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다방 (Written by. Luver)
2018. 10. 26. 23:19


선다방 (feat. 곰돌이의 질투)



 

 

w. Luver





진우 형이 선다방을 나간다고요?”’

 

우연히 들른 회사에서 민호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하반기 컴백을 앞두고 회사에서 예능 프로그램 스케줄을 잡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진우의 선다방 출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니,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스케줄이었다.

 

아니 형, 진우 형이 무슨 선다방이에요. 그 형이 선을 왜 봐요! 원래 막 연예인도 출연하고 그래요 그 프로그램이?”

이번에 가을특집으로 같이 연애하고 싶은 연예인에 뽑힌 사람들만 모아서 하는데

너네 형이 1위를 차지했단다. 애초에 너가 왜 흥분이야 흥분은~ ”

 

내가 진우형을 사랑하니까 그러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민호의 마음은 오늘도 민호 몸 안에서 이곳저곳 배회를 했다. 그저 같은 멤버, 평생 함께할 가족 같은 멤버였는데, 우정은 어느새 계절이 바뀌듯 옷을 갈아입었다. 생각해보면 진우 형은 언제나 특별했다.

형을 보면 언제나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래서 형만 보면 언제나 웃음이 새어나왔다.

송다정이라는 별명 역시 진우 형을 보는 내 눈빛 때문에 생긴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봐도 들키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로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사춘기 소년처럼 맘을 숨기지 못했다. 형이 너무너무 좋았다. 형이 민호야- 라고 불러줄 때마다 귀가 달고, 심장이 발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진우 형이 선이라니, 아무리 예능이라지만 아무래도 싫은 스케줄이었다.

 

 

* * * *

 

 

진우의 선다방 출연 소식이 알려지자 멤버들 단톡방은 역시나 시끌시끌했다. 단 한 사람, 송민호만 빼고. 그런 민호가 여간 신경 쓰이는게 아니었다. 진우는 민호와 하우스 메이트였고 평소에 진우형~ 하면서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자신의 방을 들락거리던 민호가 왜인지 자신의 방에만 콕 박혀 있는 것 아닌가. 아프냐고 물어봐도 아니라고 하고,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면 아무 일도 없다고 하는데 눈빛은 꼭 애니메이션 속 장화신은 고양이처럼 쳐다보니 답답 그 자체.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진우의 선다방 녹화날 아침이 밝았다.

 

진우는 아무 생각이 없는데 오히려 스태프들이 더 난리였다. 메이크업부터 의상까지 이렇게 심혈을 기울이는 스태프들이 귀엽고 웃겼다. 승윤이랑 승훈이까지 와서 , 맘에 들면 신호주기 하자이러면서 옆에서 잔망을 떠는데 역시나 민호만 조용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뭔가 결심한 듯이 매니저 형한테 가더니 진우를 따라가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4초간 정적이 흐른 후에 웃음이 터지는 스태프들 속에서 혼자 진지한 민호였다.

민호가 형 데이트 하러 간다니까 궁금한가 보다 하고 한 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그래, 민호가 와서 형 상대방 봐주고 그래. 우리 민호가 합격한 사람 만나야지

 

오히려 진우는 담담하게 그러라고 말하곤 촬영갈 준비를 계속했다.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 쿨하게 그렇게 하라는 진우의 말에 민호는 정말 오랜만에 베시시 웃었다. 민호가 간다고 하자 승윤이도 승훈이도 같이 간다는 말에 칼같이 안 된다고 말하는 진우 때문에 왜 우리는 안 되는데~~~’ 하며 떼쓰는 두 청년들의 목소리가 가을 하늘을 울렸다.

 

막상 촬영장에 도착하니 민호는 마치 형 따라 촬영장에 놀러온 꼬마가 된 것 같아 민망해졌지만 - 그리고 그게 사실이지만 자신의 진우형을 사수하기 위해서 용기를 내야했다.

 

진우형, 만약에 그 사람이 맘에 들면 데이트도 할 거예요? 번호 줄 거예요?”

만나봐야 알겠지만 좋은 분이고 대화 잘 통화면 저녁까지 같이 먹을 순 있겠지?”

 

민호는 진우의 말에 마음속으로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금새 울적한 마음은 진우의 말에 해가 떴다.

 

근데 민호가 싫어하면 안 가야지. 형 촬영 끝나고 우리 둘이 놀러가자. 알겠지?”

 

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촬영에 들어간 진우를 지켜봤다. 그러고 보면 항상 진우형은 그랬다. 단호할 때가 많아 김구워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실은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다. 방금 한 말도 분명 지난 며칠 울적해 한 자신을 위해 한 말인 것쯤은 알고 있었다. 무심한 듯 하지만 가장 많은 관심을 주는 진우형이기에 좋았다. 다만 그 관심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민호를 외롭게 만들었다.

 

진우형 바보...’

 

 

* * * *

 

 

30시간 같았던 3시간의 촬영이 끝나고, 어느새 짧은 오후가 저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시몬이형, 오랜만에 민호랑 둘이 데이트 좀 할게요.” 라며 따로 이동하겠다는 진우의 말에 웬일인지 매니저형도 쉽게 허락을 하고 진우와 민호는 가을 노을이 내리쬐는 삼청동 길을 걸었다. 노랗게 물든 거리와 노을빛을 받고 있는 진우가 예뻐서 민호는 요란하게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형에게 들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거리 걷는 거 꽃청춘 이후로 오랜만이다 그치? 우리 민호랑 걸으니까 더 좋네~”

 

라고 말하며 자신을 보며 웃는 진우, 그리곤 오후의 햇살을 느끼듯 눈을 감고 걷는 진우를 보며 민호는 예쁘다라는 생각만 반복할 뿐이었다.

 

민호랑 진우는 무작정 걷기만 할 수 없어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들을 도장 깨기 하듯 해보자며 시내를 누볐다. 사진을 좋아하는 민호는 스티커 사진을 찍자고 했고 성인 남자 두 명이 인생 네 컷을 찍으며 깔깔깔 웃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진우의 취향을 반영해 오락실도 간 두 사람.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알아보는 것 같았지만 다들 반응이 설마 위너가 매니저도 없이 이런 곳을 오겠어?’ 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오락실의 꽃, 틀린 그림 찾기까지 클리어하고 일어난 두 사람의 발을 멈춘 기계.

 

딱 한 번만 할까?” 라며 인형 뽑기 기계에 동전을 넣는 진우. 진우의 목표는 확고했다. 똘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곰돌이 인형. 걸릴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지나고, 진우의 입에선 아쉬운 탄식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 아쉽다... 민호 닮아서 뽑아서 침대 머리맡에 두려고 했더니...”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호는 기계에 동전을 넣기 시작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민호 옆에서 응원을 하는 진우까지. 아무리 봐도 맞선은 서로 보고 온 것 같았다. 그리고 진우의 품에 곰돌이 인형을 안겨준 민호는 뿌듯한 미소를 씨익- 아이같이 좋아하는 진우 형을 보니 마음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울리는 전화, ‘형 저희 이제 밥 먹으러 왔는데 술도 마실 것 같아요. 두 시간쯤 뒤에 데리러 와주세요.’ 라고 말하고 끊는 진우였다.

 

요 며칠 계속 기분 안 좋아보여서 오늘 너 기분 전환 해준 건데 스트레스 좀 풀렸어?”

 

진우의 말에 민호는 그저 웃었다. 진우의 선다방 출연 소식 때문에 우울한 거였는데,

결국 데이트는 자신과 했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아니다, 오히려 내가 기분 전환이 되네. 우리 민호랑 오랜만에 거리도 걷고,

오락실도 가고 술도 같이 마시고. 형이랑 데이트 해줘서 고마워.”

 

형이랑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다 나에겐 행복인데, 마주보고 앉아있는데도 형이 계속 보고싶고 그리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잘 숨기며 옆에서 예쁘고 착한 동생으로 있었는데 자꾸만 들키고 싶은 이 마음. 갑자기 터져 나오는 재채기처럼 이 마음이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건 이런 순간이 오늘 하루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이었다.

진심으로 형이 나만의 진우형이었으면 좋겠으니까. 다른 사람을 마주보고 앉아서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날은 이제 없었으면 하니까.

 

진우형, 나 우울했던 이유 다 형 때문이야. 형은 민호만의 형이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랑 맞선 보는 프로그램 같은 거 이제 하지마요. 내가 너무 슬퍼, 외롭고.” 말이 끝나자 처연하게 고개를 숙이는 민호,

 

진우는 민호를 가만히 바라봤다. 함께한 햇수를 세면 다섯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동생이었다. 승윤이나 승훈이, 민호 모두 진우가 사랑하는 동생이었지만 민호에겐 애틋함이 있었다. 그래서 지난 며칠 우울해하는 민호가 더욱 신경이 쓰였다. 컴백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런걸까, 그럼 오늘 그 부담감을 좀 덜어줘야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원인이었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라며 핀잔을 줄 수도 나도 너와 같아라고 응해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민호를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행복하게 웃는 너를 보고 싶다.’ 이 감정이 형재애인지 다른 의미의 애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일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동글동글 귀여운 민호의 머리 위에 손을 대고 쓰다듬어 주는 진우의 손.

 

우리 민호 그랬구나. 형 때문에 외롭고 쓸쓸했구나. 미안해. 앞으론 그런 프로그램 안 할게. 형도 민호랑 함께하는 지금이 더 좋아. 당분간 송민호만의 형 하지 뭐.”

 

고개를 드는 민호의 눈에 물음표가 떠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느낌표로 바꿔줄 순 없는게 미안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그리고 그건 민호도 알고 있었다.

 

 

* * * *

 

 

컴백 후 쏟아지는 인터뷰들 속에서 진우의 선다방 출연은 여러모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진우씨, 연애하고 싶은 연예인 1위로 뽑혀서 선다방 출연하셨었는데, 어떠셨어요?”

우선 연애하고 싶은 연예인으로 생각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리고, 말주변이 부족한데 저와 맞선을 보신 분께도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그럼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하나 할게요. 앞으로 선다방 같은 프로그램에 또 섭외가 된다면 출연하실 의향 있으신가요?”

 

기자의 질문에 멤버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진우를 쳐다봤다.

 

아뇨, 저희 집 곰돌이가 외로워해서 앞으론 안 하려고요. 아직은 곰돌이랑 노는게 더 좋네요. 물론 저희 팬분들의 남자친구로 있는 것도 좋고요.”

 

진우의 답변이 끝나자 승윤과 승훈은 이 형이 천상 아이돌이에요.’ 라며 웃었고 민호는 그저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진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날 저녁, 진우의 SNS에 올라온 글, 곰돌이 인형을 안고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진우의 얼굴과 글 한 줄. [외로움 많이 타는 우리 곰돌이에요. 귀엽죠?] 라고.

fin-




Written By. Luver (Twitter Account : @lover_youth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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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RAL

 




w. 시나






Pt.1

튤립처럼

 

 

 , 또 동아리 호출이다. 축제 시즌도, 대회 준비도 아니라 광고 만들 것도 없는데 주말이고 연휴고 뭐가 됐던 간에 일단 불러댄다. 톡방에 공지된 시간보다 1시간이 지나서야 부원들이 다 모인다. 겨우겨우 모여서 하는 말은 시시콜콜한 잡담뿐. 또는 그마저도 죽쳐 놓는 몇몇 때문에 생겨나는 고요함. 이름만 동아리지 그냥 심심하면 불러내는 개 같은 모임이다. 면접 없이 들어갈 수 있다 하여 자진해서 들어왔지만, 면접이 없는 이유가 있겠지 라는 생각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 내년에 나가야지, 나가야지 하면서 똑같이 되갚아야지 라는 쓸데없는 고집에 벌써 3년을 버텨왔다. 어쩌면 후배들에게 보이는 모습은 내가 경멸하는 그들과 같을지도. 하여튼 이 놈의 동아리 회의를 위하여 점심으로 매점에서 간단하게 샌드위치나 하나 사 먹고 달려왔다. 동아리실에 들어서자 이미 원스텝은 지나갔다. 애써 만든 활기찬 분위기는 떠나갔다는 말이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으니 매일 앉던 자리에 앉아 의자를 돌리며 과자나 집어 먹고 있었다. 한참 동안 의자 돌리는 소리. 펜 탁탁 거리는 소리, 과자 먹는 소리 등의 잡스러운 소리만 들려오던 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하얀 문이 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마스크에 모자를 눌러쓴 한 남자가 숨을 허덕거리며 들어왔다. 기나긴 정적을 깬 그에게 모두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 죄송합니다. 잘못 들어왔네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는 뒷걸음질 치며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그는 내게 짧지만 강렬했던 첫 인상을 남기고 떠났다.

