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웠어요, 제페토. 우린 이제 안녕이에요.
인형은 조용한 목소리로 안녕을 고했다. 달빛을 제 안경에 머금은 채로 잠이 든 인형사는 인형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인형은 아직 뻣뻣함이 남아있는 손가락을 옮겨 인형사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보았다. 사람의 체온과는 확연하게 다를 인형의 도자기 같은 촉감에도 인형사는 전혀 눈을 뜨지 않았다. 인형사의 안경에 머금어진 채로 빛을 발하던 달빛은 인형의 피부에도 이내 고이 스며들었다. 인형사가 어떤 꿈을 꾸는지, 인형은 도자기같이 텅 빈 제 머리로 생각해보려 하였지만 아무런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 그렇기에 인형사와 저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인형은 조심스럽게 차가운 제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인형사와 같은 것은 그곳에 없었다. 그렇기에 인형은 인형사를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형사가 걸어준 마법으로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인형은 그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인형사는 솜씨 좋은 장인이며 또한 마법사였다. 인형은 인형사에게서 생명을 받아 걸을 수 있고 먹을 수 있었으며 앞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런 솜씨 좋기로 소문난 인형사임에도 불구하고 인형에게 줄 수 없었던 것이 딱 두 가지가 있었다.
타인에 대한 마음. 공감.
인형은 그래서 저는 공감할 수 없는 인형사를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제페토, 그 인형사에 대하여.
w. MTR
어느 숲속에 처량하게도 홀로 지어진 통나무집. 그곳에서 쉴 새 없이 망치질 소리와 무언가 잘라내는 것 같은 톱질하는 소리, 그리고 뚜닥뚜닥 조립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숲속에 놀러 왔던 참새들은 그 소리에 지레 겁을 먹고 무리를 지어 하늘을 향해 사라졌다. 집의 주인은 마지막 조립 공정에 있었다. 도자기 안에 붉은 루비로 만든 하트 모양의 핵을 넣었다. 그 공정까지 마치고 나서 곱게 싸둔 비단을 열었다. 그 틈새에서 보인 것은 마치 흑요석과도 같은 두 개의 보석이었다. 양쪽의 모양을 얄미울 정도로 똑같이 재단한 보석. 남자는 그것을 쪼개어진 도자기의 안에 고정하였고, 마지막으로 고운 뚜껑을 덮었다. 똘망하게 보이는 두 개의 보석이 저를 마주 보는 것에 남자는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이것은, 제가 창조했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피조물이었다. 이것이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남자는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길을 걸어왔다.
작은 주머니를 꺼내 이윽고 고운 별이 인형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하얗고 창백하기만 하던 관절에 힘이 실렸고, 반들반들하던 도자기에는 인간의 그것과도 같은 머리칼이 돋아났다. 그저 창백하던 왼쪽 가슴 안쪽에 투명하게 발간빛이 떠올랐다. 루비의 빛이었다. 보석이 박힌 위에는 속눈썹이 돋았고 입술에도 색이 돌았다. 남자는 그것이 퍽이나 만족스러웠다. 이 작업을 위해 죄 없는 팅커벨의 목숨을 몇이나 빼앗았던가. 아마 저는 죽으면 지옥에 가리라,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남자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후세계 따위, 쌀 한 톨 만큼도 중요하지 않았다. 제가 사는 세계 외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제페토.”
이윽고 인형은 띄엄띄엄 입술을 열어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제페토. 그렇게 이야기하자 남자는 조용히 인형을 마주 보았다. 제가 창조하였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피조물. 세상의 잘못된 부분은 단 하나도 머릿속에 담고 있지 않을 피조물. 제페토는 살며시 두 팔을 벌렸다. 인형은 이내 활짝 웃으며 제페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제페토는 인형을 더욱 끌어안았고 차가운 도자기와도 같던 피부 곳곳에는 제페토의 온기가 스며들었다. 인형은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한 관절을 조금 더 펼쳐내었고, 제페토의 체온을 더욱 가져오려고 하는 것처럼 양껏 저와는 다른 피부를 끌어안았다.
“제페토.”
“...그래.”
“제페토, 제페토.”
내 이름은 뭔가요? 인형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제페토에게 속삭였고, 제페토는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은 인형의 넓적다리 안을 그윽하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인형의 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진우.
그렇게 이야기하면 인형은 제페토의 목을 안은 채로 웃음을 울렸다.
**
민호, 제페토는 무엇보다도 제 창조물을 아끼는 남자였다. 물론 제페토의 그러한 성미의 뒤에는 창작가가 지녀 마땅한 자존심과 제가 지닌 콧대 높은 자신감이 뭉뚱그려 섞여서 나타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인형, 진우는 제페토의 자존심과 자신감의 피조물이었다. 제페토는 진우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었고 창조해낸 신이었다. 진우는 제페토의 말이라면 제 눈을 뽑을 정도로 신뢰하고 있었고, 제페토 역시 그가 저를 신뢰하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렴. 제페토, 제페토는 창조주였으니 말이다. 진우는 제페토에게 받는 것은 그 무엇도 거절하지 않았다. 제페토는 진우에게 있어서 고통이기도 하였고 애정이기도 하였다.
