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개(滿開)하다 (Written by. PARAN)
2018. 5. 28. 21:19

만개(滿開)하다

 




w. 파란




 

* 일부 지명 및 인명 등은 역사 속에서 차용했습니다. 실제와 다름을 미리 밝힙니다.

* 모자란 글임에도 불구하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가 몰래 들어온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민호는 한숨을 쉬며 바닥에 난잡하게 흩어진 도안을 집어 들었다. 내려가기 전에 분명 책상 위에 올려둔 종이였다. 발이 달리지 않은 이상 멋대로 바닥에 떨어져 있을 리 없다. 저 말고 누군가 다녀간 게 분명했다. 언제부턴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요 근래 들어 물건의 배치가 하나둘 달라져 있었다. 빳빳하게 펼쳐져 있던 종이가 조금 구겨져 있거나 순서가 바뀌기도 했다. 곧 있을 축제 때문에 공방일이 바빠져 민호가 한참 정신이 없는 시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 일을 단순하게 생각했다. 제 건망증 때문이라고 치부한 게 완전히 틀려먹었다.

 

민호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곳은, 한 평 남짓한 크기로 순전히 그를 위한 공간이었다. 시쳇말로 하자면 아지트라는 소리다. 열셋에 도읍 상경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가 공방 사람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공방 뒷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그 때 함께 따라간 민호는 정상 부근에서 제 맘에 쏙 드는 나무를 하나 발견했다. 그 위에 집을 짓고 싶다고 생각만 하려던 걸 자신도 모르게 말로 뱉었다. 일부러 한 말은 아니었지만 어른들은 제 능력을 동원해 그 말을 현실로 바꾸어 주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장인이라고 불리는 재주꾼들이었다. 나랏님의 명을 받고 지방에서 도읍 상경으로 올라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민호 아버지를 포함한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처자식을 두고 상경에 올라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선뜻 행동으로 옮긴 것은 민호를 보고 제 자식을 떠오른 모양일 것이리라.

 

어릴 때부터 공방에서 놀고먹던 민호는 자연스레 제 아비의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상경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위에선 그걸 퍽 기특하게 여기는 모양인지 공방에서는 늘 저를 챙겨주는 손길들이 많았다. 그런 만큼 민호는 공방의 우두머리인 아버지에게 깨지기도 많이 깨졌다. 만든 장신구가 하나같이 형편이 없다는 게 주 이유였다. ‘이래 가지곤 어디에 내놓겠냐!’라고 잔뜩 혼나고 있노라면 옆에서 아이고, 성님. 애를 잡겠소. 이 정도면 잘 만들었지. 민호 정도면 제 또래보다 훨씬 낫구먼.’의 말들로 장인들-민호에게는 아저씨들-이 감싸주었다. 고우이 현(오늘날 행정지면 에 해당)에서는 아버지의 제자들이 민호가 꾸지람 받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여기선 달랐다. 그건 민호 딴에 유일한 상경에 와서 좋은 점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내내 머리 굴려 그린 도안을 바탕으로 만든 장신구를 내놓이자마자 찬찬히 살펴보던 제 아비는 금방 인상을 찌푸렸다. 집에서는 한없이 좋은 아버지이지만 공방에선 달랐다. 이 곳의 책임자를 맡은 이후로는 공방에서 제게 더 엄하게 굴었다. 민호는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속으로 섭섭했다. 그렇게 형편이 없나. 한소리를 들으면서 숙인 고개엔 굳은살과 상처투성이인 손이 보였다. 뭐라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만, 아버지의 말에 추임새 넣듯 대답을 한 민호는 공방에 나오자마자 곧장 뒷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제 공간에서 마주한 낯선 이의 흔적은 그의 기분을 더욱 더 불쾌하게 만들었다. 이 침입자는 물건을 훔쳐가는 일은 없었는데, 다만 제가 다녀갔다는 걸 의도적으로 남기는 모양인지 아님 몰래 다녀갔다는 게 서툰 건지 민호가 정리해둔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게 미안했는지 어떤 때에는 간식 보따리가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기도 했다. 민호 입장에선 미안하고 자시고 들어오지 말았으면 하는 게 큰 바램이었지만, 침입자를 막을 어떠한 방도가 없었다. 끄응, 민호가 낮은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았다.

 

 

 

***

 

 

 

침입자는 쉽게 잡혔다. 아니,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그 날도 민호는 다를 바가 없었다. 양파 껍질 벗기듯 대차게 한 소리를 듣고 터덜이며 나무 위를 올랐다. 도대체 뭘 만들라는 건데에! 허공에 주먹질 한 번 하다 그것도 지쳐 뒤로 발라당 누워버렸다. 내일 그냥 못하겠다고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와중에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짐승이라고 하기엔 너무 사람의 소리이다. 감고 있던 눈이 저절로 뜨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니 웬 팔 하나가 터억, 그리고 말간 얼굴이 올라왔다. 곱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외모를 가진 소년이었다. 서로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놀라 몸을 흠칫거렸다. 하마터면 소년은 뒤로 넘어갈 뻔 한 걸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일단, 민호는 몸을 일으켜 소년이 올라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 떨어지는 줄 알았네. 고마워!”

, 근데뉘신지.”

 

 

옷차림을 보니 귀한 집 자제 같았다. 보따리와 서책을 바닥에 내려두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 나 저어기에 사는 사람.”

저어기요?”

! 쩌어기이!”

 

 

소년의 손가락 끝은 황실 고위관리들이 모여 산다는 구역을 가리키고 있었다. 공방 뒷산 정상에 오르면 상경의 모습이 얼추 눈에 들어왔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가까운 곳이 소년이 가리킨 곳이었다. 올랐던 길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곧장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런 집안의 자제가 무슨 일로 산에 올라 여기까지 온단 말인가? 일단 민호는 그 생각을 잠시 제쳐두었고 당장이라도 여기에 멋대로 들어온 사람이냐고 물으며 이유를 추궁하고 싶은 마음을 삼켜내었다. 신분 차이도 있거니와 제 마음대로 행동했다가 공방에 피해가 간다면 그것도 큰일이었다.

 

 

여기 주인 맞아?”

.”

 

 

소년의 표정에 금방 화색이 돈다. 그는 민호를 줄곧 기다렸다고 했다. 소년은 들뜬 마음을 쉽사리 진정시키지 못했다. 그 덕분에 한 번에 여러 이야기를 섞어 버리는 우를 범하였고, 민호가 그의 말을 이해하는데에 시간이 꽤 걸렸다. 민호 딴에 정리한 바로는 소년은 어떠한 우연한 일로 여기를 발견해 호기심으로 올랐는데, 주인이 없이 문만 열려 있어서 버려진 곳인 줄 알았더란다. 자신이 쓸 요량으로 힘겹게 올라 내부를 살폈는데, 금방 임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김이 푹 식었다. 뒤를 돌아 내려오려던 차에 바람 때문인지 뭔지 무슨 이유에서 바닥에 떨어진 도안을 본 것이다. 민호가 그린 도안들이 소년에게는 신기함 반 호기심 반으로 다가왔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았던 탓에 그 후로 계속해서 방문했지만 그 때마다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일전에 내가 두고 간 거 봤어? 그럼 그거 먹었겠네? 맛있지? 우리 어머니가 나 먹으라고 만든 건데, 내가 여기 멋대로 들어온 게 미안해서 계속 두고 갔어.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길래. , 그리고 나 책상 위에 있는 거만 봤어! 남의 물건 건드리지 말라고 배웠으니까. , 물론 여기는 무단으로 들어오긴 했지만그림 구경하고 싶어서 그랬어. 미안해. 장신구를 너무 예쁘게 잘 그려서 자꾸 구경하고 싶었어.”

 

 

민호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잇던 소년은 도리어 자기가 눈치를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민호는 침입자를 쏘아붙일 심산이었는데 뒤이어 나오는 그림 솜씨가 좋다라던가 등의 칭찬이 쏟아지자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칭찬이었다. 공방에서 듣던 아버지의 잔소리와 아저씨들의 칭찬으로 포장된 위로만 듣다가 진심으로 제 작품을 반기는 이를 민호는 지금 눈앞에서 처음 만났다. 그 반응에 소년은 자기가 가져온 보따리를 풀면서 앞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두 소년은 마주보고 앉아 말린 과일을 나눠 먹으며 말을 주고받았다. 민호가 도련님하고 부르면 그만인 것을 저 도련님은 일전의 자기 행동에 대해 사과를 하고 먹을거리를 챙겨오는 것도 모자라 이름까지 알려주었다. 너도 나 편하게 진우라고 불러! 말 편하게 해! 상당히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양인인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웃전의 이름을 입에 올린단 말인가. 민호가 고개를 저으며 부르기를 주저하자 진우는 둘만 있으니 괜찮다며 부르길 재촉하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민호가 진우야, 하고 작게 내뱉자 진우는 손을 내밀었다. 우리 이제 친구하자! 그 말에 민호가 상경으로 오기 싫었던 이유 중 하나를 떠올렸다. 같이 뛰놀던 친구들과 헤어지고 낯선 상경에 발을 디뎌야 한다는 것. 하루 사이에 갑자기 엄청난 일들이 몰려왔다. 아찔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내민 작은 손을 쥐었다. 생각 외로 따뜻했다.