 

 

 

 얼굴을 모두 가려 눈을 제외하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살짝 보기에도 확실하게 눈은 틀림없는 미남이었다.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을 하였는지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그에 대한 관심이 쏟아졌다.

 

 

쟤 누군지 알아?”
.. 얼굴은 익숙한데 누군지 모르겠어.”

선배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애들 사이에서는 유명한가 보네. 왜지? 잘생겨서? 아니면.

 

매일 마스크 쓰고 다니는 선배로 유명하던데요. 방금 나타난 딱 저 모습. 여름이건, 겨울이던 간에 마스크에 모자는 어딜 가나 필수품.”
, 이제 기억났다. 쟤 패디과 아니야?”
어어. 맞아, 맞아. 패디과 3학년 김진우잖아. 조용한데 또 인기는 많은 싸가지.”

 

단지패디과 3학년 김진우라는 기본 정보만 주어졌을 뿐인데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모두들 그에 대해 아는 척을 해가며 한 마디씩 보탰다.

 

 

 

 

 

 패디과이면 수업 많이 겹칠 텐데. 공과 새내기 애들도 알 정도인데 왜 나는 모를까. 나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아는, 김진우라는 애에게 점점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주위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어느 날 복도를 지나던 중, 애타게 찾던 그 이름이 들려왔다.

 

 

진우야.”
?”

 

돌아보니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이 서있었다. 둘 다 익숙한 목소리. 분명 아는 사람들이다. 일단,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나 너,,”
선배. 그만.”

진우라 불려지는 남자가 선배로 보이는 여자에게 멈추라는 손짓을 한다.

 

저 가볼게요. 고마워요.”

 

그녀의 말에서 동사는 달랑 잘라버리고 진우는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 여자 선배는 진우와 반대로 걸어갔다. 나는 그의 뒤를 좇았다. 그는 1층으로 내려가 건물 주위를 잠시 서성이는 듯하다 곧이어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레 그의 옆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 오늘 피곤한데. 그런 작업 멘트 싫어요.”
자아도취에요? 사람 말도 다 안 듣고선 왜 내가 그 쪽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나 그쪽 안 좋아해요. 관심만 있을 뿐.”

 

싸가지라 하더니 싸가지 맞다. 자기 감정을 주위에서도 맞춰주기를 원하는 이기적인 싸가지.

 

자아도취 아니고요.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시길래 그렇게 생각했죠. 그리고 관심 꺼주세요. 아무랑도 잘해볼 생각 없으니까. 저 사랑 혐오해요. 마지막으로 저희 만난 적 없으니 가주세요. 아니면 그대로 앉아있으세요. 제가 갈게요.”
아니. 잠시 착각한 것 같은데 저희 만났었어요. 동아리실에서. D 207호 들어왔었죠?”
.”
봐봐요. 만났었다니까.”
그래서요?”

마스크와 모자로 자신의 모습을 감춘 것처럼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감추는 것 또한 매우 강해 보인다. 마치 깊은 상처가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친하게 지내요. 전 시각디자인 전공하고 있는 송민호라고 해요. , 참고로 동갑.”
. , 나에 대해 이미 잘 아는 거 같은데, 예의상 소개할게요. 패디과 김진우에요.”
말 편하게 해요.”
.”
“…
점심 먹었어?”
아니.”
먹으러 가자.”
싫어. 나 혼자 밥 먹는 거 좋아해.”
, 그럼 오늘부터 취향 바꾸면 되겠네.”
. 우리 오늘 처음 봤어.”
처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진우는 내게 져준다는 표정을 지으며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

 

 

 

 답답해 보이던 마스크를 벗자, 아 이래서 싸가지인데 인기가 많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봐도 잘생겼다. 지나가다가 뒤돌아볼 만큼. 내게도 그런데 여자들에게는 어떻게 보이겠는가. 그런데, 그런 외모로 사랑 혐오자라니. 꽁꽁 싸매고 다닐 만하다. 결국 강제적인 식사를 마치자, 잘 먹었다는 인사 한 마디와 함께 본인이 먹은 것만 계산하고 나갔다.

 

 

 

 

 

 

 진우가 나를 피할수록 더 붙잡고 싶었고, 친해지고 싶었다. 그냥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보고 싶었다.

 

 

 

 안녕.”

학교 근처 꽃집에서 장미를 손질하고 있는 진우를 만났다.

 

왜 왔어?”
그냥 지나가다가 예뻐서 들렸는데? 나 꽃 좋아해.”

거짓말처럼 들리더라도 사실이었다. 나는 꽃이 좋았다. 종별로 향이 다른 꽃이 매번 새로워 흥미가 생겼다.

 

. 나한테 볼일 있으면 저기 앉아서 기다려. 하던 일만 마무리 짓고 갈게.”

 

다행히 거절은 안 당했다. 매일 거절은 안하고 차갑기만 하다. 어찌됐건 싸가지에게도 착한 면도 있기는 한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내 앞에 앉았다.

 

 

나 왜 왔는지 안 궁금해?”
지나가다가 들렸다며. , 볼일 있다 했지? 뭐야?”
그냥 너랑 그때 이후에 한 번도 안 마주쳐서 오랜만에 이야기 좀 하려고. 잊은 건 아니지? 친하게 지내기로 한 거.”
. 그런데 이번엔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의외였다. 나를 완전히 잊고 산 줄 알았는데 그래도 잠깐이라도 내 생각을 하긴 했나 보다.

 

송민호, 너 어디 아파?”

깊게 찔러오는 한 마디에 잠시 머뭇거렸다. 대답하기 전에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라도 들어보고 싶었다.

 

?”
이거 말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는데. 몰라. 그냥 당사자가 너니까 다 말할게. 너도 솔직하게 말해줘.”

 

 사실 나 너 원래 알고 있었어.”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원래까지는 아니고, 그 때 처음 봤어. 너 헤어질 때.”

 

..

상대 족에서 네가 계속 자기 못 알아본다고 헤어지자 했었잖아.”

그랬지. 내가 사랑도 했었지.

 

그게 무슨 말이야? 사랑하는 사람을 못 알아본다는 게 말이 돼?”

 

 다 봤구나.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좋았었을 그 장면을 진우는 보고도 모르는 척 해왔던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녀와 공원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일이 생각보다 늦게 끝나 약속 시간보다 살짝 늦게 도착하였다. 그녀는 먼저 도착해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그녀의 뒤로 가 그녀의 목에 내 팔을 감았다. 하지만, 그만 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내가 팔을 감은 여자는 그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목격한 그녀는 나의 바람으로 생각하였다. 아무리 내 실수라고 설명을 하여도 믿기는커녕 더욱 화를 내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저질렀던 순간의 실수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야만 하였다.

 

 

김진우.”
.”
나 많이 아파.”
“…
어디.”
안면실인증 있어.”
?”
안면인식장애라고들 부르는 거.”
.”
그래서 나 친구도 없잖아. 간혹 가다가 친구도 못 알아보는 애랑 너라면 친구하고 싶겠어?”

혹여 그가 미안해할까 봐 약간의 진심이 섞인 농담을 던졌다. 사실 강인한 척, 괜찮은 척을 애써 해가며 내뱉은 말이었지만, 사실상 이별 통보였다.

 

 

.. 아니. 민호야, 그래도 나 너 친구잖아.”

내가 나의 비밀을 고백할 때면 모두의 반응은 같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나는 친구라고 항상 곁에 있을 거라며 든든하게 말해준다. 예의상. 이후엔 필요 없는 동정 섞인 위로를 한 마디씩 던지다가 결국 내 곁을 떠나버린다. 하지만, 진우는 나를 위로하려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
그렇지.”

 

고마웠다. 위로가 아닌 이해를 해주어서.

 

 

 

 

 

 

 더 이상의 질문보다는 그냥 그런 거라며 받아들여주던 진우의 모습에 자연스레 내 감정이 이끌려갔다. 분명 좋은 사람일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단 둘이 더 다양한 일들을 함께 해보고 싶었다. 나 자신 스스로에게 위로하는 법도 배우며 성장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리고 어딘지 모르겠지만 분명 상처가 있을 그 또한 치유해주고 싶었다. 그날따라 이런저런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그래서 그를 보기 위해 꽃집으로 향했다.

 

 

앉아있을게.”
.”

항상 그래왔듯 카운터 옆에 위치한 2인용 테이블에 앉아 그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오늘은 왜 왔어?”
그냥 너 보고 싶어서.”

아닌 것 같은데.”
맞아. 거짓말이야. 나 너한테 할 말 있어서 왔어.”
뭐야. 말해봐.”
진우야.”
“…
내가 뭐 도움 줄 거 있어?”
. 나랑 만나자.”
, ?”
만나자고. 진지하게. 나 너 좋아한다고.”
“…”
“…”

나 아직 너랑 그런 거 할 마음 없어. 미안해, 민호야. 우리 이렇게 만나는 것도 재밌잖아? 매일 이렇게 만나면 되지, ?”

 

진우는 마치 어린 아이를 달래듯 내 마음을 사양하였다. 너무 성급했던 것일까. 지금 이 상태 그대로도 너무 행복한데 도대체 어느 정도의 행복을 난 더 원했던 것일까. 그래. 내 병을 알고도 마음을 받아준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가 나를 처음 봤을 때처럼 그 또한 상처를 받을까 봐 두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사랑 혐오자였다. 나라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 갈게.”
.”

고마워. 짧지만 지나간 내 마음이 담긴 한 마디였다. 이 한 마디가 그에게 전하는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며 더 이상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자리를 떴다.

 

 

 

 

 

 

 살면서 처음으로 받아본 이해. 그게 진심이건 아니건 간에 잊혀질 수 없을 것이다. 병명을 진단받았을 때와 함께 내 인생에서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임은 틀림 없다. 그런 말을 내게 해준 진우 또한 그와 함께 잊혀질 수 없었다. 그렇게 말이라도 할 줄 아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으니까. 당연히 마음을 접어야 하겠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안녕.”

 

학교에서 진우와 마주치자 형식적인 인사를 하였다. 늘 그래왔듯 나는 혼자였고, 그는 여럿이었다. 그런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불편해서인지 나를 못 본채 하였다.

 

 

 

 

 

 

Pt.2

나팔꽃처럼

 

 

 

 

 

 

 나는 사랑 혐오자이다. 말 그대로 사랑을 매우 싫어한다. 사랑의 존재는 믿지만, 하고 싶지는 않다. 무엇이 됐건, 언제가 됐건 끝은 이별이기 때문에. 그 이별은 오랜 시간 너무 아프기에 싫다. 나와 항상 함께하는 마스크와 모자도 그 이유 때문이다. 사랑에 대해 논하고, 사랑 때문에 내가 흔들리는 것도, 그리고 남들이 나 때문에 흔들리는 것도 모두 다 싫다. 심할 때에는 사람들이 나에게 사랑이란 감정 조차 느껴주지 않았으면 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나에게 하는 사랑 고백에 대해 아무런 감정, 아무런 생각이 없다. 하지만, 민호는 달랐다. 그의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때와 다르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게 사랑이란 걸까. 사람들이 한평생 미처 살아가는. 살면서 한 번쯤 찾아온다던데 지금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나의 정체성에 대해 명확하게 해야 했다. 나는 지금껏 줄곧 나의 의지로, 나에 대한 내 생각만으로 스물 그리고 몇 해를 사랑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 내가 만난지 몇 달밖에 안된 동성에게 흔들리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잘 지워지지 않았다. 영화, 드라마, 소설 속에서나 봤던 바로는 사랑은 내 의지만으로 쉽게 잊을 수 없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하지만, 흔들리면 안됐다. 더는, 더 이상은. 그 이후의 일은 장담할 수 없었기에.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내가 고안해낸 방법은 나의 트레이드 마크로 꼽히는 마스크와 모자를 벗어 버리는 것. 그 외에도 나의 스타일을 바꿔 버리는 것. 그렇게 하면 사람을 스타일로 알아본다는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아서라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수년간 고수해왔던 스타일을 바꾸었다. 우려했던 바와 달리 주변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사람이 한층 밝아 보인다, 얼굴이 보이니 훤하게 얼마나 좋냐 등등.