“...진우.”
오늘도 무언가 한참 나무토막과 씨름을 하는 제페토의 옆에 붙어있는 진우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거리만큼은 붙어있다고 서술하여도 실질적으로 온전하게 다리를 땅에 붙이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제페토는 얄팍한 나무토막을 연신 대패로 갈아내고 있었으며 진우는 그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였다. 깨질 것 같은 도자기 재질의 피부에 로프가 파고드는 일은 없었지만, 자칫 잘못 풀리기라도 하여 땅에 떨어지는 날에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라는 것을 진우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제페토는 짧은 머리에 내려앉은 톱밥을 대충 털어내고 눈에 쓰고 있던 유리막을 벗었다. 진우, 라고 이름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어설프게 로프에 매달린 채 제페토의 머리 위를 오가고 있었다.
“제페, 토.”
“왜 그러니.”
“아... 파요.”
“아프니?”
끄덕. 비록 진우가 살에 파고드는 아픔이야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민호, 제페토의 마법에 걸려있는 탓에 인간과 비슷한 성질을 띄우고 있는 그에게 중력에 의해 땅으로 꺼지는 것과 비슷한 감각과 도자기에 스치는 로프의 느낌은 아픔을 전해주고 있었다. 제페토가 그를 부러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아 둔 것은 아니었다. 궁극적인 제페토로서의 목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창조주로서 기꺼이 제 창조물을 실험대에 오르게 한 것이었다. 한가지는 성공했다. 제페토는 다시 유리막을 씌우고 대패질에 열중했다.
“머리가 아... 아파요.”
“그래.”
“그리고, 자꾸... 깨질 것 같아요. 제페토, 제페토.”
“깨져도 다시 고쳐준다는 것을 알고 있잖니.”
“아파, 아파. 아파.”
“괜찮아.”
붉은 로프에 매달린 채로 천장-정확히는 제페토의 머리 위-를 유영하던 진우는 참으로도 인내심이 약했다. 제페토는 진우가 금방이라도 우는 소리를 울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법을 걸어 진우를 창조하는 동안에 뿌린 팅커벨의 가루가 유달리 버릇이 좋지 않은 개체에서 수확한 탓인지, 아니면 그저 제페토가 끌어낸 또 하나의 성과로서 진우만의 성격을 가진 것인지 제페토는 거기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진우의 곧게 뻗은 다리가 제페토의 머리를 스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스치면 혼난다. 그것에 연계되는 행동을 진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여서 제 몸이 의지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곧, 잘 뻗은 하얀 다리가 제페토의 머리꼭지 위를 스쳤다.
“민호.”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니, 진우.”
“아파요. 싫어... 요. 그만하고 싶어요.”
“그만하고 싶다고 해도 널 도와줄 수 없단다. 알고 있잖니.”
“제페토는 왜, 읏. 바빠요? 진우는 아파요. 어서 풀어주지 않으면 내려가서 장난칠 거에요.”
“...아직 버릇이 좋지 않은 모양이구나.”
“제페토.”
제페토는 진우의 입에서 제 본명이 나올 때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저는 ‘제페토’의 의지를 승계하는 사람일 뿐, 인간의 이름은 버린 것이 오래전 일이거늘 말썽꾸러기 인형은 제멋대로 온 공방을 뒤집고 다니다가 제페토의 이름을 알아버린 것이다. 선대 ‘제페토’와 사진을 찍은 어린 시절의 지금의 ‘제페토’. 그 사진 뒤에는 선대 ‘제페토’의 이름과 민호라는 지금의 ‘제페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 사진을 찍은 줄도 몰랐는데 말이다. 사진을 다 보지도 않고 제페토는 그것을 수납하였고, 말썽꾸러기 인형은 그날도 오늘처럼 로프에 대롱대롱 매달려 제페토의 작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두 발을 마루에 내릴 수가 없었다. 제페토오. 어리고 뭉뚱그린 발음이 제페토의 귀를 스쳤다.
“제페, 토. 제페토오. 제페토...”
“왜 그러니.”
“내려가서 제페토랑 예쁜 일 하고 싶, 싶어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단다.”
참새도 아직 울고 해도 반짝이고 있잖니. 제페토의 말에 진우는 기어코 울상을 짓고야 말았다. 제페토는 쉽사리 말을 들어주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진우는 제 창조주에게 가르침을 받은 대로 예쁜 일을 하고 싶다며 색이 담긴 말을 던졌지만, 대패질에 열중한 제페토는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음이 분명했다. 제, 페토오. 그렇게 진우가 다시 불렀다. 고운 발가락 끝이 다시 제페토의 머리칼과 머리꼭지를 골고루도 스쳤다. 제페토는 그런 부름에도 결코 응답하는 일이 없었다. 마지막 대패질이 끝나고 우둘투둘하던 나무토막은 반듯한 모양새를 갖추었을 때, 툭 하고 바닥에 손가락이 떨어졌다. 아아.
“...깨졌구나.”
“제페토가, 풀어주지 않... 으니까. 손가락이.”