 

 

 

***

 

 

 

진우는 틈이 나는 대로 민호를 찾아왔다. 그 사이에 시간은 훌쩍 지나 두 사람은 18살이 되었다. 키와 같은 외적 성장은 물론 내적 성장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민호가 가끔씩 진우를 샌님이라고 놀릴 정도로-그러면 진우는 송 아저씨라고 받아쳤다.- 사이가 가까워졌고 어느 순간부터 황궁에 입성한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민호와 진우는 부단히도 열심이었다. 민호는 공방의 소일거리 정도는 편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입지가 탄탄해져 있었고 진우는 그 해의 과거를 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호에게 생긴 변화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앓은 날이 있었다. 몸 상태가 심각해 어쩔 수 없이 형편에 맞지 않은 의원을 불렀고, 그에게서 양인으로 발현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양인도 음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 그와 그의 부모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심히 놀랐다. 그의 아버지는 과거 공부도 시킬 생각을 하지 못한 형편에 미안해했지만, 민호는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민호가 작업실에서 도안을 그리고 있노라면 옆에 따라 앉아서 공자니, 맹자니, 주자니 하며 쫑알거리던 작은 머리통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진우를 통해 달랬고 그가 꼭 과거에 붙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제 온전히 시험에 집중할 요량인지 요새는 자주 보이지 않아 섭섭한 마음도 있었지만.

 

푸르스름한 새벽이었다. 웬일로 이 시간에 잠에서 깬 민호가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밖으로 나섰다. 잠이 쉬이 들지 않으니 뒷산을 올라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햇빛이 제 자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때에 민호는 진우를 발견했다. 너도 잠이 안 와서 왔냐, 는 말로 가벼이 이야기하는데 어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푹 숙이던 고개와 마주하자 눈물범벅이다.

 

 

김진우, 울어?”

민호야아.”

 

 

어찌나 운 건지, 목소리가 다 쉬었다. 진우는 민호를 보자마자 토해내듯 울음을 뱉었다. 뚝뚝 끊어지는 말임에도 뭐라고 하는지 너무 선명히 들렸다. 나 음인이래, 음인. 과거를 못 봐. 과거를 볼 기회조차 없대. 나 어떡해. 내가, 내가 무슨 마음으로 공부를 했는데. 민호는 뭐라고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 역시 절망스러웠다. 아직 진우는 제가 양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진우의 발현을 제가 뺏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신분으로는 양인인 게 하나도 필요 없는데. 그리고 진우가 음인임을 안 마당에 제가 양인임을 밝힌다면 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그 또한 의문이었다. 과거를 어떻게 준비해 왔는지 옆에서 잘 지켜본 사람으로, 친구로 여러 모로 복잡한 마음에 민호는 그저 제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줄 수밖에 없었다. 더 울 것도 없는데 작은 네가 풀어내는 울음이 나를 나락, 이 땅 속으로 꺼지는 기분이 들게 만들어. 해줄 수 있다면 그 양인, 음인이라는 거 바꿔주고 싶었다. 진심으로.

 

 

 

***

 

 

꽃놀이.”

?”

꽃놀이 가고 싶어.”

 

 

상경의 4월은 벚꽃의 나라잖아. 말을 마친 진우가 민호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댔다. 그 날 이후로 진우는 품 안에서 서책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그리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황실 고위 관리 집안이라고 함은, 그 씨부터 양인으로 못 박아두고 태어났다는 소리다. 족보를 거슬러 보니 부계 쪽에서 원인이라고 했다. 가문의 번영을 위해서 양인 남성과 양인 여성이 혼례를 올리는 사회에서 음인과의 결합은 대게는 둘로 나뉘었다. 집안이 미미하거나, 후실이거나. 여하튼 진우는 운이 나빴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쏘다니고도 남은 성정에 스스로 갇히는 쪽을 택하였다. 어쩌다 한 번, 이렇게 민호를 찾아오긴 했다만 가족들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인이 홀로 돌아다니는 것도 모자라 양인을 만나기 위해 산을 오른다니. 진우의 노복 중 하나가 막내 도련님의 행동을 야합이라고 말 한 번 잘못 뱉었다가 흠씬 매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민호는 신경 쓰지 않고 진우를 대했다. 제가 좀 더 조심하면 될 일이다. 오죽 답답했으면 산을 오르나 싶기도 했다. 민호가 미리 약속을 잡아 두고 같이 올라가자고 해도 진우는 제가 원하는 때에 찾아와 혼자 집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이내 체념했다. 텅 빈 눈으로 민호의 도안을 쓸어내리는 손가락이 하얗다 못해 창백해보였다.

 

 

어릴 때는 말이야. 부모님이랑 누이들이 꽃놀이 가자는 게 그렇게 싫었어.”

.”

꽃 보는 게 뭐 그리 좋다고 하는지. 그냥 길가에, 나무에 흔히 피어있는 게 꽃이잖아. 그 중에서 4월에 피는 게 벚꽃이고, 상경에 유별나게 많은 꽃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당장 담장 너머에 보이는 게 벚꽃이라 그것도 충분한데 뭐 하러 귀찮게 멀리까지 꽃을 보러 가냐고 말이야. 근데, 지금은 완전히 다르네. 조금 있으면 만개하겠지? 밤에 보면 정말 예쁠 거 같아.”

보러 갈래?”

아니이, 이거 우리 아버지 알면 뒷목 잡으신다.”

그래도. 보고 싶다며.”

지금 너 사월제 준비하느라 죽는 소리 내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괜찮아. 봄이라고 좀 들떴나봐.”

 

 

진우를 빤히 바라보던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를 뒤적였다. , 하는 소리에 진우가 손바닥을 내밀자 그 위로 귀걸이 한 쌍이 올라왔다. 꽤나 공들여서 만든 게 티가 났다. 민호는 일부러 황후마마 것보다 못나게 만들려고 애썼다는 말을 괜스레 덧붙였다. 사실은 마음 같아선 더 세련되고 멋지게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던 거였지만.

 

 

뭐야, 이게.”

그냥 만들어봤어. 원래 사월제 맞춰서 주려고 했는데 이 때 줘야할 거 같아.”

예쁘네. 만드느라 고생했겠다.”

고생은 무슨.”

 

 

진우는 멋쩍어하는 민호의 얼굴을 바라보다 시선을 손으로 돌렸다. 저 손은 항상 상처가 끊임없이 돋았다. 새살이 오르면 그 위에 화상을 입거나 베여서 민호는 늘 연고를 달고 살았다. 울컥했다. 진우는 차오르는 감정을 어찌할 줄 몰라 입술을 물었다. 민호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너한테 잘 어울리는 게 뭔지 고민하다가 만든 거야. 나중에 너 혼례 올릴 때는 그거 버려.”

?”

왜라니. 그거 말고 더 화려하고 멋있는 걸로 해야지.”

혼인 상대가 너일 수도 있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진짜.”

말이 되는 소리지.”

 

 

사실은 나 너 좋아한지 오래 되었단 말이야. 더 내려갈 곳이 없는 사람에게만 생기는 용기였다. 혹은 쓸데없는 치졸한 오기.

 

 

 

***

 

 

 

사월제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황제와 황후가 쓸 장신구도 모두 만들고 나서야 민호는 겨우 숨을 돌렸다. 진우의 얼굴도 못 본지 한 달이 조금 넘은 것 같았다. 의도적으로 피한 게 맞았다. 들어도 못들은 척 할 수도 있었으나 진우 성격에 절대 그럴 일은 없다. 그래서 민호는 도망을 택했다. 안 그래도 힘든 사람에게 더 무거운 짐을 줘서 한없이 우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며 애써 자기 자신을 다독였다.

 

좋아하는 마음이야 민호도 마찬가지였다. ‘계급이라는 장치가 없었다면 진즉에 사고 쳤을지도 모를 정도로 진우에 대한 감정은 달랐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민호의 머리를 차갑게 만들었다. 내가 좋고 네가 좋다고 해서 해결할 수 없는 무한한 신분의 벽이 그들 사이에 굳건히 존재했다. 그것도 이름난 가문의 자제라면 더더욱. 좋은 혼처에 장가들어 편히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사서 고생시키기 싫었다. 가능할 리도 없겠지만. 하루에도 몇 번을 뒷산을 오르는 길을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 뒤를 넘어가면 진우가 살고 있는데, 갈 수가 없었다. 이 미천한 신분으로는. 보고 싶고 미안한 마음, 서러움 따위의 온갖 감정들을 민호는 만개한 벚꽃을 보며 달랬다. 진우가 더듬었던 종이 위로 수없이 그렸고 연습했다.

 

공방 사람들에게 부탁해 손거울 하나를 만들었다. 금속을 녹이고 그걸로 장신구만 만들다가 붓을 잡으니 영 어색했다. 거울의 뒷면은 민호가 그려 넣은 벚꽃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마지막이라며 오른 뒷산에, 그들의 추억이 담긴 장소에 조용히 올려두었다. 편지 따위는 부러 쓰지 않았다. 그랬다간 정말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상경이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사월제가 끝나자마자 민호는 망설임 없이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황실에선 그가 계속 남아있길 원하는 눈치였지만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터였다.

 

 

곧 떠날 사람이라 어려울 것 같다고 해도 말을 안 듣더라고. 어찌나 완강하던지. 제 관직까지 들먹였으니 말 다했지.”

말씀 조심하세요, 아저씨. 그것만 만들어 드리고 가야겠네요. 그래서 뭘 만들어달라고 하던가요?”

 

 

민호가 잠시 외출한 사이에 누군가 공방에 방문해 그를 찾았다고 했다. 상경을 떠나기 불과 삼일 남짓한 때였다. 관리의 무례함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렇게 되면 고향으로 내려갈 날짜가 뒤로 미뤄진다. 그러나 그 불쾌함은 의아함으로, 의아함은 민호의 귀향을 더욱 앞당기게 만들었다. 관리가 두고 갔다고 하는 편지와 상자엔 그가 부탁한 가락지 한 쌍을 만들고도 남을 금과 돈이 들어있었다.

 

 

 

***

 

 

 

미천한 몸에 남은 것은 한 쌍의 귀걸이와 급하게 챙긴 보따리 하나.