 

 

 

 

 

 

 이후, 민호를 단 한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니면 그가 나를 못 알아봤던 것일 것. 하여튼 그가 내게 건네는 인사는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안녕.”

 

 

오랜만에 들려오는 민호의 목소리. 안부를 묻는 그의 말에 나는 차마 안녕이라 답할 수 없었다.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것이었다. 나는 안녕하지 못했으니까. 겉으로는 전보다 괜찮아 보였지만, 그 모든 건 괜찮지 않은 나의 모습을 감추기 위함이었으니까.

 

 

 

거기로 와.”

 

거기’. 알아듣기 힘들 법도 했지만, 민호가 생각한 곳과 내가 생각한 곳은 다행히도 일치하였다.

 

 

왜 불렀어? 너 나 목적 없이 안 부르잖아.”

 

맞는 말이다. 난 목적 없이 사람을 부르지 않는다.

 

할 말 해봐. 다 들어줄게.”
“…
너 나 그만 좋아해.”
싫어.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잖아. 네가 굳이 간섭할 일은 아니잖아? 아무리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도 선은 지켜줬으면 좋겠는데.”
간섭할 일이야. 굳이 이렇게 말해야 돼? 네가 나한테 관심 가지는 거 싫다고. 불편하다고.”

 

말을 다 하고 나서야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강하게 말할 일은 아니었는데. 충분히 부드럽게 말해도 되는 일이었는데.

 

왜 내가 불편해?”

 

전보다 한 톤 낮아진 목소리로 민호가 물어왔다.

 

네가 나만 알아보는 게 싫어. 왜 그게 하필 나야?”
그건..”
너 전여친 못 알아봐서 헤어졌잖아. 그 정도인데 왜 나만 알아봐?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건,, 너한테는 특별한 향이 나.”
“…”
나 꽃 좋아한다고 말했었지? 그래서 향도 잘 아는 편이야. 너희는 사람 얼굴로 알아보겠지만, 나는 그게 안돼서 다른 것들에 더 민감해져. 그 중 하나가 향이고.”

사과해야 할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또다시 잘못 건드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너한테는 꽃 향이 난다고. 섬유유연제에서 인공적으로 만든 향과 다른 흔치 않은 순수한 향. 그래서 너 알아봐.”

날 알아봐주는 사람에게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 전애인 이야기까지 꺼내가면서 나는 도대체 그에게 무얼 바랬던 걸까. 이미 늦어버린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네 향이 바뀌더라도 난 너 알아볼 거야. 난 너 계속 좋아할 거니까 인사 안받아줘도 돼.”

미안했다. 민호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민호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알게 된 후,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 스스로만 너무 보호하려 하며 정작 주위에는 내가 받을 상처까지 되로 주지는 않았나. 나에 대해 반성하는 과정에서 나의 생각은 변화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과정이 행복하다면, 이후에 맞이하게 되는 이별 정도는 아파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 또한 사랑의 일부일 거라며. 그런 생각이 든 이후에 내가 처음으로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은 단 한 사람. 나를 변화하게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나는 예전처럼 돌아갔다.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더는 사랑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랑을 하고 싶어서였다. 이렇게 돌아다니면 민호가 멀리서도 나를 쉽게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나는 민호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강의실 앞에서 기다렸다. 수업이 끝나고 민호가 나오자, 그가 먼저 인사하기 전에 이번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냈다.

 

 

송민호. 안녕.”




Written By. 시나 (Twitter Account : @_sssiinaa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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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페토, 그 인형사에 대하여. (Written by. MTR)
2018. 10. 26. 23:13

고마웠어요, 제페토. 우린 이제 안녕이에요.

 

인형은 조용한 목소리로 안녕을 고했다. 달빛을 제 안경에 머금은 채로 잠이 든 인형사는 인형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인형은 아직 뻣뻣함이 남아있는 손가락을 옮겨 인형사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보았다. 사람의 체온과는 확연하게 다를 인형의 도자기 같은 촉감에도 인형사는 전혀 눈을 뜨지 않았다. 인형사의 안경에 머금어진 채로 빛을 발하던 달빛은 인형의 피부에도 이내 고이 스며들었다. 인형사가 어떤 꿈을 꾸는지, 인형은 도자기같이 텅 빈 제 머리로 생각해보려 하였지만 아무런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 그렇기에 인형사와 저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인형은 조심스럽게 차가운 제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인형사와 같은 것은 그곳에 없었다. 그렇기에 인형은 인형사를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형사가 걸어준 마법으로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인형은 그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인형사는 솜씨 좋은 장인이며 또한 마법사였다. 인형은 인형사에게서 생명을 받아 걸을 수 있고 먹을 수 있었으며 앞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런 솜씨 좋기로 소문난 인형사임에도 불구하고 인형에게 줄 수 없었던 것이 딱 두 가지가 있었다.

 

타인에 대한 마음. 공감.

 

인형은 그래서 저는 공감할 수 없는 인형사를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제페토, 그 인형사에 대하여.




 

w. MTR




 

어느 숲속에 처량하게도 홀로 지어진 통나무집. 그곳에서 쉴 새 없이 망치질 소리와 무언가 잘라내는 것 같은 톱질하는 소리, 그리고 뚜닥뚜닥 조립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숲속에 놀러 왔던 참새들은 그 소리에 지레 겁을 먹고 무리를 지어 하늘을 향해 사라졌다. 집의 주인은 마지막 조립 공정에 있었다. 도자기 안에 붉은 루비로 만든 하트 모양의 핵을 넣었다. 그 공정까지 마치고 나서 곱게 싸둔 비단을 열었다. 그 틈새에서 보인 것은 마치 흑요석과도 같은 두 개의 보석이었다. 양쪽의 모양을 얄미울 정도로 똑같이 재단한 보석. 남자는 그것을 쪼개어진 도자기의 안에 고정하였고, 마지막으로 고운 뚜껑을 덮었다. 똘망하게 보이는 두 개의 보석이 저를 마주 보는 것에 남자는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이것은, 제가 창조했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피조물이었다. 이것이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남자는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길을 걸어왔다.

 

작은 주머니를 꺼내 이윽고 고운 별이 인형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하얗고 창백하기만 하던 관절에 힘이 실렸고, 반들반들하던 도자기에는 인간의 그것과도 같은 머리칼이 돋아났다. 그저 창백하던 왼쪽 가슴 안쪽에 투명하게 발간빛이 떠올랐다. 루비의 빛이었다. 보석이 박힌 위에는 속눈썹이 돋았고 입술에도 색이 돌았다. 남자는 그것이 퍽이나 만족스러웠다. 이 작업을 위해 죄 없는 팅커벨의 목숨을 몇이나 빼앗았던가. 아마 저는 죽으면 지옥에 가리라,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남자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후세계 따위, 쌀 한 톨 만큼도 중요하지 않았다. 제가 사는 세계 외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제페토.”

 

이윽고 인형은 띄엄띄엄 입술을 열어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제페토. 그렇게 이야기하자 남자는 조용히 인형을 마주 보았다. 제가 창조하였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피조물. 세상의 잘못된 부분은 단 하나도 머릿속에 담고 있지 않을 피조물. 제페토는 살며시 두 팔을 벌렸다. 인형은 이내 활짝 웃으며 제페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제페토는 인형을 더욱 끌어안았고 차가운 도자기와도 같던 피부 곳곳에는 제페토의 온기가 스며들었다. 인형은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한 관절을 조금 더 펼쳐내었고, 제페토의 체온을 더욱 가져오려고 하는 것처럼 양껏 저와는 다른 피부를 끌어안았다.

 

제페토.”

“...그래.”

제페토, 제페토.”

 

내 이름은 뭔가요? 인형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제페토에게 속삭였고, 제페토는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은 인형의 넓적다리 안을 그윽하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인형의 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진우.

 

그렇게 이야기하면 인형은 제페토의 목을 안은 채로 웃음을 울렸다.

 

 

**

 

 

민호, 제페토는 무엇보다도 제 창조물을 아끼는 남자였다. 물론 제페토의 그러한 성미의 뒤에는 창작가가 지녀 마땅한 자존심과 제가 지닌 콧대 높은 자신감이 뭉뚱그려 섞여서 나타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인형, 진우는 제페토의 자존심과 자신감의 피조물이었다. 제페토는 진우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었고 창조해낸 신이었다. 진우는 제페토의 말이라면 제 눈을 뽑을 정도로 신뢰하고 있었고, 제페토 역시 그가 저를 신뢰하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렴. 제페토, 제페토는 창조주였으니 말이다. 진우는 제페토에게 받는 것은 그 무엇도 거절하지 않았다. 제페토는 진우에게 있어서 고통이기도 하였고 애정이기도 하였다.

 

“...진우.”

 

오늘도 무언가 한참 나무토막과 씨름을 하는 제페토의 옆에 붙어있는 진우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거리만큼은 붙어있다고 서술하여도 실질적으로 온전하게 다리를 땅에 붙이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제페토는 얄팍한 나무토막을 연신 대패로 갈아내고 있었으며 진우는 그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였다. 깨질 것 같은 도자기 재질의 피부에 로프가 파고드는 일은 없었지만, 자칫 잘못 풀리기라도 하여 땅에 떨어지는 날에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라는 것을 진우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제페토는 짧은 머리에 내려앉은 톱밥을 대충 털어내고 눈에 쓰고 있던 유리막을 벗었다. 진우, 라고 이름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어설프게 로프에 매달린 채 제페토의 머리 위를 오가고 있었다.

 

제페, .”

왜 그러니.”

... 파요.”

아프니?”

 

끄덕. 비록 진우가 살에 파고드는 아픔이야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민호, 제페토의 마법에 걸려있는 탓에 인간과 비슷한 성질을 띄우고 있는 그에게 중력에 의해 땅으로 꺼지는 것과 비슷한 감각과 도자기에 스치는 로프의 느낌은 아픔을 전해주고 있었다. 제페토가 그를 부러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아 둔 것은 아니었다. 궁극적인 제페토로서의 목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창조주로서 기꺼이 제 창조물을 실험대에 오르게 한 것이었다. 한가지는 성공했다. 제페토는 다시 유리막을 씌우고 대패질에 열중했다.

 

머리가 아... 아파요.”

그래.”

그리고, 자꾸... 깨질 것 같아요. 제페토, 제페토.”

깨져도 다시 고쳐준다는 것을 알고 있잖니.”

아파, 아파. 아파.”

괜찮아.”

 

붉은 로프에 매달린 채로 천장-정확히는 제페토의 머리 위-를 유영하던 진우는 참으로도 인내심이 약했다. 제페토는 진우가 금방이라도 우는 소리를 울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법을 걸어 진우를 창조하는 동안에 뿌린 팅커벨의 가루가 유달리 버릇이 좋지 않은 개체에서 수확한 탓인지, 아니면 그저 제페토가 끌어낸 또 하나의 성과로서 진우만의 성격을 가진 것인지 제페토는 거기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진우의 곧게 뻗은 다리가 제페토의 머리를 스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스치면 혼난다. 그것에 연계되는 행동을 진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여서 제 몸이 의지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 잘 뻗은 하얀 다리가 제페토의 머리꼭지 위를 스쳤다.

 

민호.”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니, 진우.”

아파요. 싫어... . 그만하고 싶어요.”

그만하고 싶다고 해도 널 도와줄 수 없단다. 알고 있잖니.”