저 홀로 로프를 풀어보려 애를 쓰던 진우는 제 손가락을 부러트리고야 말았다. 둥그런 관절이 달린 손가락이 떨어진 것에 제페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도자기를 들었고 깨진 부위를 살펴보았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손톱 끝과도 같은 부위에 금이 들었다. 버릇이 좋지 않은 인형이었다. 제페토는 검지를 잃은 진우의 왼손을 낚아챘다. 구멍이 뻥 뚫린 마지막 관절 사이로 텅 빈 진우의 몸속이 그대로 내비쳤다. 역시나 아직 햇빛이 쨍한 오후였다. 손가락 끝까지 제대로 /부품/을 채워 넣을 것을 그랬다. 텅 빈 모양새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에 제페토는 제가 진우를 창조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금이 간 손가락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완벽에 가까워야 하는 제 창조물이 아니던가. 진우의 몸에서 떨어진 것은 절대 손가락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 아니었다. /부속품/. /부품/. 그것을 공방 탁자 옆의 쓰레기통에 던진 제페토는 물레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진우를 내렸다.
“손가락, 만들러 가야지.”
“제페토, 아파요. 제페토.”
“아픈 것도 고치자꾸나.”
끄덕. 제페토의 말에 진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
인형사에서 멀어진 인형은 신발이 벗겨질 것처럼 숲길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인형사가 눈을 뜨기 전에 최대한 멀리 멀어져야 했다. 인형사가 원하는 것을 인형은 줄 수 없다. 이루어줄 수 없다. 그것을 눈치챈 것이 조금 더 이른 시일이었다면 돌에 머리라도 박아서 제 핵을 모두 깨부술 수 있었을 텐데. 인형사를 앞에 두고 그것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인형사가 갓 저를 만든 때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인형은 인형사와 지내는 동안 인간의 감정을 터득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터득과 그 마음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은 달랐다. 인형이 아무리 힘을 써도 인형사 그 자체, 전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인형은 계속해서 숲길을 내달렸다. 인형의 왼쪽 가슴에 박혀있는 루비가 쉴 새 없이 펌프질하며 그 속도를 올렸다. 신발이 벗겨지면 발에 흠집이 생길 것이다. 더는 제 몸을 고쳐줄 인형사는 곁에 없을 것이다. 숲을 막고 있는 나뭇가지에 옷가지가 걸렸다. 이러다가 몸에 흠집이라도 나면 더는 고쳐줄 인형사가 없다. 인형은 달리는 사이사이에도 그것을 주의했지만, 옷가지는 더욱 너덜너덜하게 찢겼다. 그럴수록 날카로운 나뭇가지는 인형의 도자기 같은 피부에 흠집을 남겼다. 말랑말랑하게 변화한 피부는 스칠 적마다 아팠다. 그것에 왼쪽 가슴의 루비가 더욱 빛을 발했다.
**
“먹을 수 있겠니?”
“...다시 넘칠 것 같아요.”
“이제 먹을 수 있을 때도 된 것 같은데 말이다.”
제페토는 침대 옆에 비스듬하게 서서 우유가 가득 들어있는 컵을 진우에게 건네고 그 모습을 관찰하였다. 몇 모금인가 마시던 진우는 이내 입을 틀어막았다. 액체가 텅 빈 몸을 가로지르고 들어가 역류할 것만 같았다. 안에 들어있는 사람의 내장을 꼭 틀어박은 /부품/들은 생각보다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진우는 제페토가 창조한 지 두 달이 넘도록 우유조차 소화를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 이전에 창조한 인형은 어떠하였던가. 제페토의 손을 거친 인형들은 완벽하게 /부품/들을 가동할 수 있었지만, 진우는 여즉 제대로 가동할 수 있는 /부품/의 수가 아주 적었다. 제페토는 작게 고개를 젓곤 이윽고 억류하기 시작한 우유가 진우의 입을 타고 오르는 것을 보고 침대 시트로 그대로 닦아냈다. 진우는 영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진우의 입을 막은 손. 왼손 검지는 다시 돌아와 있었다. 완벽하게 안에 뼈대라는 이름의 /부품/들을 채워 넣어 제페토가 창조해낸 그것은 그 전에 진우의 몸에 달려있던 /부품/보다 튼튼했고, 무게감이 있었다. 제페토는 본인이 만든 창조물의 무게감에 대하여 어젯밤에 진득하게 탐닉한 참이었지만, 입가에 그득하게 우유를 물고 있는 진우를 보면 역으로 제 아랫도리에 묵직한 무게감이 가는 것을 느꼈다.
“제페토.”
“왜 그러니.”
“간지러워요.”
“어디가 말이니.”
“여기요.”
