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w. PARAN
* 알오물, 엠프렉 요소 있습니다.
* 수위물입니다.
0-5.
그런 집안이었다. 우리 집을 가리켜 이름이 있다, 돈이 많다고 하기엔 너무 애매하다고 했다. 심지어 부모님의 학벌 역시 애매하다고 했다. 인서울이긴 한데, 다들 거기서 말을 멈췄다. 아버지는 항상 소위 말하는 재벌가들이 속해 있는 그 그룹에 끼고 싶어 하셔서 안달이었다. 알파나 오메가가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지위에서 모두 차별 없는 세상으로 나갔다고 그렇게 떠들어 대었지만 그쪽이나 우리 집은 예외였다. 아버지는 알파라는 우월감에 찌들었고, 어릴 때부터 못하는 게 없던 누나는 알파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아버지 성에 차지 않았다. 관심들은 자연히 내게 쏟아졌다. 돈은 어떻게든 벌면 되는데, 남은 문제는 너다. 아직 발현은 되지 않았지만 아비가 알파니 너도 무조건 알파일 것이다. 진우야, 잘 해야 한다. 잘 해야 해. 내 어깨를 잡고 흔들던 아버지의 눈빛을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잘 해왔다. 성적도 애매하지 않았다. 늘 좋았고, 내 지위도 아버지처럼 어정쩡한 게 아니라 회장이라는 타이틀을 쥐고 있었다. 거기 그 김씨네 아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훤하고. 학교에서도 회장이라며? 아버지는 내가 된 냥 으스스 어깨를 세우셨다. 모두가 내게 관심을 가지고 나를 치켜세웠다. 딱 발현이 되기 전까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춘기에 접어들고 시간이 꽤 지나서도 발현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베타와 다름없는 상태가 되자 아버지는 애써 웃으며 오메가만 아니면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사춘기가 끝날 무렵, 내 손에는 오메가라는 글자가 적힌 진단서가 떨어졌다. 종이 쪼가리를 보자마자 손바닥이 볼을 향해 날아왔다. 내가 너에게 들인 돈이 얼마인데. 고작 이딴 종이 받으려고 너를 그렇게 공부시키고 먹이고 재운 거 아니다. 우성 오메가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 줄 아느냐. 그렇게 해서 거의 다 잡을 뻔한, 그토록 가지고 싶던 그들의 왕관을 놓치게 된 아버지는 누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쥐 죽은 듯이 살아야했다. 그저 죽은 듯이. 그냥 오메가도 아니고 우성 오메가, 그게 내 죄였다.
집에서 내 존재가 잊혀 질만큼, 손님들조차 내 이름을 더 이상 오르지 않을 정도로 누나는 주어진 과제를 잘 수행했고, 나는 쥐 죽은 듯이 잘 살아왔다. 아버지나 누나나 그들이 생각하는 성공은 더 이상 내가 관여할 것이 아니었다. 나는 완전한 자유를 꿈꿨다. 그 잘나신 알파들을 피해 이 집으로부터 독립 하는 것. 발현이 나타난 17살 이후 더디게 가던 시간은 흐르고 흘러 20살, 드디어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조심스레 독립을 이야기하니, 멀쩡한 집 놔두고 뭣하러 밖에 나가냐는 소릴 들었다. 예상했던 소리였다. 이제 어른이니까 혼자서 어떻게 뭘 해보고 싶다고 떠듬거리며 말했던 것 같다. 아버지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게 나였다. 아까운 돈 쓰고 싶지 않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아야 했다. 이제는 내가 뭘 해도 미운 모양이었다.
바스러진 내 감정이야 둘째 치고, 절망스러운 게 더 컸다. 내 삶의 모든 게 돈에 의해 제약받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어른이라니. 어른 구실도 못하는 주제에 사회에서 어른이라고 불리니 너무 우스웠다. 나는 이 집도 내 마음대로 벗어나질 못하는데.
세상이 달라졌다 해도 계급의식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치켜세우거나 깎아내리는 사람은 어딜 가나 존재했다. 신입생 환영회 때, 알파라며 우쭐해하는 놈 하나, 둘을 발견하고 학과생활이 참 재미없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대로 내 삶은 무난하게 굴러갈 줄 알았다.
1.
