동에 대해 사과를 하고 먹을거리를 챙겨오는 것도 모자라 이름까지 알려주었다. 너도 나 편하게 진우라고 불러! 말 편하게 해! 상당히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양인인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웃전의 이름을 입에 올린단 말인가. 민호가 고개를 저으며 부르기를 주저하자 진우는 둘만 있으니 괜찮다며 부르길 재촉하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민호가 진우야, 하고 작게 내뱉자 진우는 손을 내밀었다. 우리 이제 친구하자! 그 말에 민호가 상경으로 오기 싫었던 이유 중 하나를 떠올렸다. 같이 뛰놀던 친구들과 헤어지고 낯선 상경에 발을 디뎌야 한다는 것. 하루 사이에 갑자기 엄청난 일들이 몰려왔다. 아찔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내민 작은 손을 쥐었다. 생각 외로 따뜻했다.
***
진우는 틈이 나는 대로 민호를 찾아왔다. 그 사이에 시간은 훌쩍 지나 두 사람은 18살이 되었다. 키와 같은 외적 성장은 물론 내적 성장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민호가 가끔씩 진우를 샌님이라고 놀릴 정도로-그러면 진우는 송 아저씨라고 받아쳤다.- 사이가 가까워졌고 어느 순간부터 황궁에 입성한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민호와 진우는 부단히도 열심이었다. 민호는 공방의 소일거리 정도는 편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입지가 탄탄해져 있었고 진우는 그 해의 과거를 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호에게 생긴 변화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앓은 날이 있었다. 몸 상태가 심각해 어쩔 수 없이 형편에 맞지 않은 의원을 불렀고, 그에게서 양인으로 발현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양인도 음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 그와 그의 부모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심히 놀랐다. 그의 아버지는 과거 공부도 시킬 생각을 하지 못한 형편에 미안해했지만, 민호는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민호가 작업실에서 도안을 그리고 있노라면 옆에 따라 앉아서 공자니, 맹자니, 주자니 하며 쫑알거리던 작은 머리통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진우를 통해 달랬고 그가 꼭 과거에 붙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제 온전히 시험에 집중할 요량인지 요새는 자주 보이지 않아 섭섭한 마음도 있었지만.
푸르스름한 새벽이었다. 웬일로 이 시간에 잠에서 깬 민호가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밖으로 나섰다. 잠이 쉬이 들지 않으니 뒷산을 올라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햇빛이 제 자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때에 민호는 진우를 발견했다. 너도 잠이 안 와서 왔냐, 는 말로 가벼이 이야기하는데 어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푹 숙이던 고개와 마주하자 눈물범벅이다.
“김진우, 울어?”
“민호야아.”
어찌나 운 건지, 목소리가 다 쉬었다. 진우는 민호를 보자마자 토해내듯 울음을 뱉었다. 뚝뚝 끊어지는 말임에도 뭐라고 하는지 너무 선명히 들렸다. 나 음인이래, 음인. 과거를 못 봐. 과거를 볼 기회조차 없대. 나 어떡해. 내가, 내가 무슨 마음으로 공부를 했는데. 민호는 뭐라고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 역시 절망스러웠다. 아직 진우는 제가 양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진우의 발현을 제가 뺏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신분으로는 양인인 게 하나도 필요 없는데. 그리고 진우가 음인임을 안 마당에 제가 양인임을 밝힌다면 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그 또한 의문이었다. 과거를 어떻게 준비해 왔는지 옆에서 잘 지켜본 사람으로, 친구로 여러 모로 복잡한 마음에 민호는 그저 제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줄 수밖에 없었다. 더 울 것도 없는데 작은 네가 풀어내는 울음이 나를 나락, 이 땅 속으로 꺼지는 기분이 들게 만들어. 해줄 수 있다면 그 양인, 음인이라는 거 바꿔주고 싶었다. 진심으로.
***
“꽃놀이.”
“응?”
“꽃놀이 가고 싶어.”