제페토는 왜, . 바빠요? 진우는 아파요. 어서 풀어주지 않으면 내려가서 장난칠 거에요.”

“...아직 버릇이 좋지 않은 모양이구나.”

제페토.”

 

제페토는 진우의 입에서 제 본명이 나올 때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저는 제페토의 의지를 승계하는 사람일 뿐, 인간의 이름은 버린 것이 오래전 일이거늘 말썽꾸러기 인형은 제멋대로 온 공방을 뒤집고 다니다가 제페토의 이름을 알아버린 것이다. 선대 제페토와 사진을 찍은 어린 시절의 지금의 제페토’. 그 사진 뒤에는 선대 제페토의 이름과 민호라는 지금의 제페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 사진을 찍은 줄도 몰랐는데 말이다. 사진을 다 보지도 않고 제페토는 그것을 수납하였고, 말썽꾸러기 인형은 그날도 오늘처럼 로프에 대롱대롱 매달려 제페토의 작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두 발을 마루에 내릴 수가 없었다. 제페토오. 어리고 뭉뚱그린 발음이 제페토의 귀를 스쳤다.

 

제페, . 제페토오. 제페토...”

왜 그러니.”

내려가서 제페토랑 예쁜 일 하고 싶, 싶어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단다.”

 

참새도 아직 울고 해도 반짝이고 있잖니. 제페토의 말에 진우는 기어코 울상을 짓고야 말았다. 제페토는 쉽사리 말을 들어주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진우는 제 창조주에게 가르침을 받은 대로 예쁜 일을 하고 싶다며 색이 담긴 말을 던졌지만, 대패질에 열중한 제페토는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음이 분명했다. , 페토오. 그렇게 진우가 다시 불렀다. 고운 발가락 끝이 다시 제페토의 머리칼과 머리꼭지를 골고루도 스쳤다. 제페토는 그런 부름에도 결코 응답하는 일이 없었다. 마지막 대패질이 끝나고 우둘투둘하던 나무토막은 반듯한 모양새를 갖추었을 때, 툭 하고 바닥에 손가락이 떨어졌다. 아아.

 

“...깨졌구나.”

제페토가, 풀어주지 않... 으니까. 손가락이.”

 

저 홀로 로프를 풀어보려 애를 쓰던 진우는 제 손가락을 부러트리고야 말았다. 둥그런 관절이 달린 손가락이 떨어진 것에 제페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도자기를 들었고 깨진 부위를 살펴보았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손톱 끝과도 같은 부위에 금이 들었다. 버릇이 좋지 않은 인형이었다. 제페토는 검지를 잃은 진우의 왼손을 낚아챘다. 구멍이 뻥 뚫린 마지막 관절 사이로 텅 빈 진우의 몸속이 그대로 내비쳤다. 역시나 아직 햇빛이 쨍한 오후였다. 손가락 끝까지 제대로 /부품/을 채워 넣을 것을 그랬다. 텅 빈 모양새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에 제페토는 제가 진우를 창조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금이 간 손가락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완벽에 가까워야 하는 제 창조물이 아니던가. 진우의 몸에서 떨어진 것은 절대 손가락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 아니었다. /부속품/. /부품/. 그것을 공방 탁자 옆의 쓰레기통에 던진 제페토는 물레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진우를 내렸다.

 

손가락, 만들러 가야지.”

제페토, 아파요. 제페토.”

아픈 것도 고치자꾸나.”

 

끄덕. 제페토의 말에 진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

 

 

인형사에서 멀어진 인형은 신발이 벗겨질 것처럼 숲길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인형사가 눈을 뜨기 전에 최대한 멀리 멀어져야 했다. 인형사가 원하는 것을 인형은 줄 수 없다. 이루어줄 수 없다. 그것을 눈치챈 것이 조금 더 이른 시일이었다면 돌에 머리라도 박아서 제 핵을 모두 깨부술 수 있었을 텐데. 인형사를 앞에 두고 그것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인형사가 갓 저를 만든 때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인형은 인형사와 지내는 동안 인간의 감정을 터득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터득과 그 마음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은 달랐다. 인형이 아무리 힘을 써도 인형사 그 자체, 전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인형은 계속해서 숲길을 내달렸다. 인형의 왼쪽 가슴에 박혀있는 루비가 쉴 새 없이 펌프질하며 그 속도를 올렸다. 신발이 벗겨지면 발에 흠집이 생길 것이다. 더는 제 몸을 고쳐줄 인형사는 곁에 없을 것이다. 숲을 막고 있는 나뭇가지에 옷가지가 걸렸다. 이러다가 몸에 흠집이라도 나면 더는 고쳐줄 인형사가 없다. 인형은 달리는 사이사이에도 그것을 주의했지만, 옷가지는 더욱 너덜너덜하게 찢겼다. 그럴수록 날카로운 나뭇가지는 인형의 도자기 같은 피부에 흠집을 남겼다. 말랑말랑하게 변화한 피부는 스칠 적마다 아팠다. 그것에 왼쪽 가슴의 루비가 더욱 빛을 발했다.

 

 

**

 

 

먹을 수 있겠니?”

“...다시 넘칠 것 같아요.”

이제 먹을 수 있을 때도 된 것 같은데 말이다.”

 

제페토는 침대 옆에 비스듬하게 서서 우유가 가득 들어있는 컵을 진우에게 건네고 그 모습을 관찰하였다. 몇 모금인가 마시던 진우는 이내 입을 틀어막았다. 액체가 텅 빈 몸을 가로지르고 들어가 역류할 것만 같았다. 안에 들어있는 사람의 내장을 꼭 틀어박은 /부품/들은 생각보다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진우는 제페토가 창조한 지 두 달이 넘도록 우유조차 소화를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 이전에 창조한 인형은 어떠하였던가. 제페토의 손을 거친 인형들은 완벽하게 /부품/들을 가동할 수 있었지만, 진우는 여즉 제대로 가동할 수 있는 /부품/의 수가 아주 적었다. 제페토는 작게 고개를 젓곤 이윽고 억류하기 시작한 우유가 진우의 입을 타고 오르는 것을 보고 침대 시트로 그대로 닦아냈다. 진우는 영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진우의 입을 막은 손. 왼손 검지는 다시 돌아와 있었다. 완벽하게 안에 뼈대라는 이름의 /부품/들을 채워 넣어 제페토가 창조해낸 그것은 그 전에 진우의 몸에 달려있던 /부품/보다 튼튼했고, 무게감이 있었다. 제페토는 본인이 만든 창조물의 무게감에 대하여 어젯밤에 진득하게 탐닉한 참이었지만, 입가에 그득하게 우유를 물고 있는 진우를 보면 역으로 제 아랫도리에 묵직한 무게감이 가는 것을 느꼈다.

 

제페토.”

왜 그러니.”

간지러워요.”

어디가 말이니.”

여기요.”

 

제페토의 물음에 간지럽다며 감각 이상을 호소하던 진우는 입을 가렸던 시트를 치우고 아침 햇살에 맨몸을 드러냈다. 사람의 관절이 있어야 할 곳에 진우는 제페토가 창조해낸 둥그런 /부품/을 달고 있었다. 그것은 확연하게 이음새가 삐걱거리며 간혹 틈이 보였고, 맘만 먹는다면 떨어져 굴러다닐 수도 있을 정도였다. 진우가 가려움증을 호소한 것은 무릎 안쪽 /부품/이었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그 부위는 오금에 해당하는 곳이었기에 제페토는 마찬가지로 둥근 /부품/이 끼워진 발목을 들어 안쪽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기적이었다. 둥근 /부품/의 이음새가 주변과 융화되어 가는 것처럼 경계선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하나의 /부품/이 아니라 진우의 무릎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간지러워요, 제페토. 다시금 감각 이상을 느낀 진우의 칭얼거림에 제페토는 양다리를 넓게 벌려 둥근 /부품/이 자리하고 있는 모든 곳을 살펴보았다. 오른쪽 무릎 안도 마찬가지였고 제페토의 손에 잡힌 발목도 그러하였다. 모조리 이음새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러운 모양새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넓게 벌린 허벅지의 안쪽, 사타구니로 이어지는 그 /부품/도 그러하였다. 제페토는 손을 들어 그 이음새들을 쓸어보았다. 단단하던 감촉이 조금 말랑하게 변화하였다. 무심코 제페토는 진우의 발목을 세게 쥐었다.

 

가려워요. 간지러워요, 제페토.”

“...”

민호.”

“...”

민호, . 민호.”

 

경이로웠다. 동시에 분노하였다. 우유도 제대로 소화도 시키지 못하는 주제에 진우의 몸은 착실하게 인간을 향해 변화하고 있었다. 이음새라는 이음새는 모조리 부드럽고 말랑해지고 있다. 제페토는 제 두 다리로 진우의 무릎을 닫지 못하게 고정하고 팔목을 쥐었다. 가까이 끌어당겼다. 도자기를 살펴보면 단단하고 매끈한 특유의 촉감이 아닌, 가벼운 해면체가 아래에 틀어박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페토는 진우의 왼쪽 가슴으로 시선을 돌렸다. 루비는 빛을 발하며 진우가 아픔을 호소할 적마다 붉은빛을 더욱 뿜어냈다. 그럼에도 제페토는 진우의 팔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밤중에 제가 마음껏 탐하였던 입구로 손을 향하게 했다. 그곳은 처음부터 제페토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유달리 힘껏 마법을 걸었었다. 입구 양쪽을 손가락으로 벌려내면 그득하게 제페토의 흔적이 흘러나왔다. 이곳도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것인가. 질퍽하게 내뱉어진 액체들을 제페토는 제 손가락에 휘감아 다시 그 입구를 탐하였다. 진우는 온 관절에 달려오는 감각 이상과 밀고 들어오는 익숙한 손가락에 신음하였다. 무게감이 진득하게 붙은 손가락이 제페토의 등을 감싸려 하였지만, 그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 완벽해지렴.”

, . . , 제페. , 민호. 민호오.”

그래.”

! , 민호... , ! 더어.”

욕심이 많구나.”

 

어쩜 인간의 감각(感覺)에는 그리도 민감한 주제에 감정(感情)은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냐. 제페토는 제 손에 신음하며 달뜬 얼굴을 내비치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려 왼쪽 심장을 지긋하게 노려보았다. 붉은빛의 루비를 비추어내는 도자기 같은 피부. 매끈하지만 확연하게 조금 더 말랑해진 위에 귀를 올려도 심장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제 한계였다. 얼마나 많은 팅커벨이 그 심장 소리를 위하여 희생되었는가. 눈앞에서 날개가 찢겨 비명조차 울리지 못하던 제페토의 손바닥 정도 크기의 생명. 불씨가 꺼지는 촉감. 제페토는 그것을 모두 기억하여 그 생명력을 인형이 이어 받아주길 바라였지만,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단 한 번도 심장의 울림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제가 만든 피조물 중에서 제일 많은 팅커벨을 쏟아부은 피조물이었다.

 

우유도 소화하지 못하는 주제에. 인간의 온기를 지니려고 하고.

소화하지 못한 우유는 전부 토해내고, 제가 부어준 정액마저 새어 나오게야 만들면서.

기분이 좋거나 달뜬 표정은 지을 줄은 알지만,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러나 제페토는 분노와 함께 느끼는 경이로움이 훨씬 크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제페토는 창조주로서는 그 누구보다 높은 긍지를 가지고 있는 자였다. 화가 나면서도 진우의 변화에는 기쁨이 밀려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제가 창조하였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환희가 차올랐다. 그 환희라는 것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부류의 감동이었다. 오로지 진우를 통해서만 느낄 수가 있었다. 제페토는 무게감이 차오른 제 해면체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우의 안으로 밀어 넣을 결심을 하였다. 그러자, 할딱거리던 달뜬 얼굴이 제페토의 손목을 잡았다. 제페토, 민호.

 

왜 그러니.”

“...뜨겁게, 하고. ... 뜨겁게, 하고 넣어야... 하응! , 해요...”

네 구멍은 뜨거운데 말이지. 더 뜨겁게 하면, 화상을 입힐 셈이니?”