5시 59분.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십여 분 전부터 챙겨둔 가방을 움켜쥐었다. 아직 일에 집중하고 있는 척,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있다. 긴장 반, 초조함 반 그리고 설렘 조금.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괜히 창을 내렸다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6시, 퇴근 시간이다. 아래창의 시계가 6:00으로 변하기 무섭게 목에 걸린 사원증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계에 찍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또 신속하게 밖으로 나간다. 아, 물론 “내일 봬요!”는 잊지 않는다.
오늘도 진우씨가 1등으로 찍었네. 매일을 봐도 그렇게 보고 싶은가봐. 뒤늦게 따라 나온 동료의 말에 철없이 웃으며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칼퇴 하는 모습이 얌체 같아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빠른 걸음으로 금세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에 다 오기도 전에 차 리모컨을 눌렀다. 가벼운 멜로디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 앉자마자 무섭게 시동을 걸고 옆자리 히터부터 틀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회사를 빠져나가면 완벽한 퇴근의 모습이 완성되는 것이다.
복잡한 퇴근길을 지나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6시 28분. 평소보다 10분정도 일찍 도착하겠는데. 기분이 좋아져 손가락으로 핸들을 피아노 치듯 두드렸다.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고, 이제는 익숙해진 도로 위를 달린다. 깜짝 놀랄 일이다. 몇 년 전의 내가 보거나, 민호가 보거나. 모두 놀랄 일이겠지. 알아서 잘하네. 다행이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의 다 도착해서 문제가 생겼다. 주차 공간이 부족했다. 근처를 도는 수밖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차를 대기 위해 눈과 핸들을 이리저리 돌렸다. 겨우 한 군데를 찾아 주차하고 내렸는데, 시곌 보니 평소와 똑같은 시간에 도착할 듯싶었다. 옷맵시를 가다듬으며 놀이터를 지나 문을 잡아 당겼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민우 어머님! 잠시만요, 민우 부를게요. 민우야!”
선생님이 안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올 동안 나는 유치원 내부를 찬찬히 둘러본다. 벽에 붙어있는 게시판이 눈에 들어왔다. 입학식 사진부터 시작해 체험학습, 생일 파티 등 그 속에서 민우가 어디 있는지 열심히 찾아본다. 그러는 사이에 “엄마!”라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장난감을 잠깐 놓았다가 다시 쥐면 될 것을, 그게 싫었는지 민우는 야구잠바도 한 쪽만 입고 가방도 한 쪽만 맸다. 선생님이 뒤에서 어떻게든 입혀준다고 쩔쩔거리는데 민우는 가만히 있지 못한다. 유치원 현관에 서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 민우가 그대로 나를 향해 달려왔다.
“엄마아!”
“민우야! 송민우!”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 쭈그려 앉아 민우가 품 안에 쏙 들어올 수 있게 두 팔을 벌렸다. 가까이 오는 민우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따라 웃으며 반기는데 민우가 아래로 점점 내려간다? 이윽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민우가 넘어졌다. 민우야! 선생님과 내가 거의 동시에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선생님은 뒤에서 급하게 민우를 일으켜 세웠다. 매끈한 바닥에 발이 미끄러진 모양이었다. 다행히 상처는 안 났지만 그 충격이 꽤나 컸는지 고개를 든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울음이 터졌다.
“흐어어엉, 엄마아.”
민우의 울음소리에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했다. 넘어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어떡해야하지? 일단 달래야 한다는 마음에 신발을 벗고 민우에게 다가갔다. 그 사이에 선생님은 민우에게 “민우야, 많이 놀랐지? 응, 괜찮아. 괜찮아. 넘어져서 아팠겠다.”라며 말려 올라간 잠바를 내려주었다. 선생님이 민우를 품에 안고 나에게 올 때까지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민우야. 안 다쳤네. 괜찮아.”
아이를 건네받고 한쪽 팔로 엉덩이를, 남은 팔로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울지 마. 코를 훌쩍이며 눈물범벅인 얼굴이 내 어깨를 비빈다.
“민우 어머님.”
“ㄴ,네!”
“오늘 민우가 많이 보고 싶었나 봐요. ‘언제 6시가 와요?’라고 자꾸 묻다가 친구들이랑 잘 놀더니 엄마 왔다는 말에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뛰어나왔네요.”
“아….”
울음이 멎어가는 민우의 등을 토닥이며, 선생님과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민우야, 괜찮아? 어디 봐봐. 안 다쳤네. 엄마가 뭐랬어. 뛰어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집에서도 그러더니 왜 자꾸 뛰어다녀. 아까 하지 못한 말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가시가 돋은 말이 내 목구멍을 찔렀다.