제페토의 물음에 간지럽다며 감각 이상을 호소하던 진우는 입을 가렸던 시트를 치우고 아침 햇살에 맨몸을 드러냈다. 사람의 관절이 있어야 할 곳에 진우는 제페토가 창조해낸 둥그런 /부품/을 달고 있었다. 그것은 확연하게 이음새가 삐걱거리며 간혹 틈이 보였고, 맘만 먹는다면 떨어져 굴러다닐 수도 있을 정도였다. 진우가 가려움증을 호소한 것은 무릎 안쪽 /부품/이었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그 부위는 오금에 해당하는 곳이었기에 제페토는 마찬가지로 둥근 /부품/이 끼워진 발목을 들어 안쪽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기적이었다. 둥근 /부품/의 이음새가 주변과 융화되어 가는 것처럼 경계선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하나의 /부품/이 아니라 진우의 무릎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간지러워요, 제페토. 다시금 감각 이상을 느낀 진우의 칭얼거림에 제페토는 양다리를 넓게 벌려 둥근 /부품/이 자리하고 있는 모든 곳을 살펴보았다. 오른쪽 무릎 안도 마찬가지였고 제페토의 손에 잡힌 발목도 그러하였다. 모조리 이음새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러운 모양새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넓게 벌린 허벅지의 안쪽, 사타구니로 이어지는 그 /부품/도 그러하였다. 제페토는 손을 들어 그 이음새들을 쓸어보았다. 단단하던 감촉이 조금 말랑하게 변화하였다. 무심코 제페토는 진우의 발목을 세게 쥐었다.
“가려워요. 간지러워요, 제페토.”
“...”
“민호.”
“...”
“민호, 읏. 민호.”
경이로웠다. 동시에 분노하였다. 우유도 제대로 소화도 시키지 못하는 주제에 진우의 몸은 착실하게 인간을 향해 변화하고 있었다. 이음새라는 이음새는 모조리 부드럽고 말랑해지고 있다. 제페토는 제 두 다리로 진우의 무릎을 닫지 못하게 고정하고 팔목을 쥐었다. 가까이 끌어당겼다. 도자기를 살펴보면 단단하고 매끈한 특유의 촉감이 아닌, 가벼운 해면체가 아래에 틀어박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페토는 진우의 왼쪽 가슴으로 시선을 돌렸다. 루비는 빛을 발하며 진우가 아픔을 호소할 적마다 붉은빛을 더욱 뿜어냈다. 그럼에도 제페토는 진우의 팔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밤중에 제가 마음껏 탐하였던 입구로 손을 향하게 했다. 그곳은 처음부터 제페토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유달리 힘껏 마법을 걸었었다. 입구 양쪽을 손가락으로 벌려내면 그득하게 제페토의 흔적이 흘러나왔다. 이곳도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것인가. 질퍽하게 내뱉어진 액체들을 제페토는 제 손가락에 휘감아 다시 그 입구를 탐하였다. 진우는 온 관절에 달려오는 감각 이상과 밀고 들어오는 익숙한 손가락에 신음하였다. 무게감이 진득하게 붙은 손가락이 제페토의 등을 감싸려 하였지만, 그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더, 완벽해지렴.”
“아, 읏. 아. 아, 제페. 토, 민호. 민호오.”
“그래.”
“흣! 으, 민호... 더, 응! 더어.”
“욕심이 많구나.”
어쩜 인간의 감각(感覺)에는 그리도 민감한 주제에 감정(感情)은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냐. 제페토는 제 손에 신음하며 달뜬 얼굴을 내비치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려 왼쪽 심장을 지긋하게 노려보았다. 붉은빛의 루비를 비추어내는 도자기 같은 피부. 매끈하지만 확연하게 조금 더 말랑해진 위에 귀를 올려도 심장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제 한계였다. 얼마나 많은 팅커벨이 그 심장 소리를 위하여 희생되었는가. 눈앞에서 날개가 찢겨 비명조차 울리지 못하던 제페토의 손바닥 정도 크기의 생명. 불씨가 꺼지는 촉감. 제페토는 그것을 모두 기억하여 그 생명력을 인형이 이어 받아주길 바라였지만,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단 한 번도 심장의 울림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제가 만든 피조물 중에서 제일 많은 팅커벨을 쏟아부은 피조물이었다.
우유도 소화하지 못하는 주제에. 인간의 온기를 지니려고 하고.
소화하지 못한 우유는 전부 토해내고, 제가 부어준 정액마저 새어 나오게야 만들면서.
기분이 좋거나 달뜬 표정은 지을 줄은 알지만,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러나 제페토는 분노와 함께 느끼는 경이로움이 훨씬 크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제페토는 창조주로서는 그 누구보다 높은 긍지를 가지고 있는 자였다. 화가 나면서도 진우의 변화에는 기쁨이 밀려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제가 창조하였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환희가 차올랐다. 그 환희라는 것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부류의 감동이었다. 오로지 진우를 통해서만 느낄 수가 있었다. 제페토는 무게감이 차오른 제 해면체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우의 안으로 밀어 넣을 결심을 하였다. 그러자, 할딱거리던 달뜬 얼굴이 제페토의 손목을 잡았다. 제페토, 민호.
“왜 그러니.”
“...뜨겁게, 하고. 흐... 뜨겁게, 하고 넣어야... 하응! 응, 해요...”
“네 구멍은 뜨거운데 말이지. 더 뜨겁게 하면, 화상을 입힐 셈이니?”
“아, 아! 아!! 민호, 흡!! 민호오. 아응! 응! 응!!”
“기분이 좋으면 더 뜨거운 것 같구나. 좋은 방법이라도 있니?”