상경의 4월은 벚꽃의 나라잖아. 말을 마친 진우가 민호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댔다. 그 날 이후로 진우는 품 안에서 서책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그리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황실 고위 관리 집안이라고 함은, 그 씨부터 양인으로 못 박아두고 태어났다는 소리다. 족보를 거슬러 보니 부계 쪽에서 원인이라고 했다. 가문의 번영을 위해서 양인 남성과 양인 여성이 혼례를 올리는 사회에서 음인과의 결합은 대게는 둘로 나뉘었다. 집안이 미미하거나, 후실이거나. 여하튼 진우는 운이 나빴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쏘다니고도 남은 성정에 스스로 갇히는 쪽을 택하였다. 어쩌다 한 번, 이렇게 민호를 찾아오긴 했다만 가족들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인이 홀로 돌아다니는 것도 모자라 양인을 만나기 위해 산을 오른다니. 진우의 노복 중 하나가 막내 도련님의 행동을 야합이라고 말 한 번 잘못 뱉었다가 흠씬 매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민호는 신경 쓰지 않고 진우를 대했다. 제가 좀 더 조심하면 될 일이다. 오죽 답답했으면 산을 오르나 싶기도 했다. 민호가 미리 약속을 잡아 두고 같이 올라가자고 해도 진우는 제가 원하는 때에 찾아와 혼자 집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이내 체념했다. 텅 빈 눈으로 민호의 도안을 쓸어내리는 손가락이 하얗다 못해 창백해보였다.
“어릴 때는 말이야. 부모님이랑 누이들이 꽃놀이 가자는 게 그렇게 싫었어.”
“응.”
“꽃 보는 게 뭐 그리 좋다고 하는지. 그냥 길가에, 나무에 흔히 피어있는 게 꽃이잖아. 그 중에서 4월에 피는 게 벚꽃이고, 상경에 유별나게 많은 꽃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당장 담장 너머에 보이는 게 벚꽃이라 그것도 충분한데 뭐 하러 귀찮게 멀리까지 꽃을 보러 가냐고 말이야. 근데, 지금은 완전히 다르네. 조금 있으면 만개하겠지? 밤에 보면 정말 예쁠 거 같아.”
“…보러 갈래?”
“아니이, 이거 우리 아버지 알면 뒷목 잡으신다.”
“그래도. 보고 싶다며.”
“지금 너 사월제 준비하느라 죽는 소리 내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괜찮아. 봄이라고 좀 들떴나봐.”
진우를 빤히 바라보던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를 뒤적였다. 손, 하는 소리에 진우가 손바닥을 내밀자 그 위로 귀걸이 한 쌍이 올라왔다. 꽤나 공들여서 만든 게 티가 났다. 민호는 일부러 황후마마 것보다 못나게 만들려고 애썼다는 말을 괜스레 덧붙였다. 사실은 마음 같아선 더 세련되고 멋지게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던 거였지만.
“뭐야, 이게.”
“그냥 만들어봤어. 원래 사월제 맞춰서 주려고 했는데 이 때 줘야할 거 같아.”
“예쁘네. 만드느라 고생했겠다.”
“고생은 무슨.”
진우는 멋쩍어하는 민호의 얼굴을 바라보다 시선을 손으로 돌렸다. 저 손은 항상 상처가 끊임없이 돋았다. 새살이 오르면 그 위에 화상을 입거나 베여서 민호는 늘 연고를 달고 살았다. 울컥했다. 진우는 차오르는 감정을 어찌할 줄 몰라 입술을 물었다. 민호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너한테 잘 어울리는 게 뭔지 고민하다가 만든 거야. 나중에 너 혼례 올릴 때는 그거 버려.”
“…왜?”
“왜라니. 그거 말고 더 화려하고 멋있는 걸로 해야지.”
“혼인 상대가 너일 수도 있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진짜.”
“말이 되는 소리지.”
사실은 나 너 좋아한지 오래 되었단 말이야. 더 내려갈 곳이 없는 사람에게만 생기는 용기였다. 혹은 쓸데없는 치졸한 오기.
***
사월제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황제와 황후가 쓸 장신구도 모두 만들고 나서야 민호는 겨우 숨을 돌렸다. 진우의 얼굴도 못 본지 한 달이 조금 넘은 것 같았다. 의도적으로 피한 게 맞았다. 들어도 못들은 척 할 수도 있었으나 진우 성격에 절대 그럴 일은 없다. 그래서 민호는 ‘도망’을 택했다. 안 그래도 힘든 사람에게 더 무거운 짐을 줘서 한없이 우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며 애써 자기 자신을 다독였다.