모든 것을 감안하고 한 임신이었지만, ‘엄마’라는 두 글자는 아직 내게 너무 어려웠다.
0-4.
「서양화과 15학번 송민호입니다」-오후 02:03
되게 깔끔하네. 핸드폰 액정 위로 뜬 문자를 꾹꾹 눌렀다. 강의 정보도 보지 않고 이름만 보고 신청했다가 예상치 못한 조별 과제를 만났다. 교수님 재량으로 조를 편성한 탓에 웬 미대생이랑 같이 하게 되었다.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건 꽤나 거북한 일이라 되도록 조별 과제 있는 수업은 피했는데. 내 잘못이니 누굴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과제 안내를 끝으로 수업이 마치자마자 그 남자는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폰을 내밀었다. 저기요, 낮은 중저음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울렸다.
「진우씨 좀만 있으면 시험기간인데 과제 빨리 끝낼래요?」- 오후07:45
으악, 진우 씨래. 들어도 들어도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다. ‘~씨’, ‘~학우님’과 같은 표현들이 아직도 어색했다. 이건 아마 영영 안 익숙해질 것 같은데. 쭉 펼쳤던 다리를 모아 접었다. 뭐 했다고 벌써 시험기간이야. 투덜거림도 같이. 그러면서 손은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네 좋아요 」짧고 명료한 문장이었다.
그의 제안에 우리는 제출일 보다 일찍 과제를 하게 되었다. 그와 내가 서로 시간표를 공유하고 공강 시간에 만나 후딱 처리하기로 했다. 이렇다고 시험공부를 더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만. 만나서 함께 논의하고 발표를 준비하면서 자연히 말 섞는 일이 늘어났다. 오메가인 내가 낯선 사람을 경계를 하고 피하는 게 쉬웠지, 단기간에 친해지는 일이야 거의 없었다. 타인에 대한 경계는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 오메가를 천대하고 무시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민호와 처음 만나 과제를 했을 때도 그랬다. 필요한 말 이외에는 일체 나누지 않았다. 금방하고 끝내고 싶은 마음이 컸으니까. 대부분은 왜 이렇게 까칠하게 구냐며 신경질을 냈지만, 민호는 내게 그런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나중을 기약하고 카페에 나서려는 나에게 그는 잠깐만 기다리라며 핫초코를 느닷없이 내밀었다. 추운데 가면서 드세요. 이게 뭔가 싶어 가만히 그 손만 바라보았다. …아, 단 거 싫어하세요? 멋쩍은 웃음에 거절하기도 뭣해서 감사합니다, 라며 들고 나와 버렸다. 너무 뜬금없다고 여기면서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홀짝홀짝 마신 핫초코는 매우 맛있었다. 다음번에 과제할 때 또 거기 가자고 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게 아마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 봤을 때 느낀 딱딱함과 무서움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덩치만 큰 순둥이. 사소한 배려를 느낄 때마다 마음 모퉁이 하나가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담이 늘고 강의실에서 나란히 앉게 되었다. 「형 오늘 지각이야? 」라는 문자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스며들다’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나도 모르게 내 영역 일부를 민호에게 내어주고 있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앞에서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 민호를 바라보았다.
“형. 내 얼굴 뚫리겠어요.”
“어? 아, 미안.”
으악, 진짜 쪽팔려. 눈을 재빨리 밥에 고정시키고 입안에 숟가락을 집어넣었다. 쑤셔 넣었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살짝 쳐다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너무 길었나보다. 급하게 먹는 나를 향해 민호가 체하겠다며 물을 건넸다.
“장난이에요. 천천히 먹어요. 천천히.”
“으응.”
얼굴이 왜 이렇게 홧홧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요즘 안 그래도 쟤 때문에 마음 싱숭생숭하고 이상한데,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는 거야. 이것도 다 송민호 때문이야. 어처구니없는 변명만 속으로 늘어놓으면서 물을 삼켰다.
2.
옆에서 끙끙 앓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주위가 너무 어두워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스탠드를 찾았다. 이곳저곳을 더듬다가 겨우 스탠드를 켜 옆에 누워있던 민우를 확인했다. 땀이 흘러내리는 얼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민우야,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난다. 체온계, 체온계가….”