 

 

집에서 숨 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을까. (; 새벽 330~ 430)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진우는 혈혈단신으로 산을 올랐다. 앞이 보이지 않아 넘어지기를 몇 번, 감으로 주위를 더듬어 산을 올랐다. 집안의 수치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집에서 쫓겨났다. 노복들이 야합이니 뭐니 하는 걸 흘겨 들은 탓일까. 절로 눈물이 고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상황이 이런 때에 눈물이라니. 진우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여기서 호랑이 밥이라도 되어야지, 무얼. 무릎을 모아 접고 그 위에 팔을 포개 얼굴을 묻었다. 얼마 안 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진우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진우야.”

 

 

꿈에서도 몇 번이고 그리던 목소리였다.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어. 제게로 다가와 저를 살피는 손길이 꿈결같았다.

 

 

 

***

 

 

꽃놀이.”

?”

가고 싶어 했잖아.”

그렇지.”

꽃놀이 안 가는 거 안 아쉬워?”

전혀. 지금은 못 가는 거지 안 가는 게 아니잖아. 귀걸이 끼고 멋 부려서 갈 거야.”

가락지는?”

당연히 그것도 껴야지. 누가 만들어 준건데.”

내년에 가자, 셋이서.”

그래. 셋이서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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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26. 20:45




월간송진 3월호 Fan Art Part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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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26.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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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落花) (Written by. Norah)
2018. 3. 26. 20:40

낙화(落花)



w. Norah

 

 

다시 태어나기 위해선 죽어야 한다.

새로 출발하기 위해서 끝내야 한다.

 

꽃이 져야 다시 필 수 있어.

 

 

 

**

 

 

 

[나 이제 가지가 하나 남았어. 누구랑 잘까 민호야? 나 누구랑 자?]

 

내내 죽은 듯이 고요했던 밤이었다. 송민호의 휴대전화가 한 번 세차게 몸을 떨었다. 이번에도 발신인은 뻔했다. 달력을 보니 이쯤 연락이 올 때가 됐다 싶었다. 분명 지난겨울 다신 보지 않겠다고 그의 집을 나섰다. 계절이 바뀔 때까지 연락 한번 없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사람 그렇게 쉽게 바뀌는 거 아니지. 아주 착실히 몇 달을 등짝에 꽃을 박아 넣고 다녔겠지. 송민호는 무시하려고 했다. 액정을 껐다. 답장은커녕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휴대전화를 아예 엎어놨다. 하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너무 당연해진 수순이었다.

 

김진우는 어릴 적 큰 열병을 앓았다. 각성통이었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고 한다. 아무도 관심 없었겠지만. 깨어난 후 등에는 아주 얇고 짙은 고동색의 가지가 새겨졌다. 날개뼈부터 둔부까지 등줄기를 타고 이어졌다. 인류의 약 20%가 이 같은 형질을 타고 태어났다. 가지가 새겨진 후에는 꽃을 피우고 싶은 본능이 생겨난다. 애석하게도 모든 가지에 꽃이 맺히면 숨이 멎는다. 김진우는 그걸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송민호와 김진우의 관계는 참 얄궂었다. 곧 죽을 것처럼 보이던 건 김진우였지만, 그의 생()에 매달리는 건 송민호였다. 꼭 하나의 가지만 남았을 때 김진우는 송민호를 찾았다. 그때마다 반응속도는 달랐을지언정 송민호는 결국 매번 달려갔다. 처음에는 불쌍해서, 다음에는 사랑해서, 그다음에는 이유를 몰랐다.

 

[집에서 기다려.]

 

이대로 그냥 확 죽어버리라고 할 땐 언제고.”

 

김진우는 웃었다.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생겼더라. 조금 전까지 입술을 맞추었던 상대인데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그는 이대로 쫓겨날 운명이었다. 기억나지 않는 얼굴에 상처 하나 없이 나갈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민호야, 빨리 와.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꼿꼿하게 선 젖꼭지를 문질렀다.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배우였다. 아주 아름다웠으며, 아주 고독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앞에 어마어마한 재산만 남기고 절명했다. 아버지는 누구였더라. 적어도 김진우의 머릿속엔 그다지 중요하게 남아 있는 이름을 아니었다.

 

사실 김진우는 죽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송민호와 처음 만났을 땐 정말 죽을 뻔했다. 보고 자란 것이 뛰어나게 아름다운 자신의 얼굴이었으니, 김진우는 곧 탐미주의자였다.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게 해주는 스테먼이면 그날 침실에 끌어들일 이유는 충분했다. 그렇다고 복상사하고 싶진 않았다. 재수 없게 베놈이 걸렸다. 베놈이 피워낸 꽃은 독을 머금었다. 본딩을 당했으니 등엔 독초가 새겨졌을 터였다. 앞으로 다른 이와 관계할 시 그는 물론, 김진우도 혈관에 독이 퍼져 중독사를 피할 수 없었다.

 

이 와중에도 김진우는 다른 이유로 심기가 불편했다. 앞으로 다른 이와 섹스하지 못한다는 이유도 이유지만, 결정적으로 꽃이 안 예뻤다. 너무 독하잖아. 심기를 거스른 죄. 그 베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문으론 김진우의 친부는 유명한 야쿠자라는 말도 있고.

 

캠퍼스에서 김진우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송민호도 그중 하나였다. 반면 송민호가 상위 1% 비율로 각성한 안티 스테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김진우는 예외 중 하나였다. 송민호는 선입견을 경계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 함부로 떠드는 건 비겁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김진우는 영리하게 그 점에 파고들었다. 물론 연기는 오래가지 않았지만.

 

-민호야, 나 살려줘.

 

적어도 송민호에겐 사랑해 달라는 말보다 강력했다.

 

-이것 봐. 다 내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꽃을 새겨 버렸어. 너라면 안 그랬을 텐데. 그렇지?

 

가련한 김진우를 송민호는 절대 거절할 수 없었다.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너만이 유일하다는 거 알잖아? 네가 아니었다면 난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

 

차라리 처음부터 사랑해 달라고 할 걸 그랬나. 벌컥 욕실 문이 열렸다. 송민호를 떠올리며 젖꼭지를 문지르고 있던 김진우가 시선을 돌렸다. 물기 어린 눈으로 시트 위에 흐트러져 있는 모습이 자극적이었다. 당연히 함께 밤을 보내리라 생각한 남자는 망설임 없이 침대로 향했다. 멍청하네, 이제 어떤 꼴이 될 줄도 모르고. 즐거웠다.

 

남자는 김진우의 빨간 입술을 머금었다. 하얀 손을 떼어내고 가운 안으로 차가운 손을 밀어 넣었다. 빳빳하게 선 유륜을 잔뜩 희롱하며 목덜미를 빨았다. 쿵쿵, 이 상황에서 이질적인 발걸음 소리. 남자는 흥분해 듣지 못했지만, 사실 김진우에게는 기다리고 있던 소리. 골려 줄 생각을 하니 흥분감이 밀려왔다. 성기가 꺼덕꺼덕 고개를 들었다. 무릎을 세워 남자의 중심을 자극하며 목에 팔을 감았다. , 방문이 굉음과 함께 열렸다. 다음은 상상했던 그대로. 남자는 적당히 못 봐줄 얼굴이 돼서 도망치듯 김진우의 집에서 쫓겨났다.

 

죽고 싶어?”

민호야, 나 살려줘.”

네가 진짜 죽고 싶지?”

 

송민호는 김진우의 가운을 등허리까지 벗겨냈다. 몸을 뒤집어 확인했다. 빼곡히 피워낸 꽃들. 단번에 보아도 하나도 겹치는 종류가 없었다. 그래도 일관된 취향은 있었는데 늘 꽃잎 색깔은 짙은 빨강이었다. 다 지워내려면 일주일은 또 침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섹스만 해야 할 것이다. 딱 하나 비워진 공간을 엄지로 문질렀다. 그러자 김진우는 시트에 몸을 비비적거렸다. 신음이 야살스러웠다. 송민호는 그대로 빈 가지에 이를 박았다.

 

, , 이 자세는 싫어

 

마주 보고 할래. 얼굴 보여줘. 고개를 돌려 칭얼거리는 김진우를 이길 수 없었다. 다시 몸을 뒤집었다. 가운이 엉키면서 김진우의 팔이 결박됐다. 송민호는 잠시 멈칫했다. 아플 텐데.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났다. 김진우는 웃었다. 이래서 민호 넌 날 이길 수 없는 거야. 버릇처럼 하던 김진우의 말이었다.

 

이대로 하자. 지금이 좋아.”

 

다리를 벌리며 김진우가 말했다. 기어코 바보로 만드는, 자신을 흔드는 말들. 더는 그런 말을 할 수 없도록 송민호는 입안에 물컹한 살덩이를 밀어 넣었다. 팔은 결박됐어도 다리는 자유로웠다. 야들야들한 살결이 허리에 감겼다. 특히 이미 질척해진 김진우의 성기가 송민호의 아랫배에 문질러졌다. 나만 지금 미치겠는 거 아니지? 김진우는 송민호의 성기를 두 손 가득 감쌌다.

 

닿기만 해도 쌀 것 같아. 너무 좋아 민호야.”

, 넌 진짜

 

동이 틀 때까지 결착된 아래를 풀지 않았다. 베놈 스테먼의 독을 풀려면 안티 스테먼의 정액이 필요했다. 몇 번이고 연이어 정을 흘려보낸 탓에 이젠 가만히만 있어도 하얗고 끈적한 액체가 찌걱찌걱 밀려 나왔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것 같다. 김진우는 송민호에게 이끌려 욕실과 침대를 오갔다. 욕조에서도 하고, 샤워기 밑에서도 했다. 송민호는 그러면서 집밖을 나가기도 했는데, 김진우는 송민호가 안아주지 않으면 침대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오늘은 송민호가 침대 헤드에 기대앉고 김진우는 그 위에 안겨 있었다. 앉아서 하고 싶다는 김진우의 의견이 반영됐다는 건 당연했다.