좋아하는 마음이야 민호도 마찬가지였다. ‘계급’이라는 장치가 없었다면 진즉에 사고 쳤을지도 모를 정도로 진우에 대한 감정은 달랐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민호의 머리를 차갑게 만들었다. 내가 좋고 네가 좋다고 해서 해결할 수 없는 무한한 신분의 벽이 그들 사이에 굳건히 존재했다. 그것도 이름난 가문의 자제라면 더더욱. 좋은 혼처에 장가들어 편히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사서 고생시키기 싫었다. 가능할 리도 없겠지만. 하루에도 몇 번을 뒷산을 오르는 길을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 뒤를 넘어가면 진우가 살고 있는데, 갈 수가 없었다. 이 미천한 신분으로는. 보고 싶고 미안한 마음, 서러움 따위의 온갖 감정들을 민호는 만개한 벚꽃을 보며 달랬다. 진우가 더듬었던 종이 위로 수없이 그렸고 연습했다.
공방 사람들에게 부탁해 손거울 하나를 만들었다. 금속을 녹이고 그걸로 장신구만 만들다가 붓을 잡으니 영 어색했다. 거울의 뒷면은 민호가 그려 넣은 벚꽃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마지막이라며 오른 뒷산에, 그들의 추억이 담긴 장소에 조용히 올려두었다. 편지 따위는 부러 쓰지 않았다. 그랬다간 정말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상경이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사월제가 끝나자마자 민호는 망설임 없이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황실에선 그가 계속 남아있길 원하는 눈치였지만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터였다.
“곧 떠날 사람이라 어려울 것 같다고 해도 말을 안 듣더라고. 어찌나 완강하던지. 제 관직까지 들먹였으니 말 다했지.”
“…말씀 조심하세요, 아저씨. 그것만 만들어 드리고 가야겠네요. 그래서 뭘 만들어달라고 하던가요?”
민호가 잠시 외출한 사이에 누군가 공방에 방문해 그를 찾았다고 했다. 상경을 떠나기 불과 삼일 남짓한 때였다. 관리의 무례함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렇게 되면 고향으로 내려갈 날짜가 뒤로 미뤄진다. 그러나 그 불쾌함은 의아함으로, 의아함은 민호의 귀향을 더욱 앞당기게 만들었다. 관리가 두고 갔다고 하는 편지와 상자엔 그가 부탁한 가락지 한 쌍을 만들고도 남을 금과 돈이 들어있었다.
***
미천한 몸에 남은 것은 한 쌍의 귀걸이와 급하게 챙긴 보따리 하나.
집에서 숨 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을까. 인(寅; 새벽 3시 30분 ~ 4시 30분)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진우는 혈혈단신으로 산을 올랐다. 앞이 보이지 않아 넘어지기를 몇 번, 감으로 주위를 더듬어 산을 올랐다. 집안의 수치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집에서 쫓겨났다. 노복들이 야합이니 뭐니 하는 걸 흘겨 들은 탓일까. 절로 눈물이 고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상황이 이런 때에 눈물이라니. 진우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여기서 호랑이 밥이라도 되어야지, 무얼. 무릎을 모아 접고 그 위에 팔을 포개 얼굴을 묻었다. 얼마 안 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진우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진우야.”
꿈에서도 몇 번이고 그리던 목소리였다.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어. 제게로 다가와 저를 살피는 손길이 꿈결같았다.
***
“꽃놀이.”
“응?”
“가고 싶어 했잖아.”
“그렇지.”
“꽃놀이 안 가는 거 안 아쉬워?”
“전혀. 지금은 못 가는 거지 안 가는 게 아니잖아. 귀걸이 끼고 멋 부려서 갈 거야.”
“가락지는?”
“당연히 그것도 껴야지. 누가 만들어 준건데.”
“내년에 가자, 셋이서.”
“그래. 셋이서 같이.”
Written By. PARAN (Twitter Account : @something_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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