필요할 때 어디 있는지 생각이 꼭 안 나지. 체온계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더듬으며 서랍 이곳저곳을 열었다. 한 쪽에서는 응급실을 데리고 가야하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일단 찬물에 수건부터 적셔야 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 무는 가운데 겨우 체온계를 찾아 아이의 귀에 가져갔다. 삐이, 소리와 함께 화면을 확인하니 37도가 넘는 숫자가 떴다.
“ㅇ,엄마. 엄마아….”
“응, 민우야. 엄마 여기 있어. 민우, 열 많이 난다. 병원 가야겠다. 병원.”
땀에 젖은 민우의 앞머리를 넘겨주고 지갑과 핸드폰, 겉옷을 급하게 챙겼다.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아파서 끙끙거리는데. 민우가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민우를 내 옷 안에 밀어 넣고 급하게 밖으로 나섰다. 이 근처에 병원이 어디 있었는지, 이럴 때는 응급실을 가야하는지. 아님 약국을 가야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여전히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울고 있는 아이를 보자니 나도 같이 울고 싶어졌다. 대신 아파줄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할 텐데.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다 큰 놈이 뭐 하나 할 수 있는 게 없어. 나도 모르게 “어떡해. 어떡하지.”만 반복적으로 내뱉고 있었다.
“미치겠네. 병원이 어디 있었…택시!”
고요함으로 잦아든 밤거리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앞에 지나가는 택시 하나를 잡아 몸을 실었다. 가까운 응급실로 빨리 가주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민우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0-3.
민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마음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나는 그의 앞에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이 요동치는 건 물론 의식하지 않던 체향까지 느꼈다. 제일 우스운 건, 나 자신이었다. 그가 알파라고 밝혔을 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거였다. 이미 송민호라는 사람이 단단한 내 성벽을 무너뜨리고 눌러 앉은 탓이었다.
미노야…. 있자나, 나 너 좋아해에.
문제는 나였다. 사귀는 건 꿈도 못 꾸고 고백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함께 지내면서 이렇게 아옹다옹 지내는 게 훨씬 좋다고 그렇게 몇 번을 속으로 다짐했다. 전공 과제한다고 연락 뜸해진 민호에게 섭섭해 할 수도 없어서 그 마음을 숨기고, 나 말고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모습이 질투가 나는데 내가 그럴 자격이 없어서 애써 쿨한 척했다. 그런데 고작 술 하나 조절 못하고 취해버려선, 그간 내 노력들을 다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내 스스로가 우리의 관계를 무너뜨린 것이었다. 술 먹고 고백이라니, 술 먹고! 취중고백을 한 다음 날, 민호네 자취방에서 눈을 떴다는 사실에 또 좌절하면서 급하게 신발을 눌러 신었다. 이것보다 더 추하고 민폐인 게 어디 있을까. 내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형 전화받아요」- 오후03:23
「피하지 말고 만나서 이야기 좀 해요」- 오후03:24
나 너랑 할 이야기 없어. 액정 위로 비친 한참 전에 온 카톡을 모두 답장하지 않고 그대로 핸드폰을 덮었다. 그 날 이후 민호를 피했다. 강의 시작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와 문 근처에 앉고, 수업이 끝날 때는 누구보다 빠르게 튀어 나갔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나를 자꾸 찾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베개 위로 얼굴을 묻었다. 못들은 척 할 테니 예전처럼 지내자고 할까?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그런 말을 들을 바에 차라리 이러는 게 나아.
그렇게 요령껏 잘 피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전공 수업이 마치고 그만 붙잡혀 버렸다. 문 앞에 떡하니 나를 기다리는 송민호를 보고 속으로 기함했다. 형만 내 시간표 있는 줄 알아요? 나도 있어요? 민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뒤따라 나오는 사람들이 시선이 우리에게 몰렸다. 급하게 손목을 뺀 나는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이야기하자며 먼저 발을 옮겼다.
“빨리 그 할 말하고 가줄래. 요새 많이 바쁘거든.”
김진우 진짜 최악이다. 말은 그렇게 모나게 한 주제에 민호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무서웠다.
“형, 그 때 그 말 아직 기억해요?”
“무슨 말.”
“나 좋아한다는 거요.”
“…기억 안 나.”
“정말로요?”
어느 덧, 민호가 내 코앞까지 다가와 물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응. 안 나. 미안해.”
“그럼 왜 나 피해요?”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 외에는 나 피할 이유는 없는데.”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데.”