쿨쩍거리며 진우의 안을 유영하는 손가락. 제페토의 물음에 진우는 신음하며 제 머리 근처로 손을 뻗었다. 밤이면 제페토를 위하여 진우가 마련하는 것이 있었다. 도자기처럼 차갑고, 달궈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제 몸을 온전하게 열기 위한 것. 제페토에게서 훈련받은 진우의 방법. 떨리는 손으로 머리맡에서 빛이 나는 작은 유리병을 들었다. 꼭 시험관처럼 생긴 그것은 끝에 코르크 마개가 달려있었다. 코르크 마개를 제거하자 맑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고, 진우는 이윽고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는 그것을 제 손가락에 몽땅 감아내었다. 새로 만든 /부품/은 하얗게 움직이며 제페토의 손가락이 침범한 곳을 어루만졌다.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는 성분. 제페토는 그것이 닿은 제 손가락에도 열이 후끈하게 퍼지는 느낌이 들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드니?”
“네, 흐. 네에. 마음에, 들어. 좋아.”
거짓말. 너는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마음에 든다는 표현을 쓸 수가 있어. 제페토의 중지와 검지가 진우의 검지/부품/과 중지/부품/을 함께 감아냈다. 진우의 손가락도 슬며시 열이 오르는 것이 역시나 제페토가 수확한 이 물건은 효과가 좋았다. 모두 합쳐서 네 개. 가느다랗고 하얀 도자기 같은 진우의 손가락과는 다르게 마디마디가 굵어 일의 굳은살이 잔뜩 박인 제페토의 손가락은 흥분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제페토가 감각에 열중할수록 진우는 그보다 더 열중하였다. 아무렴, 제가 신뢰하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제페토가 들어올 곳이다. 그렇다면 열심히 해야 한다. 제페토가 뜨거움을 느껴야 하고, 저도 뜨거움을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솟구치는 것이 사고회로에서 오는 탓인지 아니면 제가 온전하게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인지 진우는 알 수가 없었다. 제페토로서도 알 수 없는 부분이 아니었는가. 피조물인 제가 고민해도 도출할 수 없는 결론과도 같았다.
“들어가자. 넓게 벌려보렴.”
“아, 아. 제페토. 흣! 민호. 민호...”
들어와 주세요. 어서. 쾌락과 아픔의 감각을 느낄 줄 아는 진우는 제 두 다리를 넓게 벌려냈다. 번들하게 젖은, 은은하게 빛을 내뿜는 새하얗고 고운 피부 결. 제페토는 제 마음에 깃드는 것이 소유욕과 함께 오는 실험체를 향한 애정임을 잘 알고 있었다. 진우의 무릎 안쪽의 이음새는 더욱 보드랍게 합쳐져 있었고 시선이 닿는 구멍은 달큰하게 빛나는 액체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보고 있자면 군침이 돌았다. 완벽한 피조물. 그러나, 마음과 이해가 없는 피조물. 그래도 이 상황에서 다른 것은 필요가 없었다.
제페토는 곧 저의 일어난 성기를 가져와 구멍 위를 문질렀다. 그것에도 기대하기 시작한 입구는 더욱 벌름거리는 것이다. 흘끔 시선을 바꾸면 보드라워진 아랫배가 진우의 호흡에 맞춰 달싹이는 것이 보였다. 역시, 호흡을 할 줄 아는 인형이 못하는 인형보다 나았다. 이제 기억 저편으로 흐릿할 첫 인형의 얼굴을 잠시 떠올렸다가 보드라운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진우. 그렇게 부르면 두 개의 까만 보석이 저를 보았다. 인간의 눈동자와 참으로 닮아있는 /부품/.
“잘 먹을 수 있겠지?”
“네, 흐. 네에에. 에. 아흐... 으응, 응... 민호오.”
잘 먹네. 좋아. 잘하는구나. 제페토는 공을 들이는 것처럼 매끈한 도자기의 안을 꿰뚫었다. 정성을 담은 /부품/은 먹음직스럽게도 삼켜내며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쾌감으로 바꾸었다. 쾌감을 정의하자면 감정으로 이어져야 할까, 아니면 그것을 마음에 드는 표현으로 받아 진우에게 가르쳐야 할까. 연신 좋아, 더어, 제페토, 민호. 네 가지의 단어를 제외하고는 다른 단어를 뱉을 줄을 모르는 진우에게 제페토는 계속해서 학구열이 들었다. 어디가 좋니, 하고 제페토가 물으면 진우는 저의 벌린 다리를 스스럼없이 내보이며 서툴게 /부품/의 명칭을 내뱉었다. 제페토가 삽입 중인 성기의 이름을 먼저 뱉으며 좋으냐 물으면 진우는 마찬가지로 성기를 머금은 /부품/을 내보이며 끄덕였다. 참으로도 뜨거운 /부품/이었다. 녹을 것 같고, 또한 녹아버렸다. 정신없이 그 안을 쳐올렸다. 완벽한 창조물이자 완벽한 (---)이었다.
제페토, 제페토.
그래.
민호, 흡. 민호. 으, 으응! 응, 민호.
그래, 진우. 조금 더.
제페토는 상냥하게 진우를 보듬어 안았다. 제 창조물의 안에 울컥거리며 정액을 모조리 내보내고 뽑아내자 빛나는 액체가 섞여 흘러내렸다. 아침부터 잔뜩 제페토를 머금은 진우는 팔딱거리며 제 절정을 마무리하자 바로 까무러치듯 하얀 시트 위로 흩어졌다.