 

김진우는 힘없이 인형처럼 축 늘어진 채로 흔들리기만 했다. 아래는 거의 감각이 없이 얼얼했다. 우리에겐 무언가 충돌이 필요해. 어깨에 볼을 기대고 있던 김진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 보고 싶어.”

…….”

나 보고 싶다고.”

.”

네가 내 안에 싸서 꽃이 지워지는 게 보고 싶어.”

갑자기 왜.”

그냥, 보고 싶어졌어.”

…….”

안 해줄 거야?”

……그럼 말 들을 거야?”

, 너 무슨 선생님이야?”

네 말 들어주면 너도 내 말 들어.”

뭐 시킬 건데? 어떤 자세로 하고 싶어?”

네 머릿속엔 오로지 섹스하는 거밖에 없지.”

말해줘. 뭐 시킬 건데.”

나중에.”

 

아래가 연결된 채로 송민호는 김진우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어쩌자는 거야. 그러자 김진우는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손가락만 뻗어서 옆을 가리켰다. 그 하얗고 얇은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뚝 멈췄다. 테라스 앞이었다.

 

미쳤어? 여기서 하자고?”

 

김진우가 사는 빌라는 한 층에 한 세대만 있었다. 그중 김진우의 집은 유일하게 복층으로 지어진 펜트하우스였고. 아무리 밤이어도 미친 거 아냐? 송민호가 테라스로 향하는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자 김진우가 허벅지를 콱 조였다. 안에서 밖을 바라보면 창, 밖에서 안을 바라보면 거울. 테라스 창의 비밀이었다.

 

아무도 못 봐. 괜찮아.”

 

기어코 들어선 테라스에 김진우를 내려놨다. 성기가 빠져나오자 발목까지 하얀 정액이 흐르는 게 테라스 창에 너무도 적나라하게 비쳤다. 김진우의 얇은 팔목이 아슬아슬하게 송민호의 가슴을 밀어냈다. 정말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송민호는 테라스에 놓여 있던 의자에 앉았다. 팔 거치대가 없어서 그대로 마주 보고 포개 앉기 좋았다. 일부러 이러려고 산 거 아냐? 송민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서 바라보니 김진우의 말처럼 테라스 창은 거울이 됐다. 이 와중에 자신의 성기를 삼킨 구멍이 주변까지 빨갛게 부어오른 게 신경 쓰였다.

 

김진우가 까치발을 들고 아등바등했다. 어깨에 올려놓은 얇은 손가락은 더 하얗게 질렸다. 이유 없이 필사적으로 보였다. 송민호는 과거 그를 연민했고,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었다. 그 사이 심장은 여러 번 갉아 먹혔다. 이젠 통증에 무뎌져 아프지 않은 것인지, 더는 사랑하지 않아 아프지 않은 것인지 애매했다. 가끔 그가 그냥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살려 달라고 매달리는 손을 오늘도 뿌리치지 못했으면서.

 

민호야, 날 다시 사랑해줘.”

 

내가 널 사랑했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넌.

 

너도 꽃을 피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일, 없을 거야.”

꽃을 피우는 게? 아니면 날 사랑하는 게?”

…….”

, 차라리 전자인 게 좋겠다.”

 

감정이란 꽃이 차례대로 두 사람의 마음에 봉우리를 틔웠다. 서로 마주 볼 수 없게 한 사람의 꽃이 진 후에야 다른 한 사람의 꽃이 피었다. 꼭 시간 초과된 술래잡기처럼.

 

그럼 이제 술래는 내 차례인가.

 

김진우가 고개를 돌려 창에 비친 자신의 등을 응시했다. 송민호가 안에 따뜻하게 정을 뿌리자 마지막 하나 남은 꽃잎이 떨어졌다. 김진우는 소리 없이 울었다. 신음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무수한 꽃잎이 밤하늘에 쏟아지듯 퍼졌다. 그중 하나가 허공을 날다 송민호의 볼에 내려앉았다.

 

옅은 분홍(粉紅). 김진우는 살면서 이렇게 예쁜 빛깔의 꽃을 본 적이 없었다. 민호야, 지금까지 네가 주었던 사랑은 벚꽃이었구나.

 

, 차라리 전자(前者)였으면 좋았을 텐데.




Written By. Norah (Twitter Account : @by_norah)

시크릿 블라썸 가든 (Written by. 앙젤)
2018. 3. 26. 20:36

시크릿 블라썸 가든



w. 앙젤


 

대한민국의 여느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평범한 삶을 살아오던 25세 청년 김진우는, 봄바람과 꽃내음이 살랑살랑 불어오던 이날 아침 서울숲이 내려다보이는 한강변의 펜트하우스에서 눈을 떴다.

 

속보입니다. 오늘 아침,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에서 자신이 유명 연예인 송모씨라고 주장하는 이십대의 남성이 난동을 부리다 붙잡혀 경찰에 인계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귀에 꽃힌 소리는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텔레비전 소리였다. 내 자취방에 티비를 들여놨었던가, 어리둥절해하던 진우가 바닥에 만져지는 매끄러운 대리석의 질감에 놀라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그의 눈은 마비된 것처럼 화면 속 얼굴에 고정되었다.

화면 속에는, 김진우 자신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저게 뭐야!!”

 

*

 

사태 파악을 위해서 그는 얼른 손을 더듬거려 불이 났을 께 뻔한 전화기를 찾았다. 하지만 진우의 핸드폰은 온데간데 없었고 제 낡아빠진 흰색 휴대전화가 아닌 미끈하게 쫙 빠진 아이폰 X만이 반짝이는 검정색 자태를 자랑하며 구석에서 웅웅 울려대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야 진짜...”

 

한숨을 내쉬며 화면 속에 뜬 이름을 확인하기도 전에 하단바를 밀어버렸다. 낯선 핸드폰에서 쩌렁쩌렁한 남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와 진우의 귓전을 사정없이 때렸다.

 

너 어디야!!!!”

 

?네에..?”

 

거기까지 말하고 진우는 다시 제풀에 놀라 목을 틀어쥐며 숨을 헉하고 삼켰다. 분명 자기가 말을 했는데 입에서는 웬 굵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대답을 했다. 거기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너 왜 그래 민호야. 거기 괜찮은거야? 지금 난리 났어! 너한테까지 찾아간 건 아니지?”

 

저기, 진짜 죄송한데, 헉 목소리...아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거에요?”

 

하아..뉴스 안 봤어? 됐다. 급하니까 뉴스 보고 꼭 다시 전화해 민호야. 웬 미친놈이 진짜..”

 

근데 누구세요? 뒷말을 삼킨 진우의 시선이 문득 매니저 3, 이라 쓰여있는 전화가 끊긴 폰 화면에서 여전히 틀어져 있던 텔레비전으로 옮겨갔다. 족히 100인치는 될 것 같은 대형 티비의 화면에 나오는 제 자신은 팔을 붙잡은 경찰들에게 거세게 저항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 ! 내가 송민호라고!! 그 드라마 비밀의 정원 주연!!! 한류스타 송민호!! 내 집주소도 불러줘? ?

 

화면 속 진우는 실제 진우가 써본 적도 없는 단어들을 남발하며 화를 냈지만 그 순간 진우의 머릿속을 차지한 단어는 어지러운 욕설들이 아닌 송민호. 단 세 글자였다.

분명 방금 전화를 끊은, 아마 매니저 3일 그 사람은 저를 민호라 불렀었다. , 대답하던 목소리는 그동안 채널을 돌리며 익숙하게 들어온 그것임이 분명했다. 쇼미더머니에서 신예 래퍼로 출전해 전국민에게 잘생긴 얼굴을 알리고 순식간에 각종 드라마의 주연을 휩쓸며 톱스타 자리에 오른 사람.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진우가 어림짐작으로만 느껴진 상황을 확신으로 만들기 위해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집은 진우의 평소 생활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만큼 넓었지만 다행히 본래의 목적인 거울을 금방 발견해 진우는 그제서야 제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었다.

김진우가 비춰 본 거울에는 스물다섯 사진과 자취생 김진우가 아닌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하다는 셀럽, 스물셋의 국민배우 송민호가 어색한 미소를 띄었다.

 

*

 

그가 아까 뉴스에서 자신을 발견했을 때처럼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익숙지 않은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벨소리를 냈다. 낯익은 제 번호의 배열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여보세요오..?”

 

나 송민혼데.”

 

. 자기를 송민호라고 소개하는, 그러니까 김진우의 탈을 뒤집어쓴 송민호의 목소리가 퍽 이질적이었다. 송민호의 허스키 보이스로 저의 말투를 뱉는 것 역시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장 문열어.”

 

여러 개의 복잡한 잠금장치와 대략 십오 분 가량을 사투하고서야 진우는 송민호네 집 현관문을 여는 것에 성공했다. 열린 문 앞에서 거의 거지꼴로 서 있는, 3자의 시선으로는 처음 보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 멈춘 진우를 밀치고 그런 진우보다 한두 뼘 작은 예쁘지만 살벌한 표정을 지은 민호가 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현관으로 몇 칸 걸어들어온 경찰은 멍청히 선 진우를 보며 거의 송구스럽다는 얼굴을 지었다.

 

경찰에서 나왔습니다. 실례지만, 송민호 씨, , 저기 김진우 씨라는 분하고 혹시 아는 사이 되십니까? 저분이 자꾸 본인이 송민호 씨라고 주장하셔서...”

 

진우는 미처 생각이 닿기도 전에 얼른 고개부터 끄덕이고 봤다.

 

,. 맞아요. .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 진우. . 친해요.”

 

뭔가 더 말할 것이 있어 보이는 경찰의 등을 억지스레 밖으로 꾹꾹 눌러 미는데 그가 한층 더 송구한 얼굴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제가 열혈 팬인데,...싸인 좀.”