“아니요, 제가 대답하고 싶어서요.”
내가 물러선 만큼 민호가 다시 다가왔다. 무슨 말을 할지 도무지 감히 잡히지 않는 나는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우물쭈물 서로가 서로를 할퀴던 내 두 손을 잡아 민호가 앞으로 끌었다. 당황한 내가 빼려고 하자 힘을 세게 쥐었다.
“나는 살면서 그 날만큼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고백을 못 들어봤거든요.”
“…어?”
“나도 좋아해요, 형.…우리 사귈래요?”
우리 사귈래요?
목소리와 말 그리고 표정까지 어느 하나 달지 않은 게 없었다. 너무 달다. 나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눈동자가 서로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숙일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너무 뜨거웠기에. 대신 위아래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할게요, 민호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사랑 받고 싶지만 미움 받는 게 더 무서워 항상 뒤로 물러나 있는 게 나였다. 그런 나에게 민호는 태양 그 이상이었다. 사랑 받고 싶다고 칭얼거려도 된다며 제 애정을 주었다. 그간 못 받았던 걸 보상 받는 것처럼 나는 그의 사랑을 잔뜩 취했다. 내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호는 학교와 집이 멀어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부터 자유를 갈망하는 나에게 민호의 자취방은 도피처이자 임시 휴게소와 같은 곳이었다. 처음에 외박하는 걸 일일이 보고했는데, 엄마 이외에 신경 쓰는 사람은 이제 없는 것 같아서 이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자취방이 내 것인 냥 드나들었다. 오늘도 역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발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민호야,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매트리스 위에서 자는 민호가 제일 먼저 보였다. 잠을 굳이 깨우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신발과 겉옷, 가방을 벗고 난 후 그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아, 따뜻해. 고개를 돌리니 새근새근 잘만 자는 민호가 보였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가슴이 더 뛰고 흥분되는 걸 느끼며 눈을 가만히 감고 있는 얼굴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었다. 진한 눈썹, 오똑하고 다부진 콧대, 말랑한 입술…까지 손가락이 도달한 찰나,
“형.”
“아, 깜짝이야.”
민망함에 손을 재빨리 거두었다. 민호가 한 쪽 팔로 눈을 가리며 입을 열었다.
“내 문자 못 봤어요?”
“문자?”
“오늘 하루만 우리 집 오지 말라 구요. … 아침에 브리드 싸이클 와서 약 먹고 자고 있었는데, 지금 형 때문에 약이 다 소용없게 됐어.”
“아….”
“어서 가요. 내가 주체 못할 것 같아.”
이것 때문이었나. 아까보다 더 진해진 체향에 내 몸이 불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주먹 쥔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본능을 억누르고 애써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페로몬에 노출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갈려면 진작 알아차리고 갔어야했다. 바지를 벗고 민호의 몸 위로 올라 타 그의 팔을 내렸다.
“김진우,”
“하자. 나도 주체하기 힘들어서.”
엉덩이 사이로 발기한 민호의 성기를 느끼며 그것을 살살 비볐다. 민호의 페로몬이 더욱더 진해졌다. 민호가 상체를 일으켜 내 얼굴을 붙잡고 입을 부딪쳐왔다. 입을 벌리고 뜨거운 혀를 받아내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티셔츠 속으로 손이 들어와 가슴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손마저도 뜨거웠다. 입을 뗀 민호가 내 가슴이 얼굴을 묻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행위에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맨투맨을 벗자 얇은 반팔 티셔츠가 드러났다. 그 위로 도드라진 유두를 빨아올리며 민호가 뭉개진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아무 것도 안 나오는데 왜 이렇게 달지. 여기는 항상 달더라.”
“하아, 무슨, 개소리야,”
다른 한 쪽은 손으로 지분거리며 옷이 축축해지고 남을 정도로 젖꼭지를 빨았다. 민호가 무릎을 세워주지 않았더라면 자극에 못 이겨 진즉에 뒤로 넘어갔을 것이다. 반팔을 벗기는 손길에 나 역시 손을 뻗어 민호의 옷을 끌어 올리자 벗기기 쉽게 움직여줬다. 전부 다 탈의한 민호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허벅지 위로 내 두 다리를 얹히고 다리를 벌렸다. 그 틈 사이로 내 엉덩이가 빠졌다. 나는 민호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김진우.”
“…으응”
“아래가 축축하다. 젖었어.”