왼쪽 가슴은 고동이라도 울리는 것처럼 끊임없이 빛이 들고 있었다.
꺼지지 않을 것만 같은 불빛이었다.
**
인형은 어느 작은 바위틈에 와서야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인형사는 쫓아오지 않았다. 인형은 한숨을 돌리는 것처럼 숨을 내쉬었다. 문득 궁금해진 인형은 자신의 옷을 들춰 왼쪽 가슴 위를 내려다보았다. 인형사가 고이 남겨둔 흔적은 인형의 몸에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옅은 도자기 아래로는 쉴 새 없이 점멸을 반복하는 루비의 붉은 빛이 보였다. 인형은 군데군데 찢어진 옷가지를 더욱 동여매었다. 혹여라도 그 빛이 새어나간다면 인형은 자기가 있는 이 바위틈을 인형사에 들킬 것만 같았다. 초조함이었다.
인형사와 지내던 시간이 괴로웠거나 힘들었던 것이 아니다. 인형이 고른 것은 조금이라도 더욱 인형사를 이해해보려고 하는 노력에서였다. 인형사를 향해 품었던 이것이 인형사가 그렇게도 인형에게 주고 싶어 하던 마음이라는 이름의 물건인지 아니면 단순히 인형사가 걸어둔 마법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인형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인형사의 생각으로 인형이 작은 머리를 가득 채울 때면 신비하게도 루비는 더욱 빛을 발했다. 들킬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인형사를 향한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인형은 더욱 바위틈으로 제 몸을 욱여넣었다. 새벽 동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늑대의 울음소리가 처량하게도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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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페토, 민호가 진우의 부재를 눈치챈 것은 눈을 뜨고 난 후였다.
작업해야 할 많은 일들. 목재 사이. 책상 앞에 앉기 전에는 맘껏 진우를 탐하였고, 그 후에 까무룩 기절하듯 눈을 감은 진우를 두고 일에 열중한 것이다. 그러나, 눈을 뜨고 나면 진우는 사라졌었다. 처음에는 잠깐 집 근처로 나갔을 것이리라 생각하였다. 그것이 이변에 가까운 일임을 민호가 알아채게 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진우는 모르고 민호는 아는 것이 민호에게는 존재했다.
민호의 손에는 두 개의 /부품/이 들려있었다. 하나는 진우와의 거리에 따라 색이 변화하는 장미 모양의 보석, 그리고 진우의 왼쪽 가슴에 박혀있는 것과 같은 붉은 루비였다.
그것은 제 창조물과 저의 거리감을 나타내는 것과 같았다. 멀고 멀수록 보랏빛 빛을 머금었고 가까울수록 파란빛을 머금었다. 민호는 그저 마치 제 색이 보라색의 자수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빛을 발하는 장미를 손에 꾹 쥐었다. 장미의 색색에 따라 진우와의 거리를 표현하고자 한 것은 민호 자신이었다. 그딴 시답잖은 마법에 제 목숨을 사용하는 것이냐며 코웃음을 치던 팅커벨의 표정이 뇌리를 가득 채우는 것에 민호는 미간을 찡그렸다. 얼마나 멀리 간 것일까. 혹여, 달아나다가 숲 깊은 곳에 사는 늑대에게 잡아 먹히거나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잡혔다면 붉은 루비의 빛이 멈췄을 것이다. 붉은 루비는 빠른 속도로 빛을 내지도 않고 은은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루비는 진우의 심장과도 같았다. 그것은 민호가 제일 공을 들여 마법을 걸은 /부품/이었다.
진우는 어떤 생각으로 늘 제가 하는 모든 것을 흡수하였을까. 문득 진우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제페토’의 창조물인 ‘인형’이 마음을 품었으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아 이내 포기하고 조용히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진우가 무언가를 원하고 도망을 갔을 것이리라. 그렇다면, 깃든 것은 무엇일까. 인형사 ‘제페토’로서의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진우를 만나서 물어본다면 답을 도출할 수 있을까. 그러나, 민호의 손에 잡힌 장미는 여전히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조금도 파란 빛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진우.”
이름을 부르면 멀리서도 달려왔었다. 옆에 앉아있기도 했으며 /부품/의 내구성을 보아야 한다는 말에는 천장에 매달려 대롱대롱 다리를 흔들기도 했었다. 민호는 그때야 본인의 심리가 조금 궁금해졌다. 저는 진우를 ‘제페토’로서 ‘인형’으로 대우하였는가, 아니면 ‘민호’로서 ‘진우’를 대우하였는가. 인형은 창조물일 뿐이고 몸을 채우고 있는 것은 모두 제가 만든 /부품/이다. 마법을 걸어 보고 듣고 말하며 의지를 갖고 오감을 선물하여 인간과 비슷하게 만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인형’이다. ‘인형’일 터였다.
민호는 손을 열어 붉게 점멸하는 루비와 보랏빛의 장미를 바라보았다. 단 하나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있었다.
저는 ‘인간’이었으며, ‘진우’를 대하였다.