, ! !! 민호, !! 민호오. 아응! ! !!”

기분이 좋으면 더 뜨거운 것 같구나. 좋은 방법이라도 있니?”

 

쿨쩍거리며 진우의 안을 유영하는 손가락. 제페토의 물음에 진우는 신음하며 제 머리 근처로 손을 뻗었다. 밤이면 제페토를 위하여 진우가 마련하는 것이 있었다. 도자기처럼 차갑고, 달궈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제 몸을 온전하게 열기 위한 것. 제페토에게서 훈련받은 진우의 방법. 떨리는 손으로 머리맡에서 빛이 나는 작은 유리병을 들었다. 꼭 시험관처럼 생긴 그것은 끝에 코르크 마개가 달려있었다. 코르크 마개를 제거하자 맑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고, 진우는 이윽고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는 그것을 제 손가락에 몽땅 감아내었다. 새로 만든 /부품/은 하얗게 움직이며 제페토의 손가락이 침범한 곳을 어루만졌다.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는 성분. 제페토는 그것이 닿은 제 손가락에도 열이 후끈하게 퍼지는 느낌이 들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드니?”

, . 네에. 마음에, 들어. 좋아.”

 

거짓말. 너는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마음에 든다는 표현을 쓸 수가 있어. 제페토의 중지와 검지가 진우의 검지/부품/과 중지/부품/을 함께 감아냈다. 진우의 손가락도 슬며시 열이 오르는 것이 역시나 제페토가 수확한 이 물건은 효과가 좋았다. 모두 합쳐서 네 개. 가느다랗고 하얀 도자기 같은 진우의 손가락과는 다르게 마디마디가 굵어 일의 굳은살이 잔뜩 박인 제페토의 손가락은 흥분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제페토가 감각에 열중할수록 진우는 그보다 더 열중하였다. 아무렴, 제가 신뢰하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제페토가 들어올 곳이다. 그렇다면 열심히 해야 한다. 제페토가 뜨거움을 느껴야 하고, 저도 뜨거움을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솟구치는 것이 사고회로에서 오는 탓인지 아니면 제가 온전하게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인지 진우는 알 수가 없었다. 제페토로서도 알 수 없는 부분이 아니었는가. 피조물인 제가 고민해도 도출할 수 없는 결론과도 같았다.

 

들어가자. 넓게 벌려보렴.”

, . 제페토. ! 민호. 민호...”

 

들어와 주세요. 어서. 쾌락과 아픔의 감각을 느낄 줄 아는 진우는 제 두 다리를 넓게 벌려냈다. 번들하게 젖은, 은은하게 빛을 내뿜는 새하얗고 고운 피부 결. 제페토는 제 마음에 깃드는 것이 소유욕과 함께 오는 실험체를 향한 애정임을 잘 알고 있었다. 진우의 무릎 안쪽의 이음새는 더욱 보드랍게 합쳐져 있었고 시선이 닿는 구멍은 달큰하게 빛나는 액체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보고 있자면 군침이 돌았다. 완벽한 피조물. 그러나, 마음과 이해가 없는 피조물. 그래도 이 상황에서 다른 것은 필요가 없었다.

 

제페토는 곧 저의 일어난 성기를 가져와 구멍 위를 문질렀다. 그것에도 기대하기 시작한 입구는 더욱 벌름거리는 것이다. 흘끔 시선을 바꾸면 보드라워진 아랫배가 진우의 호흡에 맞춰 달싹이는 것이 보였다. 역시, 호흡을 할 줄 아는 인형이 못하는 인형보다 나았다. 이제 기억 저편으로 흐릿할 첫 인형의 얼굴을 잠시 떠올렸다가 보드라운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진우. 그렇게 부르면 두 개의 까만 보석이 저를 보았다. 인간의 눈동자와 참으로 닮아있는 /부품/.

 

잘 먹을 수 있겠지?”

, . 네에에. . 아흐... 으응, ... 민호오.”

 

잘 먹네. 좋아. 잘하는구나. 제페토는 공을 들이는 것처럼 매끈한 도자기의 안을 꿰뚫었다. 정성을 담은 /부품/은 먹음직스럽게도 삼켜내며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쾌감으로 바꾸었다. 쾌감을 정의하자면 감정으로 이어져야 할까, 아니면 그것을 마음에 드는 표현으로 받아 진우에게 가르쳐야 할까. 연신 좋아, 더어, 제페토, 민호. 네 가지의 단어를 제외하고는 다른 단어를 뱉을 줄을 모르는 진우에게 제페토는 계속해서 학구열이 들었다. 어디가 좋니, 하고 제페토가 물으면 진우는 저의 벌린 다리를 스스럼없이 내보이며 서툴게 /부품/의 명칭을 내뱉었다. 제페토가 삽입 중인 성기의 이름을 먼저 뱉으며 좋으냐 물으면 진우는 마찬가지로 성기를 머금은 /부품/을 내보이며 끄덕였다. 참으로도 뜨거운 /부품/이었다. 녹을 것 같고, 또한 녹아버렸다. 정신없이 그 안을 쳐올렸다. 완벽한 창조물이자 완벽한 (---)이었다.

 

제페토, 제페토.

그래.

민호, . 민호. , 으응! , 민호.

그래, 진우. 조금 더.

 

제페토는 상냥하게 진우를 보듬어 안았다. 제 창조물의 안에 울컥거리며 정액을 모조리 내보내고 뽑아내자 빛나는 액체가 섞여 흘러내렸다. 아침부터 잔뜩 제페토를 머금은 진우는 팔딱거리며 제 절정을 마무리하자 바로 까무러치듯 하얀 시트 위로 흩어졌다.

 

왼쪽 가슴은 고동이라도 울리는 것처럼 끊임없이 빛이 들고 있었다.

꺼지지 않을 것만 같은 불빛이었다.

 

 

**

 

 

인형은 어느 작은 바위틈에 와서야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인형사는 쫓아오지 않았다. 인형은 한숨을 돌리는 것처럼 숨을 내쉬었다. 문득 궁금해진 인형은 자신의 옷을 들춰 왼쪽 가슴 위를 내려다보았다. 인형사가 고이 남겨둔 흔적은 인형의 몸에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옅은 도자기 아래로는 쉴 새 없이 점멸을 반복하는 루비의 붉은 빛이 보였다. 인형은 군데군데 찢어진 옷가지를 더욱 동여매었다. 혹여라도 그 빛이 새어나간다면 인형은 자기가 있는 이 바위틈을 인형사에 들킬 것만 같았다. 초조함이었다.

 

인형사와 지내던 시간이 괴로웠거나 힘들었던 것이 아니다. 인형이 고른 것은 조금이라도 더욱 인형사를 이해해보려고 하는 노력에서였다. 인형사를 향해 품었던 이것이 인형사가 그렇게도 인형에게 주고 싶어 하던 마음이라는 이름의 물건인지 아니면 단순히 인형사가 걸어둔 마법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인형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인형사의 생각으로 인형이 작은 머리를 가득 채울 때면 신비하게도 루비는 더욱 빛을 발했다. 들킬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인형사를 향한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인형은 더욱 바위틈으로 제 몸을 욱여넣었다. 새벽 동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늑대의 울음소리가 처량하게도 들렸다.

 

 

**

 

 

제페토, 민호가 진우의 부재를 눈치챈 것은 눈을 뜨고 난 후였다.

 

작업해야 할 많은 일들. 목재 사이. 책상 앞에 앉기 전에는 맘껏 진우를 탐하였고, 그 후에 까무룩 기절하듯 눈을 감은 진우를 두고 일에 열중한 것이다. 그러나, 눈을 뜨고 나면 진우는 사라졌었다. 처음에는 잠깐 집 근처로 나갔을 것이리라 생각하였다. 그것이 이변에 가까운 일임을 민호가 알아채게 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진우는 모르고 민호는 아는 것이 민호에게는 존재했다.

 

민호의 손에는 두 개의 /부품/이 들려있었다. 하나는 진우와의 거리에 따라 색이 변화하는 장미 모양의 보석, 그리고 진우의 왼쪽 가슴에 박혀있는 것과 같은 붉은 루비였다.

 

그것은 제 창조물과 저의 거리감을 나타내는 것과 같았다. 멀고 멀수록 보랏빛 빛을 머금었고 가까울수록 파란빛을 머금었다. 민호는 그저 마치 제 색이 보라색의 자수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빛을 발하는 장미를 손에 꾹 쥐었다. 장미의 색색에 따라 진우와의 거리를 표현하고자 한 것은 민호 자신이었다. 그딴 시답잖은 마법에 제 목숨을 사용하는 것이냐며 코웃음을 치던 팅커벨의 표정이 뇌리를 가득 채우는 것에 민호는 미간을 찡그렸다. 얼마나 멀리 간 것일까. 혹여, 달아나다가 숲 깊은 곳에 사는 늑대에게 잡아 먹히거나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잡혔다면 붉은 루비의 빛이 멈췄을 것이다. 붉은 루비는 빠른 속도로 빛을 내지도 않고 은은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루비는 진우의 심장과도 같았다. 그것은 민호가 제일 공을 들여 마법을 걸은 /부품/이었다.

 

진우는 어떤 생각으로 늘 제가 하는 모든 것을 흡수하였을까. 문득 진우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제페토의 창조물인 인형이 마음을 품었으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아 이내 포기하고 조용히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진우가 무언가를 원하고 도망을 갔을 것이리라. 그렇다면, 깃든 것은 무엇일까. 인형사 제페토로서의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진우를 만나서 물어본다면 답을 도출할 수 있을까. 그러나, 민호의 손에 잡힌 장미는 여전히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조금도 파란 빛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진우.”

 

이름을 부르면 멀리서도 달려왔었다. 옆에 앉아있기도 했으며 /부품/의 내구성을 보아야 한다는 말에는 천장에 매달려 대롱대롱 다리를 흔들기도 했었다. 민호는 그때야 본인의 심리가 조금 궁금해졌다. 저는 진우를 제페토로서 인형으로 대우하였는가, 아니면 민호로서 진우를 대우하였는가. 인형은 창조물일 뿐이고 몸을 채우고 있는 것은 모두 제가 만든 /부품/이다. 마법을 걸어 보고 듣고 말하며 의지를 갖고 오감을 선물하여 인간과 비슷하게 만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인형이다. ‘인형일 터였다.

 

민호는 손을 열어 붉게 점멸하는 루비와 보랏빛의 장미를 바라보았다. 단 하나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있었다.

 

저는 인간이었으며, ‘진우를 대하였다.

인간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진우에게 인간이기를 바라였다.

 

인형사 제페토, 민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참새가 지저귐을 멈추지 않는 오후였다.

 

 

**

 

 

[우습네. 고작 인간 따위가 마법을 손에 넣기 위해서 우리를 수도 없이 죽인 주제에.]

[학살이었지, 학살. 그것이 과연 온전할까?]

 

웅성거리며 날아다니는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팅커벨의 무리는 숲을 뛰어다니며 벅찬 호흡을 올리는 제페토, 민호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팅커벨들에게 있어 민호는 학살자에 불과하였다. 하등 인간 따위가 마법을 위하여. 그것도 온전하지 못한 인형을 위하여.

 

[찾을 수 있을까?]

[그 아이는 이미 없을지도 몰라. 가련하기도 해라. 땀이라도 닦아줄까?]

[아서라, 또 잡히기라도 하면?]

[더 달리다가 쓰러지면 우리가 사지를 잘라줄까?]

 

깔깔거리며 팅커벨의 무리는 웃었다. 소리높여 웃었다. 이제 새소리는 더욱 들리지 않는 깊은 숲, 민호는 들려오는 팅커벨의 무리가 비아냥거리는 소리에도 이를 악물고 보석을 손에 쥐고 달리고 또 달렸다. 이것은 본인이 치러야 할 죄였으며 그동안 샀던 미움이었다. 얼마나 총명한 팅커벨의 무리던가. 사지를 자르겠다며 입을 열고 깔깔거리는 소리. 머리가 어지러운 것은 팅커벨들의 날갯짓 소리의 영향이었다.