 

결국 진우는 경찰이 내민 종이에 송민호라는 철자의 조합을 대충 휘갈겨 쓴 듯한 몇 개의 선을 쭉쭉 그어주고 나서야 경찰을 내보내고 씩씩대는 민호에게로 등을 돌릴 수 있었다.

 

.....송민호 씨, 맞죠?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저희 몸이 바뀐 건가요?”

 

말 안 해도 알잖아. 딱 보면 몰라?”

 

이제 진우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송민호를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 티비 속 송민호의 이미지는 훈남 배우, 젠틀한 남자배우 국민 설문결과 1, 여자친구한테 잘해 줄 것 같은 20대 남자배우 TOP3 등등에 빠지지 않고 손꼽힌 사람이었는데 지금 진우의 얼굴을 하고 선 남자는 이 알 수 없는 상황이 온통 진우 탓이라는 것처럼 화를 내고 반말을 찍찍 해대며 싸가지없게 굴고 있었다. 웬만하면 화를 잘 내지 않는 진우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대답했다.

 

왜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 우리 몸이 바뀌었는지,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집에 무사히 오셨으니까 다시 바뀌기 전까지 저는 이만 제 집에 가 있을게요.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하세요.”

 

말을 마치고 돌아 나가려는 진우의 그을린 팔뚝을 본래 진우의 모습을 한 민호의 희고 얇은 손이 붙잡았다.

 

내 얼굴을 하고 어딜 갈려고. 지금 나가면 무조건 기자들한테 사진 찍힐걸? 준비 중인 드라마는 또 어쩌고. 못 가. 가지 마.”

 

그럼 저보고 어쩌라는 건데요! 내 탓도 아닌 일로 몸이 바뀌었는데 나한테 계속 짜증만 낸 그쪽 때문에 제 일도 다 팽개치고 그쪽 옆에 붙어있으라고요?”

 

화를 내고야 말았다. 쌍꺼풀 없는 처진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원래도 잘 우는 편이긴 해도 이 몸은 너무 울음이 쉽게 나왔다. 이러니까 송민호가 멜로연기를 그렇게 잘 하는구나, 진우는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나도 지금 엄청 당황스럽단 말이에요. 흐윽, 송민호씨는 내 얼굴 하고 경찰서에서 난동피우고 잘만 돌아다녔죠?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모르는 톱스타 몸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 아냐고요. 평범한, , 얼굴 되보니까 좋아요?”

 

안 평범하던데.”

 

?”

 

예뻐, 니 얼굴.”

 

김진우는 당황했어도 송민호의 그 말은 사실이었다. 몸이 바뀌고 온 사방에 자기를 믿어달라며 소란을 피울 때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지금 원래의 집에 들어와 마음을 좀 추스르고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잘 살펴보니 민호 자신은 생각보다 훨씬 예쁘장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약간은 민호의 취향일 만큼.

, 아니, 여기서 그 얘기가 왜..”

 

그리고 내 얼굴은 진짜 잘생겼다.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까 더.

왜 여자들이 좋아하는지 알겠네.”

 

갑자기 칭찬을 받아 얼굴이 빨개진 진우에게 무심하게 뒷말을 덧붙이자 장난치지 말라며 화를 낼 줄 알았던 그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맞아요..잘생겼어요, 민호씨. 일어나서 거울 보고 솔직히 좀 놀랐거든요.”

 

예쁜 얼굴을 한 민호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눈앞에 보이는 게 제 얼굴인 점이 많이 어색하긴 해도,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약간 귀여워서.

 

그럼 당분간 같이 사는 거다?”

 

그런 대답은 한 적 없는데요..”

 

어차피 대답 안 바랬어.”

 

“.....”

 

*

그렇게 생전 처음 보는 두 사람이 서로의 몸에 뒤바뀌어 들어간 채로 동거를 시작했다. 잘못해서 기자들에게 들킬까봐 집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설 수 없었다. 자기 몸을 추운 소파에 누일 수는 없다는 이유로 고집을 부린 민호 탓에 매일 아침 같은 침대에서 눈을 떠 어색하게 서로의 원래 몸을 바라보고 오늘은 혹여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하길 2주째, 그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느꼈다.

 

생활에 문제는 없었다. 진우는 가난한 대학생이었지만 돈이야 민호가 넘쳐났고 음식을 배달시키면 민호 모습인 진우가 나가 받아오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갑자기 건강상의 핑계를 대며 제작을 중단시킨 드라마를 진우가 연기하며 찍거나 계속해서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었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둘이 부대껴 살 순 없잖아요!”

 

뭐가 문제야. 난 괜찮아.”

 

저는 안 괜찮거든요? 우린, .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매일 아침마다 퍼 자고 있는 내 얼굴 보는 거 너무 싫다고요.”

 

..그건 나도 좀 싫다.”

 

근데, 우리 이제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 않나? 민호가 쌍꺼풀진 큰 눈을 촉촉하게 굴리며 진우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 눈빛에 몸서리가 쳐졌다. 분명 제 얼굴에 제 목소리인데도 어쩐지 정신을 홀리게 만드는 송민호의 퉁명스러운 듯 다정한 성격이, 말투가 싫었다. 자기의 얼굴로 자기를 쳐다보는 민호를 슥 밀어낸 진우가 한숨을 푹 쉬자 민호가 진우의 팔목을 잡고 일어나 캡모자 하나를 진우의 머리에 씌웠다.

 

나가자. 마스크도 쓰고. 우리 해결책을 좀 찾아봐야지.”

 

그렇게 민호의 손에 이끌려 나간 거리는 진우와 민호가 2주 동안이나 집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완연한 삼월의 봄 색을 띠게 변해 있었다.

혹 한류스타 송민호의 얼굴을 쉬이 알아보는 사람이 있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고개를 푹 숙인 진우의 손을 꼭 잡고 민호가 운을 뗐다.

 

근데, 왜 우리 몸이 갑자기 바뀐 거지? 전혀 모르는 사이였잖아. 혹시 너 내 팬이었어?”

 

속없는 민호의 질문에 진우가 말이 되냐며 소리를 빽 질렀다. 세상 사람들이 다 지 팬인 줄 아나, . 진우는 곰곰이 생각하다 민호에게 최근에 우리 혹시 어디서 만난 게 아닐까요, 라 물었다.

 

내가 최근에 간 데? 신작 드라마 촬영하느라 여의도 간 거 빼곤 집 밖으로 안 나갔는데.”

 

, 저도 최근에 사진 동아리에서 촬영하느라..여의도 벚꽃 구경 갔었는데요?”

 

여의도!

실마리가 잡힌 둘은 동시에 눈을 마주치며 손뼉을 짝 마주쳤다. 곧바로 올라 탄 지하철은 한창 사람들이 사랑과 봄날을 찾아 북적거리는 여의도로 향했다. 지하철에 자리를 찾아 앉은 진우의 모습을 본 몇몇 여고생들이 진우 쪽을 몇 번이고 흘낏대며 수근거렸다.

 

- , 저 사람 왠지 송민호 좀 닮지 않았냐?

헐 그러게. 울 민호오빠 삘 난다.

울 민호오빠는 무슨.. 근데 완전 송민호 같다. 진짜 송민혼가? 옆엔 누구지?

에이. 송민호가 지하철을 타겠냐. 근데 옆에 남자도 잘생겼다. 연예인 같아.

 

소녀들이 진우 쪽으로 한걸음 다가오며 말을 걸려는 순간, 진우 모습의 민호가 그 앞을 막아서며 앉아있는 진우에게로 가까이 몸을 숙여 속삭였다.

 

자기야. 오늘은 벚꽃 대신 자기 얼굴 구경이나 할까? 자기가 너무 잘생겨서 그런지 구경하는 사람이 좀 많네.”

 

당황한 아이들이 실례했습니다, 하고 다음 칸으로 멀어져 가는 동안 열차는 어느새 여의도에 도착했다. 아직도 민호의 아까 말이 아른아른거려 멍해진 진우의 등을 민호가 떠밀다시피 해 내린 여의도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온 사방이 만개한 분홍빛 벚꽃으로 덮여 있는 풍경. 주변에는 몸을 맞댄 커플들이 달디단 사랑의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민호가 아직도 지하철에서 내리면서 잡은 손을 놓지 않자 진우는 민호의 손을 잡고 몇 번 꼼지락거렸다. 왜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민호에게 진우는 아니라며 대충 넘겼지만 얼굴은 화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래서는 꼭 데이트 같잖아요. 진우가 속으로 미처 다 하지 못한 말을 우물거렸다.

비록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이 저의 얼굴이어도 속에 든 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의 마음을 훔친 국민 연예인이었다. 김진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특별한 동거남에게 조금은 감정이 생겼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가 빨개진 채 마스크를 고쳐 쓰는 진우와 전혀 설레지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도 않는지 그런 진우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민호의 옆으로 한 노점상인의 목소리가 스쳐지나갔다.

 

- 벚꽃 술~ 오직 여의도에서만 맛보실 수 있는 특별한 술입니다~! 사랑을 이루어 준다는 첫키스의 전설을 가진 벚꽃 술! 오늘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마술 같은 일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상인은 조잡하지만 화려한 단내를 풍기는, 벚꽃으로 담근 술을 팔고 있었다. 진우가 저번에 들렀을 때에도 사 마셨던 것이었다.

 

. 저거 아직도 파네요. 저 왔을 때도 저거 마셨었거든요. 사랑을 이루어 준다나 뭐라나, 키스를 하게 해준다고 해서..”

 

별 생각 없이 뱉어낸 진우의 말을 민호가 뭔가 아는 듯 받아쳤다.

 

나도 촬영하면서 저거 마셨었는데. 저 술, , 그럼. 혹시...”

 

민호의 말에 시선이 공중에서 부딫쳤고, 민호와 진우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곧장 가판대 앞으로 다가서 벚꽃이 둥둥 떠있는 예쁜 분홍색 술을 한 잔씩 주문해 꿀꺽 들이켰다.