‘인간’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진우’에게 ‘인간’이기를 바라였다.
인형사 제페토, 민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참새가 지저귐을 멈추지 않는 오후였다.
**
[우습네. 고작 인간 따위가 마법을 손에 넣기 위해서 우리를 수도 없이 죽인 주제에.]
[학살이었지, 학살. 그것이 과연 온전할까?]
웅성거리며 날아다니는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팅커벨의 무리는 숲을 뛰어다니며 벅찬 호흡을 올리는 제페토, 민호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팅커벨들에게 있어 민호는 학살자에 불과하였다. 하등 인간 따위가 마법을 위하여. 그것도 온전하지 못한 인형을 위하여.
[찾을 수 있을까?]
[그 아이는 이미 없을지도 몰라. 가련하기도 해라. 땀이라도 닦아줄까?]
[아서라, 또 잡히기라도 하면?]
[더 달리다가 쓰러지면 우리가 사지를 잘라줄까?]
깔깔거리며 팅커벨의 무리는 웃었다. 소리높여 웃었다. 이제 새소리는 더욱 들리지 않는 깊은 숲, 민호는 들려오는 팅커벨의 무리가 비아냥거리는 소리에도 이를 악물고 보석을 손에 쥐고 달리고 또 달렸다. 이것은 본인이 치러야 할 죄였으며 그동안 샀던 미움이었다. 얼마나 총명한 팅커벨의 무리던가. 사지를 자르겠다며 입을 열고 깔깔거리는 소리. 머리가 어지러운 것은 팅커벨들의 날갯짓 소리의 영향이었다.
그 팅커벨의 무리를 모조리 잡아다가 죽이겠다던가 다시 마법을 걸 소재를 찾는다던가 하는 생각은 민호에게 들지 않았다. 오로지 찾아야 할 것은, 목표는 단 하나였다.
땀이 그득하게 올라온 민호의 손에 쥐어진 장미가 파란빛을 내뿜었다.
**
그즈음에 한 마리 다가온 날갯짓이 있었다. 그 형태는 손바닥보다 조금 더 작은 형태였다. 그 날갯짓은 민호의 곁을 몇 번인가 맴돌았고 꼭 이끌리기라도 하듯 그 빛과 함께 바위틈의 동굴로 민호는 걷고 또 걸었다. 뚝뚝 석회질이 동굴의 천장에서 이어진 푸른 빛의 종유석의 끝에 맺혔다가 뚝 떨어졌다. 그 소리와 날갯짓 소리와 민호가 내딛는 발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無)의 공간은 아니었지만, 한없이 무(無)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얼마나 한참을 걸었을지 날갯짓은 사나운 바위틈에 들어가 빛을 내뿜었다. 민호의 손아귀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보석도 더욱 찬란한 파란 빛을 띠었다. 여기다.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정신없이 바위틈을 헤집었다.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공간. 그곳에 손을 밀어 넣고서 헤집으면 무언가 낯익은 촉감이 닿았다. 창조하고 나서 그 피조물에 목숨을 주고 나서 몇 번이고 머금었던 촉감이었다. 바로 끄집어냈다. 그 피조물의 무게감이 어딘가 가볍게 느껴졌다. 더욱 두근거렸다. 필시 진우는 같은 체격의 인간보다 조금 더 무거울 터였다. 좋지 않은 예감이었다. 진우의 루비와 연계된 민호 몫의 루비는 빛을 잃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일까. 두근거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쩔 수가 없었다. 인간이기를 바랐던 제 인형이었다. 진우. 진우.
“진우.”
“...제페, 토.”
“진우.”
“민호. 민, 호. 민호. 민호.”
고장 난 것만 같은 음성이 바위틈을 타고 돌아 동굴 안으로 퍼져나갔다. 가벼운 무게감. 더욱 부들거리는 촉감. 바위틈으로 억지로 끌어낸 진우. 눈을 마주 보면 그것은 더는 둥근 두 개의 보석이 아니었다. 카메라처럼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동공이 보였다. 곱게 흩날리는 머리칼은 하늘거렸다. 오똑 솟은 코는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였고, 입술은 혈색이 돌아 보였다. 혈색. 그것이 이상했다. 진우는 뚝뚝 울고 있었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액체를 흘릴 수 있는 /부품/은 진우에게 선사한 적이 없었다.
관절 이음새는 모두 이어졌고 말랑한 살이 근육이 단단한 뼈가 붙었다.
제페토가 창조한 인간이기를 바랐던 인형은 인간이 되었다.
**
[목숨이요.]
[내가 다시 마법을 걸어준다면 너는 평생을 살 수 있지. 인간 따위 하나도 좋지 않아! 목숨이 생겨버린다고. 고작 칠, 팔십 년을 살아. 백 년도 못 사는 것들이 되고 싶은 거야?]
[마음.]
[남의 마음을 알아서 어디에 써?]
[공감... 하고 싶어서.]
[공감? 세상 혼자 살지 둘이 사냐? 누가 내 감정에 공감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해?]