 

그 팅커벨의 무리를 모조리 잡아다가 죽이겠다던가 다시 마법을 걸 소재를 찾는다던가 하는 생각은 민호에게 들지 않았다. 오로지 찾아야 할 것은, 목표는 단 하나였다.

 

땀이 그득하게 올라온 민호의 손에 쥐어진 장미가 파란빛을 내뿜었다.

 

 

**

 

 

그즈음에 한 마리 다가온 날갯짓이 있었다. 그 형태는 손바닥보다 조금 더 작은 형태였다. 그 날갯짓은 민호의 곁을 몇 번인가 맴돌았고 꼭 이끌리기라도 하듯 그 빛과 함께 바위틈의 동굴로 민호는 걷고 또 걸었다. 뚝뚝 석회질이 동굴의 천장에서 이어진 푸른 빛의 종유석의 끝에 맺혔다가 뚝 떨어졌다. 그 소리와 날갯짓 소리와 민호가 내딛는 발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의 공간은 아니었지만, 한없이 무()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얼마나 한참을 걸었을지 날갯짓은 사나운 바위틈에 들어가 빛을 내뿜었다. 민호의 손아귀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보석도 더욱 찬란한 파란 빛을 띠었다. 여기다.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정신없이 바위틈을 헤집었다.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공간. 그곳에 손을 밀어 넣고서 헤집으면 무언가 낯익은 촉감이 닿았다. 창조하고 나서 그 피조물에 목숨을 주고 나서 몇 번이고 머금었던 촉감이었다. 바로 끄집어냈다. 그 피조물의 무게감이 어딘가 가볍게 느껴졌다. 더욱 두근거렸다. 필시 진우는 같은 체격의 인간보다 조금 더 무거울 터였다. 좋지 않은 예감이었다. 진우의 루비와 연계된 민호 몫의 루비는 빛을 잃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일까. 두근거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쩔 수가 없었다. 인간이기를 바랐던 제 인형이었다. 진우. 진우.

 

진우.”

“...제페, .”

진우.”

민호. , . 민호. 민호.”

 

고장 난 것만 같은 음성이 바위틈을 타고 돌아 동굴 안으로 퍼져나갔다. 가벼운 무게감. 더욱 부들거리는 촉감. 바위틈으로 억지로 끌어낸 진우. 눈을 마주 보면 그것은 더는 둥근 두 개의 보석이 아니었다. 카메라처럼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동공이 보였다. 곱게 흩날리는 머리칼은 하늘거렸다. 오똑 솟은 코는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였고, 입술은 혈색이 돌아 보였다. 혈색. 그것이 이상했다. 진우는 뚝뚝 울고 있었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액체를 흘릴 수 있는 /부품/은 진우에게 선사한 적이 없었다.

 

관절 이음새는 모두 이어졌고 말랑한 살이 근육이 단단한 뼈가 붙었다.

제페토가 창조한 인간이기를 바랐던 인형은 인간이 되었다.

 

 

**

 

 

[목숨이요.]

[내가 다시 마법을 걸어준다면 너는 평생을 살 수 있지. 인간 따위 하나도 좋지 않아! 목숨이 생겨버린다고. 고작 칠, 팔십 년을 살아. 백 년도 못 사는 것들이 되고 싶은 거야?]

[마음.]

[남의 마음을 알아서 어디에 써?]

[공감... 하고 싶어서.]

[공감? 세상 혼자 살지 둘이 사냐? 누가 내 감정에 공감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해?]

 

나는 공감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야. 공감하고 싶어. 제페토를. 민호를. 띄엄띄엄 이어진 진우의 말에 늑대는 코웃음을 쳤다. 늑대가 보기에는 참으로 알 수가 없는 아이였다. 숲의 터주인 늑대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차라리 인형이 원하는 대로 인간으로 만들고 먹어버리는 편이 영양가가 있지 않을까. 바위틈에 몸을 숨긴 채로 웅얼거리는 말투. 확연하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생명. 제페토. 민호. 숲 팅커벨의 무리가 하나같이 전부 상스러운 욕을 내뱉던 인형사.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만나고 들었던 제페토라는 족속들은 전부 그러했다. 도움도 되지 않는 녀석. 제페토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역시 인형의 인간화()인 것일까.

 

[목적을 이루어주면 조용해지지 않을까요?]

[...조용히 해라, 이 멍청한 날짐승들.]

[저 아이는 원하는 대로 인간이 될 수 있어요! 제페토는 원하는 대로 인간을 손에 넣어요! 창조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맛보지 않아도 되는 거죠.]

[나에게는 무슨 장점이 있는 거야, 그게.]

[이루어주지 않는다면 제페토의 사지를 바치겠어요.]

 

싫어요! 팅커벨의 조잘거림에 진우가 그렇게 외쳤다. 그 순간, 루비는 더욱 빛을 발했다. 진우는 이미 본인의 의지와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사고가 가능했으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것에서 늑대는 흠, 하고 턱을 간지럽혔다. 너 말이야. 인간이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공감하고 싶고 마음을 알고 싶다며.]

[....]

[너는 지금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거야. 인간이 되고 싶은 거는 네 마음이 아니야?]

[....]

[그리고, 제페토의 사지를 바치는 건 싫다며. 나도 사절이야, 그런 성인 남자 따위의 고기.]

 

그래. 그 말에 진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개의 검은 보석이 환하게 빛을 뿜었다. 늑대의 결론에 팅커벨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진우가 인간이 된다면. 이미 그 마음을 알았다면. 팅커벨은 더는 무리를 잃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목숨을 주마. 네 주인이 오기 전까지는 그놈도 빛나게 해주지.]

[, 감사. 감사합니.]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리지 말고.]

 

제페토, 취향 이상하더라. 그 말에 진우는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

 

 

깊은 숲에 있는 자그마한 통나무집은 나무공방이다. 솜씨 좋은 인형사, 목수의 소문을 타고 온갖 곳에서 의뢰가 물밀 듯 밀려들었다. 제페토. 숲에 사는 모두가 그 인형사이자 목수를 제페토라고 불렀다. 제페토는 인형이었던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모두들 제페토가 참으로 연인과 사이가 좋다고들 했다. 팅커벨의 무리는 여전히 제페토만 보면 이를 갈며 사지를 찢어버린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지만, 마음을 가져버린 인형이었던 파트너가 막고 나서는 바람에 팅커벨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민호. 민호.”

왜 그러니.”

여기 다쳤어요.”

 

이제 깨지고 망가지고 흠집이 난다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 찾아왔다. 진우는 대패 근처에서 놀다가 베인 손가락을 가지고 민호에게 다가왔다. 방울방울 맺혀있는 액체. /부품/이 가동하여 내보낸 것도 아닌 온전하게 진우의 몸속에 흐르는 것이 맺혀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붉은 루비같은 핏방울에 민호는 그 손가락을 제 입술에 머금었다. 쇠 맛이 났다. 불쾌하지 않았다. 민호, 따가워요. 진우의 말에도 민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러워요, 톱밥 묻었어요.

 

괜찮아.”

있잖아요, 민호.”

왜 그러니 이번엔. 손가락이 더 아프니?”

으응, 아니요. 민호, 나 배도 고파요.”

 

배가 고파서 실수해서 다친 것 같아요. 또박또박도 잘 이야기하는 진우의 말. 민호는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우유도 소화하지 못했던 진우는 이제 민호가 주는 모든 음식을 맛있게 삼킬 수 있었다. 더는 우유를 토해내지 않았다. 부어주는 것이야 새어 나올 때가 있었지만, 애써 주는 것을 모조리 돌려버리는 일은 없었다. 물론, 진우가 <고장>이 아니라 아픈 경우에는 가끔 달랐지만 말이다. 기분이 좋다고 하는 것은 더욱 솔직해졌다. 달뜬 표정은 더욱 혈색을 띠었다. 민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공감할 수 있었다. 민호는 인형사 제페토로서가 아니라 그저 민호로서 기뻐했다. 진우는 제가 창조한 인형이 아니라 저와 숨을 쉬고 살아가는 인간이자 동반자였다.

 

빵을 먹자.”

호두가 들어간 빵이 좋아요.”

고기도 먹어야지.”

얼마 전에 밤비가 잡혔다고 팅커벨들이 이야기했어요.”

“...불쌍하게도 말이지.”

불쌍하긴 하지만 밤비는 맛있어요. 얼른, 얼른 가요 민호.”

 

진우는 나서서 민호의 손을 더욱 잡아끌었다. 통나무집의 정원, 목공 테이블 위에 햇살이 나부꼈다. 톱밥이 제멋대로 휘날리며 공기중을 수놓았다.

 

제페토, 인형사의 집에 찾아온 평화였다.

 


 

Written By. MTR (Twitter Account : @m_tr_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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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계절



 

 

w. farynosa





형사취수제 : 남자의 경우 형이 죽은 뒤 동생이 형수와 부부 생활을 이어 나가는 혼인 풍습.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 1 -

 

 

 

"여기 온 지 벌써 4년이나 되었는가..."

 

 

 

막 떠오른 아침 햇살이 제법 붉어진 나뭇잎에 부딪혀 바스라진다. 진우가 갇혀 있는 별저 마당의 풍경은 날마다 색채를 바꿔 가고 있다. 여기보다 한참 남쪽인 진우의 고향 서라벌의 나무들은 아직 초록 잎을 더 많이 달고 있을 때이지만 국내성의 겨울은 훨씬 빠르고 더 혹독하다. 정원에 심어둔 나무의 잎이 울긋불긋 물들고 아침에 내쉬는 숨결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하면 이 곳 사람들은 겨울 준비로 분주해진다. 고향에서 지낼 때엔 단풍이 들기를 기다려 일부러 유람도 가곤 했었으나 북쪽 사람들에게 가을은 그저 겨울을 알리는 신호탄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는다.

 

창을 활짝 열고 호오- 작게 숨을 내쉬어 보니 하얀 입김이 잠깐 보였다 사라진다. 열린 창을 통해 들어오는 공기가 차가워 진우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했다. 이 곳에서 맞이하는 네 번째의 가을이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절망과 한숨, 치욕으로 점철된 끔찍한 기억들만 남았는데 올해 맡는 가을의 공기는 왠지 느낌이 다르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 때문에 얇은 명주옷만으로는 추워서 오돌오돌 떨면서도 창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어 누군가를 찾는 건--

 

 

"형수님...! 고뿔 걸려요.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 때문이다. 진우가 기다리던 사람이 갖옷을 가지고 마당을 지나 다가온다. 어제부터 보고 싶었던 그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예쁜 얼굴에 꽃 같은 미소가 핀다. 하지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부탁하고 애원해도 그가 계속 고집하는 '형수님'이라는 호칭은 영 불편해서 이내 미소를 지우고 입을 살짝 삐죽거렸다.

 

법도에 따라 아내가 된 지가 반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형수님이라니. 그 호칭에 담긴 속뜻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 마음 한 구석이 헛헛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요즘 들어 가을을 타는지 가뜩이나 기분이 오락가락 하는데 제 어린 남편은 속도 모르고 그저 담비 가죽 갖옷 자랑에 여념이 없다.

 

 

"태백산(=현재의 백두산) 자락에서 잡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입니다. 아침 저녁 쌀쌀하니 꼭 챙겨 입으세요."

 

"아랫것들을 시키지 왜 굳이 들고 오신 겁니까?"

 

".. 그래도 명색이 지아비인데, 하루에 한 번은 뵈어야 할 것 같아서-"

 

 

뾰족하게 날이 선 진우의 말에 민호가 어쩔 줄 몰라하며 애꿎은 소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자기를 생각해서 귀한 옷을 갖다 준 건데 말이 심했나 싶어, 진우가 사과하면서 갖옷을 걸쳐 보니 그제야 환히 웃는다. 눈대중으로 어림짐작을 해서 맞췄는데 어찌 이리 꼭 맞는지 신기하다며 좋아할 때엔 귀엽기조차 하다. 올 봄에 불귀의 객이 된 제 형과 닮은 건 얼굴과 목소리 뿐, 속에 든 것은 정 반대로 달랐다.