연예인 민호와 대학생 진우의 접점이라곤 그것뿐이었으므로, 아마 그 벚꽃 술이 둘의 어떤 부분을 연결시킨 것이리라. 그건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시원하고 달콤한 액체가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감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화악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면서 그들의 본 모습으로 돌아왔음이 느껴졌다. 돌아오는 과정에 잠시 아찔하게 머리가 흔들린 덕에, 정신을 차려보니 김진우는 저보다 한 뼘은 더 크고 얼굴은 티비와보다도 훨씬 잘 생긴 대한민국 최고의 톱스타 송민호의 품에 기대듯 안겨 있었다. 꿈결처럼 감겨오는 벚꽃의 향과 맛은 몸이 바뀐 이 주 동안 있었던 일도 전부 꿈같이 환상적인 이야기처럼 자연스레 믿게 해주었다.

 

돌아온..건가?”

 

우리 원래대로가 됐어요! ! 민호씨! ”

 

한참 방방 뛰며 소리를 질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적이 공기를 갈랐다. 서로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고 선 것이다. 이젠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에요. 이렇게 가볍게? 아쉬움과 시원한 마음이 둘의 눈을 쉽게 떼지 못하게 했다. 이 주째 바뀐 모습으로 지내서 그런지. 아니면 서로가 이렇게 마주한 건 처음이라 그런지 어색한 분위기에 가만히 서 있다 진우의 바뀐 얼굴을 훑던 민호의 시선이 미처 떨어지지 않은 꽃잎이 붙은 입술에 머물렀다.

 

왜 항상.

이렇게 입술에 꽃잎을 묻히고도 모른 척 하지, 예쁜 사람들은?

키스해달라고 조르는 건가.”

 

송민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준 히트작 비밀의 정원의 대사였다. 원래는 우유였던 대사를 살짝 바꾸어 중얼거린 민호가 그대로 진우에게로 몸을 숙여 부드럽게 입술을 부딫쳐왔다.

 

진우의 입술에 붙어있던 벚꽃잎 하나가 입안으로 딸려들어오면서 둘의 코에 온통 알싸하고 황홀한 향기가 감돌았다. 말캉한 민호의 혀가 진우의 입을 막고 있던 입술을 열어 꽃잎을 밀어넣고 진우의 입안에 질척하게 감겨왔다. 민호는 유려하게 치열을 훑어 마치 꽃점을 치듯 희게 하나하나 떨어진 진우의 이빨 사이사이를 탐했다. 꿀맛이 아른거리는 타액이 입 안에서 뜨겁게 섞여들었다. 진우는 갈 데 없던 손을 공중에서 바둥거리다 민호의 허리에 둘러 민호를 더 진득하니 끌어당겼다. 민호와 진우의 키스는 첫키스치곤 꽤나 길게 이어졌다. 마침내 민호의 입술이 진우의 입술에서 떨어졌고 허리를 감은 손은 여전히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차마 피하지 못하는 눈빛이 사이에서 교차했을 때, 진우는 잠시동안 이대로라면 당장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민호의 빨아들이는 듯한 시선이 숨막혔다.

 

그 달콤한 순간, 세상에 둘만 있는 듯한 장면을 깨고 이제 정말 가야겠다며 민호를 밀어낸 것은 진우였다. 잠깐만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뱉지도 못해 땅에 못 박힌 것처럼 멍하니 서 있는 민호를 둔 채 진우는 어떻게 온 건지도 모르게 지하철을 타고 텔레비전 하나 없는 자취방으로 돌아와 2주 동안 잊고 있던 자신의 돈 없고 나이 많은 복학생이라는 비참한 현실과 마주했다. 진우는 폰에 저장되어 있던 민호의 번호를 지우면서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되뇌었고 또 그게 맞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진우의 폰에는 다시 민호의 번호가 찍힐 수 밖에 없었다.

 

- ‘여심 도둑송민호, 미모의 일반인 남성과 열애 중?

 

다음 날, 포털 실검을 찍은 뉴스 연예란의 조회수 1위 기사 제목이었으니까.

*

 

..이렇게 된 이상, 조금만 더 같이 살자.

 

이건 송민호의 말이었다. 이미 벚꽃이 휘날리는 가운데 키스하는 사진을 언제 따라온지 모를 파파라치에게 딱 찍혀버린 이상 부인하면 이미지가 더 나빠진다는 게 덧붙인 설명이고. 하지만 진우는 극구 거절했다.

 

돈 많잖아요! 돈 줘서 입막음시켜요. 그거 나 아니라고. 애인 없다고.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그게 맘대로 되는 거면 벌써 그랬지. 눈 딱 감고, 나 송민호랑 사귀는 사이입니다 한 마디만 해달라니까?”

 

민호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때로는 살살 구슬리고 또 어떨 땐 짜증을 내도 진우는 열애 인정만은 할 수 없다며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조금만 더 같이 있어 보자는 민호의 말에도 제집에 돌아가겠다 하도 떼를 쓰기에 보내줬더니 이미 일반인인 진우의 자취방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는 기자들 때문에 민호와 진우는 지금 비밀유지가 된다는 호화 호텔의 스위트룸을 하나 잡고 명목상 사랑의 도피를 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별 방법이 있냐고 물었지만 진우는 여전히 민호와는 절대로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내가 언제 진짜 사귀어달래? 너가 나 싫은 거 알겠는데, 돈이고 뭐고 충분히 줄게. 한두달 후엔 헤어져 줄 테니까, 지금 상황 봐서 나 좀 도와줘, 부탁이야.”

 

“...그래서 싫다고요.”

 

, 이번이 마지막이다, 안 되면 결국 소녀팬들에게 자필사과문이라도 쓸 생각으로 애걸복걸하던 민호는 진우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입을 헤벌리고 갑자기 거의 울먹대는 진우를 앞에 둔 채 당황해 있을 뿐이었다. 뭐냐고 조심스럽게 묻기도 전에 진우는 와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걸핏하면 울어 버리는 송민호 몸에 적응이라도 된 건지.

매번 얼굴 빨개지고 설레는 건 나뿐이잖아요! 민호씨는 솔직히 나보다 더 예쁘고 멋진 남자든 여자든 연예인들 훨씬 많이 달라붙을 텐데 내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요? 그러니까 항상

마음에도 없는 작업 멘트나 던지고. 쇼윈도 연애나 하고, 반말 아무렇게나 쓰고! , 내가 두 살이나 더 많은데..씨잉.., 흐윽, 흐으윽...”

 

그래서, 그게 속상했어요?”

 

?”

 

내가 반말해서 속상했냐고요, .”

갑자기 사람의 마음을 훅 치고 들어오는 송민호의 말버릇이 또 나왔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진우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얼굴과 목소리는 전처럼 제 것이 아닌, 텔레비전에서 보던, 국민 썸남 송민호 그대로의 것이었으니. 땅바닥을 쳐다보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하는 진우의 턱을 민호의 단단한 손이 잡아올려 민호와 눈을 맞추게 했다.

 

그런 거 아니면요. 나한테 설렜구나. 나돈데.”

 

뭔데에..”

 

그의 다정한 존댓말에 얼굴이 달아올라 은근슬쩍 말을 놔 버린 진우를 보며 피식 웃은 민호가 미소를 띠며 진우의 양 손을 꼭 쥐고 진지하게 말했다.

 

쇼윈도 연애 말고, 연애 해요 그럼. 진짜 연애. 나랑. 한 달짜리 말고 오래가는 그런 연애.”

 

민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진우의 큰 눈 위로 손을 쓸어 감긴 눈꺼풀 위에 상냥하게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대었다 뗐다. 민호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 순간 진우가 민호의 손을 잡고 프라이빗 룸의 방문을 열어 찌라시를 들은 몇몇 취재진들이 숨어 있을 로비 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벨보이들과 손님들,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민호의 뺨을 두 손으로 잡아 까치발을 들고 진하게 입을 맞추고서 어리벙벙해진 민호와 모두를 보며 수줍게 웃음을 터트렸다.

 

1일 키스는 형이 먼저 할게.

 

이번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건 민호 쪽이었다.

*

 

그 일이 있은 후 3년째 배우 송민호와 포토그래퍼의 꿈을 이뤄 순식간에 인기작가가 된 김진우의 연애는 평탄대로를 걸었다. 간혹 각자의 인스타그램엔 진우의 작업실과 민호의 촬영장에서 함께 손을 잡고 찍은 커플링 사진이나 진우가 사진작가로서 찍어 준 민호의 화보가 올라와 큰 화제를 모았다. 진우가 스물여덟이 되던 해 삼월, 각종 신문들의 연예면에는 봄에 맞는 핑크빛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 톱스타 송민호(26), 이달 26일 사진작가 김진우(28)와 결혼 발표..‘벚꽃엔딩아닌 벚꽃웨딩

 

둘을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진우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까르띠에의 다이아 반지를 당당히 내밀며 프로포즈를 했던 민호가 사석에서 친한 동창들과 준비하면서 혹시나 진우가 제 마음을 거절하지나 않을까 걱정해 몇 번이고 훌쩍댔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졌지만 정작 둘은 그러거나 말거나 깨소금을 뿌리며 신혼여행지를 물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후쿠오카로 허니문 갈 때쯤이면 민호 생일이겠네? 선물은 뭐 주지?”

 

진우형, 나 받고싶은 거 있어요.”

 

뭔데?”

 

첫날밤 섹스는 내가 먼저 할게.”

 

민호의 생일 다음날 아침 일본에서 깨어날 서로의 몸 곳곳엔 붉은 핑크빛 벚꽃잎 자국이 흩뿌려질 예정이었다.

여의도의 벚꽃은 그들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한, 아마도 축복일까.