나는 공감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야. 공감하고 싶어. 제페토를. 민호를. 띄엄띄엄 이어진 진우의 말에 늑대는 코웃음을 쳤다. 늑대가 보기에는 참으로 알 수가 없는 아이였다. 숲의 터주인 늑대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차라리 인형이 원하는 대로 인간으로 만들고 먹어버리는 편이 영양가가 있지 않을까. 바위틈에 몸을 숨긴 채로 웅얼거리는 말투. 확연하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생명. 제페토. 민호. 숲 팅커벨의 무리가 하나같이 전부 상스러운 욕을 내뱉던 인형사.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만나고 들었던 ‘제페토’라는 족속들은 전부 그러했다. 도움도 되지 않는 녀석. 그 ‘제페토’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역시 인형의 인간화(化)인 것일까.
[목적을 이루어주면 조용해지지 않을까요?]
[...조용히 해라, 이 멍청한 날짐승들.]
[저 아이는 원하는 대로 인간이 될 수 있어요! 제페토는 원하는 대로 인간을 손에 넣어요! 창조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맛보지 않아도 되는 거죠.]
[나에게는 무슨 장점이 있는 거야, 그게.]
[이루어주지 않는다면 제페토의 사지를 바치겠어요.]
싫어요! 팅커벨의 조잘거림에 진우가 그렇게 외쳤다. 그 순간, 루비는 더욱 빛을 발했다. 진우는 이미 본인의 의지와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사고가 가능했으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것에서 늑대는 흠, 하고 턱을 간지럽혔다. 너 말이야. 인간이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공감하고 싶고 마음을 알고 싶다며.]
[...네.]
[너는 지금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거야. 인간이 되고 싶은 거는 네 마음이 아니야?]
[...아.]
[그리고, 제페토의 사지를 바치는 건 싫다며. 나도 사절이야, 그런 성인 남자 따위의 고기.]
그래. 그 말에 진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개의 검은 보석이 환하게 빛을 뿜었다. 늑대의 결론에 팅커벨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진우가 인간이 된다면. 이미 그 마음을 알았다면. 팅커벨은 더는 무리를 잃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목숨을 주마. 네 주인이 오기 전까지는 그놈도 빛나게 해주지.]
[감, 감사. 감사합니.]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리지 말고.]
제페토, 취향 이상하더라. 그 말에 진우는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
깊은 숲에 있는 자그마한 통나무집은 나무공방이다. 솜씨 좋은 인형사, 목수의 소문을 타고 온갖 곳에서 의뢰가 물밀 듯 밀려들었다. 제페토. 숲에 사는 모두가 그 인형사이자 목수를 제페토라고 불렀다. 제페토는 인형이었던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모두들 제페토가 참으로 연인과 사이가 좋다고들 했다. 팅커벨의 무리는 여전히 제페토만 보면 이를 갈며 사지를 찢어버린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지만, 마음을 가져버린 인형이었던 파트너가 막고 나서는 바람에 팅커벨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민호. 민호.”
“왜 그러니.”
“여기 다쳤어요.”
이제 깨지고 망가지고 흠집이 난다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 찾아왔다. 진우는 대패 근처에서 놀다가 베인 손가락을 가지고 민호에게 다가왔다. 방울방울 맺혀있는 액체. /부품/이 가동하여 내보낸 것도 아닌 온전하게 진우의 몸속에 흐르는 것이 맺혀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붉은 루비같은 핏방울에 민호는 그 손가락을 제 입술에 머금었다. 쇠 맛이 났다. 불쾌하지 않았다. 민호, 따가워요. 진우의 말에도 민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러워요, 톱밥 묻었어요.
“괜찮아.”
“있잖아요, 민호.”
“왜 그러니 이번엔. 손가락이 더 아프니?”
“으응, 아니요. 민호, 나 배도 고파요.”
배가 고파서 실수해서 다친 것 같아요. 또박또박도 잘 이야기하는 진우의 말. 민호는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우유도 소화하지 못했던 진우는 이제 민호가 주는 모든 음식을 맛있게 삼킬 수 있었다. 더는 우유를 토해내지 않았다. 부어주는 것이야 새어 나올 때가 있었지만, 애써 주는 것을 모조리 돌려버리는 일은 없었다. 물론, 진우가 <고장>이 아니라 아픈 경우에는 가끔 달랐지만 말이다. 기분이 좋다고 하는 것은 더욱 솔직해졌다. 달뜬 표정은 더욱 혈색을 띠었다. 민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공감할 수 있었다. 민호는 인형사 ‘제페토’로서가 아니라 그저 ‘민호’로서 기뻐했다. 진우는 제가 창조한 인형이 아니라 저와 숨을 쉬고 살아가는 인간이자 동반자였다.
“빵을 먹자.”
“호두가 들어간 빵이 좋아요.”
“고기도 먹어야지.”
“얼마 전에 밤비가 잡혔다고 팅커벨들이 이야기했어요.”
“...불쌍하게도 말이지.”
“불쌍하긴 하지만 밤비는 맛있어요. 얼른, 얼른 가요 민호.”
진우는 나서서 민호의 손을 더욱 잡아끌었다. 통나무집의 정원, 목공 테이블 위에 햇살이 나부꼈다. 톱밥이 제멋대로 휘날리며 공기중을 수놓았다.
제페토, 인형사의 집에 찾아온 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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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TR (Twitter Account : @m_tr_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