 

재주는 빼어났으나 인성은 영 글러먹었던 형 영도와는 달리, 형이 죽고 어린 조카들을 대신해서 송씨 가문과 영지를 물려받은 민호는 성실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녔다. 그래서 형이 별당에 가둬 놓고 매일같이 범하던 첩이 남자, 그것도 몇해 전 볼모로 잡혀온 신라 왕족이라는 걸 알고 기함을 하면서도 내치지는 않았다. 거기엔 진우를 어릴 때부터 섬겨 온 가신으로 영도에게 끌려온 후엔 민호의 시종이 된 승훈의 눈물 겨운 애원도 한몫 했겠지만, 천성이 제 형처럼 모질었다면 눈 하나 깜짝 않고 신라로 압송해서 형장의 이슬로 만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민호는 현재 신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진우의 딱한 사정을 듣고, 남자라고는 해도 형의 첩 노릇을 했던 건 사실이니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며 가솔 몇 명만 모아 조촐하게 혼례까지 치렀다.

 

첫날 밤. 드디어 영도에게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이유 모를 설렘으로 두근거렸던 진우의 가슴이 민호가 툭 던진 말에 차게 얼어붙었다.

 

 

'솔직히, 저는 그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

 

'저의 진짜 형수, 그러니까 형님의 본부인 말입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저를 친아들처럼 키워 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형님은 그대를 첩으로 삼은 뒤부터 안채에는 전혀 발걸음을 하지 않으셨죠. 본래 몸이 약하셨는데 그 때문에 상심하여 병을 얻으셨고, 작년에 그만..."

 

 

꼴깍. 진우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처음 듣는 얘기다. 흔들리는 호롱불에 언뜻언뜻 보이는 민호의 얼굴은 별다른 표정 없이 담담할 따름이었다.

 

 

'몰랐던 모양이군요... 하긴, 형님이 그런 걸 말할 분은 아니긴 합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전 그대와 형님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형님도 돌아가셨고, 그대의 딱한 사정도 알았으니 더 이상은 문제삼지 않을 겁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겝니까...?'

 

'신라에는 이런 풍습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아마 불편하시겠지요. 지금 신라의 왕이 그대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기에 일단은 아내로 맞이했습니다만, 정세가 바뀌면 고향으로 돌아가세요. 그 때까지 저는 그대를 아내가 아닌 형수의 예로 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던 민호의 모습이 다시 떠올라 진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구구절절 옳은 얘기다. 죽은 형의 부인을 동생이 아내로 삼는 건 신라엔 없는 풍속이고, 정체를 숨기려 여장을 하고 있지만 진우는 원래 남자의 몸이다. 세숫물마저 꽁꽁 얼어붙는 혹독한 겨울을 겪을 때엔 고향 서라벌이 그리워 몰래 울기도 했다. 정세가 변해 아버지의 억울한 역모죄 누명이 벗겨지면 꼭 돌아가겠다는 결심은 늘 하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민호를 보면 왠지 서운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사람이라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가는 건 이성적인 판단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상념에 빠진 진우는 민호가 걱정스럽게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저기... 수심이 깊어 보이십니다.."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키고 진우가 혀로 아랫입술을 축였다. 대충 구실을 만들어 붙이기로 했다.

 

 

"계속 별저에 갇혀 있었더니 갑갑해 죽겠습니다.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면 좋을 텐데..."

 

"하지만 정체를 들키면 곤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공식적으로 죽은 자가 된 지 3년 가까이 되었잖아요. 그 동안 별다른 일이 없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승훈이 얼마 전 들려준 최근 신라 소식에 따르면 즉위 직후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친척들에게 피의 숙청을 가하던 왕의 광기는 많이 줄었다고 한다. 게다가 진우는 영도에게 끌려 온 이후 3년 동안 별저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으니 신라의 왕도 제 사촌 동생이 죽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을 터. 이제는 슬슬 바깥바람을 쐬고 싶다. 무엇보다 4년 전, 볼모로 끌려온 신라 태자의 수행원 자격으로 고구려 땅을 처음 밟았던 그 해 가을에 보았던, 드넓은 평원에 가득한 억새풀들- 바람을 따라 하얀 물결이 파도처럼 나부끼는 그 장관을 다시 눈에 담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울상을 하고 나가게 해 달라 조르자 민호가 마지못해 어깨를 으쓱했다. 어디 가고 싶으냐는 질문에 신난 진우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민호의 팔을 꼭 붙들었다.

 

 

"고구려 사람에게 활 솜씨 자랑은 하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만, 공교롭게도 제 특기가 활쏘기입니다. 평원에서 말 달리며 사냥하고 싶어요."

 

"호오... 정말입니까?"

 

"무엇하러 낭군에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서라벌에서 활 잘 쏘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었었답니다. , 활을 안 쏜지 오래 되어 연습은 좀 해야 할 것 같지만요..."

 

 

진우의 의기양양한 모습이 동이족 특유의 호승심에 불을 지폈다. 날카로운 눈빛이 살아난 민호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각궁이랑 남자 옷 가지고 오겠습니다. 조반 들면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2 -

 

 

 

 

죽은 형은 생전 민호에게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형이 비어 있던 별저를 수리하고, 거기에 종들이 '별당아씨'라고 부르는 첩을 데려다 앉혔다는 사실도 소박을 맞다시피 해버린 형수 강 씨의 한탄을 듣고서야 알았다. 수발을 드는 시녀들이 하나같이 절세의 미인이라 칭송하기에 호기심이 일었지만, 투기와 근심으로 나날이 낯빛이 어두워지는 강 씨에게 미안해서 곧 마음을 접었다.

 

그러다 제 어미와 다름없던 형수가 병을 얻어 죽었다. 상을 치를 때에도 형의 얼음장 같은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강 씨의 남동생으로 민호의 오랜 친우인 승윤이 누님을 살려내라고 소리치며 형의 멱살을 붙들었을 때에도 호랑이 같은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기만 할 뿐,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또 그 첩년을 찾으시는 겁니까, 형수님의 혼이 두렵지도 않으신가요?'

 

 

형수를 묻은 날 밤이었다. 그 날 조차도 별저로 걸음을 옮기는 형의 등 뒤에 대고 처음으로 원망하는 말을 내뱉었지만, 형은 씨근거리는 민호를 슥 쳐다보고 그대로 가던 길을 갔다. 한참 어린 동생의 경멸 섞인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대체 어떤 년이기에 형이 반평생을 동고동락한 조강지처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게 한 걸까--- 형이 왕을 알현하러 궁궐에 간 날, 분노와 궁금증이 반반 섞인 심정으로 몰래 별채에 갔었다. 대문이 바깥에서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민호는 까치발을 들고 담장 너머를 슬쩍 훔쳐보았다. 마침 '별당아씨'는 마당에 나와 연못의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그리고 형을 홀린 형수님의 원수가 얼굴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민호의 심장이 자기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춘추 시대의 미인 서시가 환생이라도 한 것일까. 정원의 꽃들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일 정도의 경국지색이다. 온 몸의 피가 얼굴로 몰린 듯한 느낌에 민호는 헐레벌떡 담장에서 떨어져 나왔다. 조금만 더 봤다가는 자기도 홀려 버릴 것만 같다. 그날 밤은 알 수 없는 설렘과 흥분으로 잠을 설치고 말았다.

 

정작 형은 아무렇지 않은데 죽은 형수에게 죄책감이 생긴 건 민호였다. 그래서 그 뒤로 별저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올해 봄, 형이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큰 상처를 입어 빈사 상태가 되어 집에 돌아오고,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민호에게 별채의 제 첩을 부탁할 때 까진 '별당아씨'의 존재를 한동안 잊고 살았었다.

 

 

'싫다는 대답 따위는 필요 없다. 별당의 형수를 책임지는 건 네 의무야.'

 

 

형은 자기 할 말만 깔끔하게 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송영도다운 최후였다. 하지만 민호에겐 형의 장례를 비롯, 해야 일이 쌓여 있었다. 갑작스런 가주의 죽음에 혼란해진 송씨 집안의 가솔들을 수습하고 졸지에 고아가 된 어린 조카들을 챙기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형이 첩을 들일 때 즈음 민호의 시종으로 내려 준 승훈을 데리고 별당에 간 것은 형을 형수 옆에 묻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처음 보는 시동생에게 정중히 예를 표하는 '별당아씨'는 민호가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수척해져 있었다. 그러나 견우성과 직녀성을 하늘에서 떼어다 하나씩 박은 듯한 두 눈은 전에 없이 영롱하게 빛났다. 단언컨대 민호가 살아오며 눈에 담았던 모든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였다. 그는 그저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옆에서 승훈이 안절부절 못하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머뭇거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하도 깨물어서 붉게 부르튼 입술에서 굵은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민호는 자기가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승훈 쪽을 한 번 쳐다본 별당아씨는 용기가 난 듯 말을 이어 나갔다.

 

 

'돌아가신 형님이 첩실처럼 대하긴 했으나 전 사실 남자의 몸입니다. 저를 어찌 하실 생각입니까?'

 

 

그렇다. 그녀는 남자였다.

 

혼란과 당황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감정의 물결이 해일처럼 몰려와 민호를 덮쳤다. 형은 분명 '별당 형수를 책임지라' 고 유언을 남겼지만 그 형수가 남자라는 말은 해준 적이 없다. 민호에겐 사내랑 하는 취미 따윈 없다- 아니, 없었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 민호 앞에서 사슴을 닮은 큰 눈망울을 도로록 굴리고 있는 제 형의 첩이었던 - 그리고 고구려의 풍습과 형의 유언에 따라 이제는 민호의 부인이 되어야 하는 자는 성별을 초월하여 존재 자체만으로도 지나치게 아름다웠으니까.

 

사정없이 요동치는 민호의 감정을 읽은 승훈이 옛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저 분은 사실, 4년 전 고구려에서 잠시 볼모 생활을 하다 귀국해서 즉위하신 현재 신라 국왕의 사촌이십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모셔 왔지요. 그런데 아버님.. 그러니까 왕숙께서 역모의 누명을 쓰시는 바람에 신라 국왕이 고구려 전하에게 도련님을 죽이라고 밀서를 보냈답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형님께서 도련님을 죽은 사람으로 처리하고 정체를 들키지 않게 여장시켜 송가 장원에 데려오셨습니다.'

 

'그럼 형님께서 구해 주신 건가?'

 

'.. 이 꼬락서니를 하고 온갖 치욕을 당하며 살았는데.. 글쎄요, 정녕 구원을 받은 걸까요? 혀를 깨물고 싶었던 적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녀.. 아니 그가 한을 씹어뱉듯 말했다. 하긴 냉정한 형의 성격상 결코 부드럽게 대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처연한 모습마저 숨이 막히게 슬프고 아름다워 더 쳐다보기 힘들었다. 고개를 돌려 승훈에게 어찌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이대로 신라에 돌아가면 죽게 된다는 승훈의 읍소에, 민호는 고구려의 풍속대로 자신의 아내로 맞을 것이니 지금처럼 계속 여장한 채 별저에 몸을 숨기라고 말하고 그녀... 아니 그의 거처를 나왔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형의 것이었던 저 절세 미인이 이제 자신의 아내가 된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나 분해서 눈물짓던 형수 강 씨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아 그 두근거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게다가 저 자는 평민이 아닌 무려 신라의 왕족이다. 정세가 바뀌면 고향으로 돌려보낼 것이고, 그 때까지 잠시 맡아 두기만 하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었다.

 

벽에 걸어 두었던 여분의 각궁과 자기 옷가지들을 챙겨서 별저로 걸음을 옮기는 민호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지난 봄의 일이었다.

 

 

 

* * * * *

 

 

 

"이런 옷을 입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리도 편한 것을..."

 

 

진우는 오랜만에 남자 옷을 입고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어찌나 좋았는지 자기도 모르게 민호의 팔을 붙들고 해맑게 웃으며 방방 뛰다가, 갑자기 팔을 놓고 정색하며 얼굴을 붉혔다.

 

 

".. 제가 너무 체통 없이 군 모양입니다.. 무례를 저질러 버렸네요."