Written By. 앙젤 (Twitter Account : @loverwins123)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Written by. 노크)
2018. 3. 26. 20:32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w. 노크

 

 

일요일 오전 8
출근 걱정을 내려놓고 모두들 달콤한 아침잠에 빠져있을 시간

골목길 아스팔트 사이에서는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잡초가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었고 따스한 봄 햇살은 그 이름 없는 생명마저 포근하게 끌어안았다 길고양이들은 저마다 목좋은 양지에 드러누워 긴 겨울이 지나고 찾아온 봄을 즐기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미세먼지마저 모습을 숨긴 상쾌한 봄날 아침  
진우는 벚꽃이 화사하게 그려진 청첩장을 한 장을 손에 쥐고 요즘 청담동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미용실 앞을 30분이 넘도록 서성였다


"하아... 그냥 집에 갈까.."


진우는 손에 쥐여진 청첩장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우는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서 여기 이 화려한 미용실을 아침부터 찾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으악!!"


누군가 갑자기 진우에게 어깨동무를 했고 화들짝 놀란 진우는 빼액- 소리를 질렀다


"우리 직원들 실력 있어요 걱정하지 말고 같이 들어가요"


어깨동무를 한 남자는 낮고 친절한 목소리로 진우에게 속삭였다 진우는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어깨동무를 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반짝반 짝남자의 귀에 걸린 기다란 귀걸이에 봄 햇살이 비쳐 진우는 눈이 부셨다  


"고민하는 거 민망할까 봐 미용실 먼저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되겠네요"


진우가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민호는 진우를 품에 끼고 미용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안녕~ 좋은 아침!!"


미용실 자동문이 좌우로 열리고 남자는 미용실 안의 사람들이 경쾌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어 사장님 일찍 오셨네요"
".. 더 빨리 왔었는데 이 손님하는 짓이 귀여워서.. 한참 구경하다가 이제 들어왔어"


민호는 여전히 진우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화려한 샹들리에와 골드 톤으로 고급스럽게 꾸며진 미용실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진우는 얼떨결에 따라 들어오긴 했지만 마치 호텔처럼 꾸며진 미용실 내부에 넋을 잃고 주위를 바라보았다  민호는 앤티크풍의 갈색 미용실 의자 앞에 도착하고서야 진우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 손님 여기 앉으시죠"


민호는 마치 고급 호텔 레스토랑의 직원처럼 왼손을 뒤로 숨기고 오른손을 미용실 의자를 향해 뻗었다


".. ..."


이 모든 상황이 어색한 진우는 쭈뼛거리며 커다란 미용실 의자에 앉았다 민호는 긴장한 듯 보이는 진우의 어깨 위에 양손을 부드럽게 올렸다 민호는 조명이 가득 달린 거울을 통해 진우와 다정하게 눈을 맞추었다


"제가 억지로 데리고 왔으니까 머리하고 맘에 안 들면 돈 안 받아요 오늘.. 머리 어떻게 해드릴까요? 무슨 사연이 있으면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미용실 앞을 서성거릴 수가 있어요?"


민호는 가벼운 농담과 함께 빙그레 진우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런 민호의 동굴처럼 낮은 목소리와 다정한 눈동자를 바라보던 진우는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전 남자친구가.. 오늘 결혼해요.."


위이이이이잉- -


진우의 한마디에 사방에서 요란하게 울리던 헤어드라이기가 동시에 뚝- 꺼졌다 미용실에는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고 미용실에 있는 모든 직원들과 손님들의 귀가 진우를 향해 기울었다


"결혼하고도 자기랑 몰래 만나자고 해서... 뻥 차버렸어요.. 그런데.. 일주일 전에 이렇게 청첩장을 집으로 보냈더라고요.. 결혼식은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날이니까.. 그런 날은 꼭 제 얼굴 보고 싶으니 와달라고.."


진우가 슬픈 얼굴로 손에 쥐고 있던 벚꽃이 그려진 청첩장을 공중으로 휘휘 흔들어보았다


"저도.. 왜 제가 여기 미용실에 와 있는지.. 결혼식에 간다면... 그 사람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진우의 커다란 눈에서 결국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것을 신호로 동시에 미용실이 미친 듯이 시끄러워지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실장 어디 있어 이승훈 실장.. 이실장한테 헤어 메이크업 맡겨야겠다 나는 급하게 집에서 가져올게 있어서"

민호는 종종걸음으로 이실장이라는 디자이너를 찾으러 사라졌고


"울면 어떻게 해요 눈 부어요!! 여기 여기 숟가락 눈에 빨리 대요"

미용실 직원은 자신이 사용하려고 냉동실에 두었던 얼린 숟가락 두 개를 진우에게 내밀었다


"이실장 난 괜찮아.. 나 오늘 중요한 약속 아니야 저기 저분한테 가 봐"

이실장의 예약 손님은 흔쾌히 자신의 예약을 진우에게 넘겨주었고


"하아... 오랜만에 불타오르는데"

승훈은 마치 헤어 메이크업 대회를 출전하는 것 마냥 의지에 불타올랐다


*


머리 감으러 가요
위이이잉-
스타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나 이실장이야 믿어도 돼
지이이이잉-
눈 위로 뜨고 감지 말고
입술 조금만 벌려봐요

승훈의 폭풍 같은 손길들이 진우를 훑고 지나갔다


신중한 표정으로 꼼꼼하게 메이크업을 마무리하던 승훈의 얼굴에 드디어 만족의 미소가 앉았다 승훈이는 진우를 바라보며 짝다리를 집고 우쭐대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진우 씨 투명 메이크업을 대한민국에 유행시킨 게 누군지 알아요?"
"네에? .. 아니 몰라요"
"그게 바로 저 이승훈이에요.. 거울보고 내 실력에 놀라지 마요.. 거울 안에 천사가 한 명 앉아있을 테니까"


거울을 등지고 메이크업을 받던 진우의 의자가 승훈의 손에 빙그르르 돌아갔다


"...!!..."


진우의 입이 딱하고 벌어졌다
자존감이 낮아 언제나 과하게 겸손하던 진우가 보기에도 거울 속의 남자는 반짝반짝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


"절대 울지 말고 잘해요!"
"민폐 하객의 끝판왕이 되는 거야! 장담하는데 신부보다 진우 씨가 더 예쁠 거야!!"
"정강이를 한 대 걷어차버려"


어느새 가족같이 끈끈한 유대감이 생긴 미용실 직원들은 진우에게 시끌벅적한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진우는 그런 직원들께 몇 번이나 허리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미용실 문을 나섰다


"하아..."


소란한 미용실 나와 골목길에 서니 다시 사방이 고요하게 느껴졌다 진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어제까지만 해도 미세먼지로 칙칙했던 하늘이 오늘따라 눈이 시리도록 파랗게 반짝였다

이렇게 예쁘게 꾸미고.. 자신은 전 남자친구의 결혼식에 가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진우는 아침에 자기 자신에게 했던 질문이 다시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와 심장에 꼭 박혔다


부아아아아앙-
끼이이익-!!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골목을 달려오던 노란 스포츠카는 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우의 앞에 멈춰 섰다  


"깜짝이야!!"


스포츠카 운전석에는 오늘 아침에 미용실 앞에서 만난 남자가 멋진 수트와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있었다 이 남자는 등장할 때마다 진우를 깜짝 놀래켰다


"이러고 있을 줄 알았지.. 미용실도 못 들어오면서 결혼식을 잘도 가겠다.. 빨리 타요! 결혼식 늦겠어요"


평소에도 주목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진우는 엄청나게 화려한 모습의 스포츠카를 보자 절로 뒷걸음질이 처졌다


"... .. 전 괜찮.."
"미용실 직원들 다 불러내서 억지로 태워요??"


민호는 선글라스를 오른손으로 빼꼼히 내리고 농담이 아니라는 듯 진우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


빨간 신호에 잠시 자동차가 멈춰 서고 민호는 오른손을 뒷자리로 뻗었다 민호는 드라이클리닝 비닐이 씌여진 옷을 하나 집어 조수석에 앉은 진우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막내 동생이 입던 옷인데 아마 진우 씨한테 딱 맞을 거예요"


진우는 무릎 위에 올려진 딱 봐도 비싸게 보이는 흰색 수트를 바라보았다  진우처럼 낯을 심하게 가리는 사람에겐 낯선 사람의 과도한 친절은 오히려 거부감을 일으키기 마련이었다


"오늘 처음 본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죠?"


진우는 조금 냉랭해진 눈으로 선글라스를 낀 민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예뻐서요"
" . . . "


민호의 장난스러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진우의 입이 꾹 다물어버렸다 그런 진우의 반응에 민호는 하하하 소리 내며 웃었다 놀리면 놀리는 대로 파르르 반응이 오는 진우가 민호는 귀여웠다


"나도 3년 전에 비슷한 일은 겪어서 그래요"


민호는 싱글벙글 웃으며 마치 딴 사람의 이야기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때 밤새도록 술 처먹고 결혼식장에 깽판 치러 갔었어요 근데 멀리서 그 사람이랑 눈 마주치자마자 냅다 도망쳐버렸어요.. 크큭.. 웃기죠"


민호는 그 비극적 사건이 뭐가 그리 웃긴지 핸들에 두 손에 올리고 경쾌하게도 하하 웃었다


"진우 씨를 향한 내 호의는 나의 묵혀둔 한풀이라고 생각해주면 고맙겠는데요.. 진우 씨는 그래도 멀쩡하게 제정신으로 미용실 앞까지 찾아왔으니 나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인 거 같지만.."

"... 아니에요.. 전 민호 씨 아니었으면 결혼식장도 못 갔을 거예요.."

"거기 가면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진우 씨는 아마 정신없을 거야 내가 그쪽으론 선배라 잘 알거든요.. 진우 씨는 그냥 내가 시키는 말만 따라 하면 돼요"


민호의 다정한 미소에 진우는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세워놓았던 마음의 벽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진우는 민호가 시키는 욕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욕하는 것치고 너무나 어색한 진우의 딕션에 민호의 웃음이 빵하고 터져버렸고 진우도 민호와 함께 하하 웃어버렸다

오늘 아침 진우는 자신이 결혼식장을 향해 가며 이렇게 환하게 웃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소매가 조금 길어 진우의 손등을 조금 가리는 부드러운 흰 실크 셔츠, 진우의 예쁜 엉덩이 라인과 다리라인을 잘 살려주는 화이트 수트, 한 번도 신지 않은 듯 반짝반짝 빛나는 화이트 구두를 신은 진우의 모습은 말 그대로 민...객 그 자체였다

진우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사람들이 자리에 멈춰 서서 진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신부가 가장 아름다워야 할 결혼식장에서 진우는 주인공 자리를 빼앗았다

하지만 진우의 소심한 발걸음은 전혀 주인공답지 않게 주춤거리다 결국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잠깐.. 잠깐만요.. "


예식장 입구에 걸린 남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 진우는 결국 발걸음을 멈추었다


"민호 씨..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식장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행복한 얼굴을 한 여자와 전 남자친구의 웨딩사진이 가득 걸려있었다

진우는 사진 속의 여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왔냐'라며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우는 자신의 시선을 도대체 어디에 두어야 할지 너무 혼란스러웠다


"진우 씨... 아까 나랑 차 안에서 연습 한 거 기억나요?"


민호가 진우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진우를 다독였다 그제야 진우는 바닥만 바라보던 시선을 민호와 마주쳤다 진우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이 상황이 버거운 듯 갈색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억나긴 하는데.. 민호 씨.. 저 못 하겠어요 나 마음 편하자고.. 이 여자분의 결혼식을 망칠 순 없어요"


이 거지 같은 상황에서 전 남자친구의 애인을 걱정하는 진우가 민호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참 예뻐 보였다 민호는 이렇게 착하고 예쁜 진우가 양아치 같은 놈에게 더 이상 당하고만 있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아까 연습한 거만 기억하면 돼요.. 나만 믿고 따라와요"


민호는 진우의 차가워진 손을 꼭 붙들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찬 보폭으로 진우의 옛 남자친구 앞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경태 씨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감사합니다"


경태는 처음 보는 낯선 남자의 축하에 당황했다 이 정도로 잘생긴 남자를 잊을 리가 없을 텐데.. 경태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민호의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았다 하지만 초면인 민호의 얼굴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 안녕하세요"


민호는 제 등 뒤에 숨어버린 진우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세웠다 민호의 손을 붙잡은 진우는 여전히 죄인인 것처럼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우리 진우랑 헤어져주신 게 너무 감사해서 인사 차 왔습니다"


민호의 입에서 나온 '우리 진우'라는 단어에 경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경태는 고개를 숙여 진우의 손을 꼭 붙잡은 민호의 손을 바라보았다 곧 경태의 관자놀이에 불끈 힘줄이 솟았다


".. 진우랑 헤어진 적 없습니다"


경태는 어금니를 꽉 물고 씹어서 말을 했다 뻔뻔하게도 경태는 본인이 오히려 화를 내고 있었다


"하아.."


경태의 뻔뻔함에 고개를 숙인 진우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나왔다 진우는 이런 놈을 사랑한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해졌다

민호가 옆구리를 쿡 찌르는 신호를 주지 않아도 진우는 아까 차 안에서 연습했던 말이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경태 씨 결혼 축하해.. 진심이야.. ."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보던 김진우는 더 이상 이곳에 없었다 진우는 맑은 눈을 반짝 뜨고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이 결혼 아니었음 당신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모를 뻔했거든..."


민호는 진심으로 그런 진우가 예쁘고 사랑스러워 진우 머리칼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 모습을 본 경태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김진우..!! .. 그새를 못 참고 딴 남자를..!!"


민호는 진우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선 경태의 가슴을 뒤로 강하게 밀었다  진우와 경태 사이를 막아선 민호는 스포츠카의 키를 두 번째 손가락에 걸고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돈 봉투를 꺼내 경태에의 손에 꽈악 쥐여주었다

경태는 민호의 손가락에 걸린 자동차 키의 로고를 보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경태가 로또에 2번 걸린다고 해도 엄두 못 낼 자동차였다


"오늘 예식장 비용은 내고도 남을 겁니다.. 우리 진우를 주셨는데 이 정도 성의 표시는 할 수 있을 만큼 능력 있는 놈입니다"


민호는 진태의 손을 자신의 몸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진태의 귓가에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해력이 안 좋으신 거 같아 참고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진우한테 이딴 청첩장 보내서 찝쩍거리시면.. 경태 씨 인생 망가뜨려 드릴 수 있을 만큼의 능력도 되는 놈입니다  
미스터 쓰레기씨 다시 한 번 결혼 축하드립니다"


*


결혼식장 밖으로 나올 때까지 진우는 민호의 손을 동아줄처럼 꼭 붙잡았다 그 손마저 붙잡고 있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결혼식장을 다급하게 빠져나온 진우의 눈앞에 하얀 광장과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진우는 그제야 민호의 손을 놓았다 진우는 아무 말없이 뚜벅뚜벅 광장을 가운데를 향해 걸었다

광장의 주위를 가득 둘러싼 커다란 벚꽃들은 진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름답게 두 팔 흔들며 진우를 반겼다


"흐윽..."


진우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려내렸다 경태가 그리워서가 아니었다 지난 4년간의 진우 자신의 사랑이 가여워 눈물을 흘렀다

알록달록 예쁘기만 했던 진우의 추억 조각들이 거무튀튀한 흑백으로 하나하나 변질되어갔다


솨아아아아-


벚꽃잎들은 파아란 하늘을 풍경으로 아름답게 흔들리며 고운 소리를 내었다 고개를 들어 그런 꽃잎을 바라보던 진우가 결국 자리에 주저앉았다


"흐윽... 나쁜 새끼.. 미친놈.. 흐윽..."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진우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던 민호의 손에 청포도맛 사탕이 하나 잡혔다 아까 결혼식장 입구에서 집어온 사탕이었다 민호는 사탕을 하나 꺼내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울고 있는 진우의 입속으로 사탕을 쏙- 골인을 시켰다


"...!!..."


황당하기 그지없었으나 진우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는 민호의 의도가 정확하게 성공했다


".. 지금 모하 눈 짓이에여?!"


진우는 고개를 들어 나름대로 앙칼지게 물었다 하지만 입안의 커다란 사탕으로 인해 웅얼웅얼 귀여운 발음이 되어버렸다

민호는 진우의 물음에 대답 대신에 양복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었다 그리고 봉투를 진우의 눈앞에 살랑살랑 흔들었다


"원래 경태 씨 축의금으로 준비한 건 여기 이 50만 원짜리 봉투였어요.. 아까 경태 씨한테 준 두꺼운 봉투는.. 우리 미용실 체인점 1차 계약금이었고.."
"네에?!?!!!"


민호의 폭탄 발언에 진우의 눈물이 확실하게 쏘옥- 들어가 버렸다


"봉투가 뒤바뀐 거예요?!"
"아니요~ 아까 그분이 진우 씨랑 헤어진 적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순간 열이 확 받아서.. 여기 이쪽 봉투로 손이 가지 뭐예요.. 그런 쓰레기들은... 권력과 돈으로 뭉개줘야 말 귀를 알아먹거든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진우는 손등으로 눈물을 휘휘 훔치고 민호의 옆을 지나 다시 결혼식장으로 씩씩대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계약금이면.. 돈이 꽤 될 텐데 저런 나쁜 놈한테.."


청포도맛 사탕을 입에 물고서 옹알옹알 화내며 걸어가는 진우의 뒷모습이 민호의 눈에 귀엽게만 보였다  

민호는 결혼식장을 향해 걸어가는 진우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 진우의 손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억지로 돌려세워진 진우의 무게중심이 휘청- 흔들렸다 이 타이밍을 놓칠 리가 없는 민호는 진우의 허리를 감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 ...!!.."


진우는 맞춤한 듯 민호의 품에 쏘옥 안겼다 넘어지는 줄 알고 깜짝 놀란 진우는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떠올렸다

진우는 이 미스테리한 남자가 다음에는 무슨 행동을 할까 도통 예측이 되지 않았다  그런 진우의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그윽하게 바라보던 민호의 고개가 진우의 입술을 향해 꺾여 들어갔다  


도로로로록-


진우의 입안에 있던 청포도맛 사탕이 민호의 능숙한 혀 놀림으로 민호의 입안으로 굴러들어갔다


-


입술이 떨어지는 촉촉한 소리가 야하게 울렸다 첫 데이트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가볍고 달콤한 키스였다


".....!!!!!.."
"음 달다.. 사탕이 달달한지진우 씨 입술이 달달한지
아니면 내 기분이 달달한지  모르겠네요"


영혼이 탈곡된 듯 놀란 진우가 민호의 품 안에 안겨 사슴 같은 눈을 깜박였다


".. 뭐 하시는 거예요.."
"나한테 미안하고 고맙고 그러죠?"


민호는 진우를 향해 개구지게 씨익 웃어 보였다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이건.."
"축의금 되돌려 받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민호는 진우의 말을 뚝 잘라 끊었다 민호는 입안에 사탕을 오른쪽 볼 주머니에 쏙 집어넣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아까 그 돈 저한테도 절대 작은 돈은 아니에요..  나한테 정말 고맙고 미안하면 오늘부터 나랑 데이트 10번만 해줄래요?"


솨아아아-


넓은 광장 위로 시원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민호와 진우의 위로 아름다운 벚꽃비가 흩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두근-


경태와 헤어지고 차갑게 얼어 멈춰버렸던 진우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오늘 처음 본 저한테.. 왜 그런 제안을 하시는 거예요?"
"예뻐서요"




Written By. 노크 (Twitter Account : @jinu_kn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