 

"아닙니다. 형수님께서 좋아하니 저도 좋습니다."

 

민호는 따뜻하게 웃으며 고구려 복식이 신기한 듯 요리 조리 살펴보는 진우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마음이 동했던 건 분명 여장을 하고 있어서일 거라고, 여자로 착각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자기 옷가지를 가져다 입혔다. 그런데 진우에게는 약간 커서 헐렁한 민호의 옷을 입고 콩콩거리며 마당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마치 마실 나온 병아리 같아 귀엽기 그지없다. 심장이 또 제멋대로 요동친다. 내 부인은 남자라고, 언젠가 떠날 사람이라고, 돌아가신 형수님께 죄송하지 않으냐고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지만 심장의 박동은 이미 민호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활은 어디 있습니까?"

 

 

본격적으로 연습할 모양인지 소맷자락을 걷어붙인 진우의 얼굴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부려 놓은 각궁을 주자 능숙하게 당겨 시위를 걸더니 팽팽해진 줄을 몇 번 튕겨 본다. 자기에겐 좀 안 맞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활을 여기저기 만져 조정하다가 혹시 깍지가 있냐고 묻기에 여분으로 쓰던 것을 내어 주었다. 엄지손가락에 깍지를 끼고 시위를 쭉 당겨 보는 눈매는 먹이를 노리는 검독수리처럼 날카롭다. 누가 봐도 사내의 눈빛이다.

 

그런데 왜 저 늠름한 모습마저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일까. 눈에 단단히 콩깍지가 쓰인 모양이다. 일단 진우를 그만 쳐다봐야 진정이 될 것 같아 마당의 소나무에 짐승 모양의 과녁을 걸고 화살 몇 개를 주었다.

 

 

"... 제가 쓰던 활보다는 조금 강하네요. 그래도 연습하면 부끄럽지 않게 다룰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을 살짝 빗겨 박혔다. 3년가량 활을 못 잡았는데도 이 정도면 본래 실력은 대단했을 것이다. 말도 안 탄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들판으로 사냥을 나가려면 연습이 필요해 보여, 민호는 같이 마구간에 가서 말을 한 마리 고르자고 했다.

 

 

"그러다 제가 말을 타고 휙 도망가면 어쩌시게요?"

 

 

기분이 좋은지 진우가 민호에게 가볍게 농을 걸었다. 고운 눈매를 휘어가며 살살 눈웃음을 치니 마음이 봄볕에 눈 녹듯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세상 끝까지라도 가서 붙들어 올 겁니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 나온 민호의 본심에 눈이 동그랗게 커진 진우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린다. 귓가가 살짝 단풍잎 빛깔로 물든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었을까. 민호도 제가 한 말에 놀라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가, 정신을 차리고 진우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 .. 일단 말부터 고르러 가시지요, 형수님."

 

 

 

 

- 3 -

 

 

 

하얗게 핀 억새가 가득한 들판에 가을빛이 완연하다. 바닥에 깔린 풀들이 노랗게 마르기 시작하고, 정오를 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해가 지평선을 향해 서서히 떨어진다. 민호는 사방을 살펴보았다. 집 근처이니 굳이 따라올 필요 없다면서 승훈을 비롯한 수하들을 다 물린 참이라 허허 벌판에 사람이라고는 진우와 민호, 단 둘 뿐이었다.

 

 

"으익... 아까워라. 거의 다 잡았는데."

 

 

말을 타고 달리던 진우가 풀밭을 뛰는 토끼를 향해 화살을 날려 보았다. 간발의 차이로 빗나가 아쉬움의 탄성을 내지른다. 오래 쉬었던 것 치고는 훌륭한 솜씨라 민호가 박수를 치며 진우를 달랬다.

 

 

"그래도 잘 하셨습니다. 몇 년을 안 하셨다가 고작 3일 연습하셨는데 이 정도면 대단한 겁니다."

 

"...아까 토끼를 두 마리나 잡으셨으니 여유가 있으시겠지요. 부인을 놀리시면 안 됩니다."

 

 

민호의 말 뒤꽁무니에 매달린 두 마리의 토끼를 보고 샐쭉해진 진우가 투덜거렸다. 빨간 입술이 댓발 나온 모습도 사랑스러워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리니 도리어 파르르 성을 낸다.

 

 

"이번엔 도와주지 마세요! 제가 잡아 보일 터이니..!"

 

 

그 때 스스슥- 억새밭 사이로 뭔가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가 말고삐를 당겨 소리 나는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럇- 청량한 기합 소리와 함께 진우가 말을 달렸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진우를 보고 당황한 민호가 급히 외쳤다.

 

 

"형수님!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야 해요! 곧 해가 집니다! 그만 멈추세요!"

 

 

그러나 보기보다 승부욕이 강한 진우의 귀엔 민호의 간절한 목소리 따위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꼭 잡는다...!"

 

 

진우는 달리는 말 위에서 얼추 균형을 잡고, 허리춤에 매어 둔 화살 통에서 화살을 꺼내 시위에 얹었다. 지쳤는지 약간 느려진 토끼를 향해 활을 겨누고 한껏 팽팽히 당겨진 시위를 놓으니 쉬이이익- 바람을 가르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토끼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나 이번에는 토끼의 도망을 아쉬워 할 새가 없었다. 바닥에 패인 작은 구덩이에 발을 헛디딘 진우의 말이 크게 휘청했고, 활을 당기느라 고삐를 쥐지 못한 상태였던 진우는 아차 하는 순간 균형을 잃고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으아아앗---"

 

".. 형수님!!!!"

 

 

진우가 낙마하는 걸 본 민호가 말에 박차를 가해 미친 듯이 따라붙었다. 진우를 떨어뜨린 말은 저 멀리 달아났고, 진우는 풀밭에서 속절없이 데굴데굴 구르다 멈췄다. 그러다 잠시 움직임이 없어서 민호는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형수님! 형수님!"

 

 

민호는 쓰러진 진우 옆에 멈춰 구르듯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다행히 끙끙거리는 소리와 함께 진우가 몸을 일으켰다. 가느다란 몸을 부축해서 일으키는데 진우가 왼발을 땅에 살짝 디뎌 보더니 갑자기 입술을 깨물며 신음소리를 내었다. 당장 바닥에 다시 앉혀 각반을 풀어내고 바짓단을 걷어 올려 발목을 만져 보았다. 조금 붓긴 했으나 요행히도 부러지지 않은 것 같다.

 

 

"발목을 삐신 것 같습니다. 다른 곳은 어떠신지요?"

 

"으음.. 여기저기 쑤시긴 하는데 크게 다친 곳은 없어요."

 

 

달리는 말에서 떨어졌는데 이 정도로 그친 건 천운에 가깝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민호는 풀죽은 진우에게 만난 후 처음으로 싫은 소리를 했다.

 

 

"제가 뭐라 했습니까. 멈추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렇게 냅다 달리시면 어찌합니까? 이 정도로 그치길 다행입니다. 정말로 큰일 치를 뻔 했어요."

 

"....송구합니다. 저 땜에 말도 잃어버리고.."

 

 

고개를 숙이며 읊조리는 말끝에 울음이 묻어나온다. 진우가 잡으려다 놓친 토끼 같은 크고 순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이 자는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울먹이는 모습조차 이리도 사람의 마음을 흔든단 말인가. 이대로 계속 쳐다보고 있다가는 삐죽거리는 도톰한 입술을 훔치기라도 할 것 같아 민호는 잠깐 하늘을 쳐다보며 심호흡을 한 후 진우를 부축했다.

 

 

"앞으로 안 그러시면 됩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죠."

 

"..도망친 제 말은-"

 

"영특한 녀석이니 알아서 장원으로 돌아올 겁니다. 마음 쓰지 마세요."

 

 

네에- 고개를 떨구는 진우를 안아 올려 민호 말의 앞자리에 태웠다.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한 손으로 허리를 감자 민호의 가슴팍에 살그머니 등을 기대 온다. 맞닿은 곳으로 전해지는 체온에 진우도 느끼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장이 격하게 요동치는데, 제 예쁜 형수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냥 이야기만 조잘조잘 해 댄다.

 

 

"다리 나으면 사냥 또 와줄 거죠? 간만에 너른 들판에 나오니까 너무 신이 납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토끼 열 마리를 잡아 잔치를 벌일 겁니다!"

 

"하하... 입이 몇 갠데요. 열 마리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럼 사슴을 잡으면 되죠! 고향에서는 사슴 사냥을 자주 했었기에 그 편이 더 익숙하답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슴이 있긴 한가요?"

당연히 있지요. 아마 서라벌의 사슴들보다 훨씬 클 겁니다.”

 

히익.. 정말요? 진짜로 보고 싶은걸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말을 몰아 하얗게 피어오른 억새밭을 지나간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가 물결치듯 흔들린다. 그 장관을 넋 놓고 바라보던 진우가 갑자기 바르르 떨었다. 해가 지평선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평원에 흐르는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진다.

 

 

"서라벌은 아직 이렇게 춥지 않을 텐데.. 이 곳은 가을에도 참 싸늘하네요."

 

".. 고향이 많이 그리우신가요? 돌아가고 싶으세요?"

 

 

민호가 농담조로 물었다. 대답 대신 진우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민호 쪽으로 등을 더 바짝 붙여 기대온다. 그러더니 얼굴을 돌려 자기를 반쯤 안고 있는 민호를 바라보며 세상 어디에도 없을 고운 미소를 짓는다.

 

 

"지금은 그럴 마음 없습니다- 이러고 있으면 따뜻한걸요."

 

 

서녘으로 넘어가는 비스듬한 햇살이 진우의 얼굴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뽀얗고 살짝 도톰한 부드러운 뺨에 작게 보조개가 패었다.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차올랐던 감정의 둑이 진우의 미소에, 가슴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에, 부드러운 목소리에 침범당해 결국 무너져 버렸다. 가느다란 허리를 더 당겨 안으며 민호는 저도 모르게 진우의 부드러운 볼에 입을 맞췄다. 민호의 돌발 행동에도 제 품 안의 형수- 아니 부인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까르르 웃었다.

 

 

"사내에게 손대는 취향은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아... 그러게요. 몸이 제 마음대로 안 되네요.."

 

 

민호는 고개를 숙여 진우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자기 옷에서 나는 익숙한 체취와 달콤한 진우의 향기가 섞여 코 안을 간질인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이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민호의 고민을 안다는 듯, 진우는 팔을 위로 올려 열이 오른 민호의 머리를 살포시 감싸 안았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따뜻하게 자신을 휘감아 오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불처럼 포근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진우를 안은 두 팔에 더 힘을 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가 안은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올라 형과 죽은 형수의 얼굴, 죄책감, 미련, 망설임 같은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밀어내어 억새밭에 흐르는 바람결에 날려 버렸다. 물론 언젠가는 예정된 이별이 닥쳐오겠지만, 둘의 체온이 설렘으로 맞닿아 있는 지금 이 순간--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집에 돌아가면 민호는 더 이상 진우를 형수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해가 넘어간 자리에 까만 밤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멀리 마을의 불빛이 보인다. 언제 왔는지 아까 도망쳤던 말이 푸르르 투레질을 하며 앞에 와서 걷고 있다. 이 녀석도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다. 녀석 괘씸하네- 지나치게 태연한 말의 모습에 진우가 입을 삐죽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민호는 그 모습을 보고 허허 웃는다.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운다. 가을밤이 깊어간다. 내년 가을도, 내후년 가을도, 그 다음 번의 가을도 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기를- 오랜 번민을 떨치고 흔들리는 감정을 확인한 민호는, 진우의 동그란 뒤통수에 입을 맞추며 쏟아질 듯 펼쳐진 하늘의 별을 향해 간절히 빌었다.

 

- Fin

 

 

 

* 포스타입 블로그에 올린 고구려시대 AU 썰에서 가을 부분을 뚝 떼어 길게 풀었습니다. 고증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보내 놓은 허술한 시대물 읽어 주신 모든 분들.. , 사랑합니다.


 

 

Written By. farynosa (Twitter Account : @faryno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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