애액으로 잔뜩 젖은 속옷 위로 민호는 비문을 문질렀다. 하필 삼각브리프를 입은 탓에 젖은 속옷이 달라붙었다. 발끝이 절로 오므라들었다.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민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 좀 보여줘요, 그 말에도 겨우 고갤 들자 다시 입을 부드럽게 맞춰왔다.
“하으음….”
엉덩이를 주무르던 두 손이 속옷을 반쯤 내려 진득하게 젖은 부분으로 다가가 비문을 둥글게 만졌다. 주름과 비문을 번갈아 자극하던 손길 때문에 자꾸 그 쪽 부분이 움찔거렸다. 애써 혀로 쓸리는 입천장에 신경을 돌리고 있을 때 손가락이 쑤욱 들어왔다. 손가락이 한 개가 두 개가 되고, 새 개가 되어 내벽 이곳저곳을 찔렀다. 맞댄 입에서 작은 탄성이 튀어나왔다. 한참 전에 발기한 성기가 만져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손을 뻗어 아래를 잡아 흔들자 그걸 눈치 챈 민호가 입술을 떼곤 내 손을 치웠다.
“왜에”
“혼자 먼저 가는 건 치사하잖아요.”
“히잉,”
“아, 형. 진짜…. 콘돔만 끼고요.”
“하지마. 안에 다 해”
“네?”
“브리드 때 임신한 오메가 이야기 한 번도 못 들어 봤어. …그냥 해.”
안에다 질펀하게 싸줘. 뒷말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졌다. 내 딴에 용기 내고 말한 건데, 잠잠한 민호가 이상해 고개를 들자마자 몸이 아래로 내려가 뒤집혔다. 무릎을 꿇고 엉덩이가 들린 자세가 민망해 이불을 세게 쥐었다. 내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은 민호가 제 성기를 비문에 살살 문질렀다. 나는 프리컴이 맺힐 만큼 정말 가고 싶은데, 밑으로 또 손을 뻗었다가 손등을 맞았다. 울상 짓자 민호가 금방이라도 흔들어 줄 것처럼 내 아래를 쥐었다. 그리고 그의 성기가 안으로 서서히 들어왔다.
“하윽,”
몇 번의 관계를 맺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버거운 크기였다. 긴장을 풀라는 듯 민호가 등에 입을 맞추어 왔다. 허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처음에는 천천히 진입하던 성기가 한 번에 훅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내벽을 조였다. 민호의 입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내 귀를 자극했다. 안을 거세게 몰아치고 나가는 성기를 느끼며 낭심과 기둥을 번갈아 주무르는 손길에 나는 완전히 자지러지고 말았다.
“아, 아, 아읏, 미노, 미노야 … 아!”
그의 손 안에 결국 끈적한 액체를 쏟아 내었다.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 민호가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았다. 부드럽게 만지는가 싶더니 이내 아까보다 세게 성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이어진 거센 피스톤질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앞이 번쩍번쩍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원래 시야가 보이기를 반복하며 음탕한 말을 계속 질러대었다.
“깊어어, 하읏, 아, 미노야! 하으으, 응, 좋아, 거기, 응”
사타구니와 엉덩이가 부딪혀 쩍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불을 쥔 손 위로 민호의 손이 겹쳐졌다. 민호의 피스톤질에 맞춰 허리와 엉덩이를 움직였다. 낮고 강한 숨소리가 귓속을 제대로 파고들었다. 엄청난 자극이었다. 하아, 민호가 깊게 숨을 내쉬며 귓불을 빨았다. 안이 따뜻해질 즈음 민호가 목에 새긴 잇자국을 혀로 살살 쓸었다.
후희를 즐기는 와중에 다시 내 몸이 뒤집혔다. 삽입한 채로 몸이 빙그르르 돌아가자 성기도 따라서 내벽을 돌았다. 눈을 마주치자 민호가 “사랑해”라며 이마를 맞대어 왔다. 이미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몸인데 얼굴에만 열이 더 오르는 것 같았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겨우 나도…사랑해. 작게 속삭이자 민호가 웃으면서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췄다. 쪽쪽거리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들으며 그가 주는 애정을 한껏 느꼈다.
“형.”
“응?”
“한 번으로는 역시 부족하죠?”
두 다리가 들리면서 민호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아직 질펀하게 싸지도 못한 것 같은데. 그 날 오후, 나는 하얗고 뿌연 액체가 애널에서 허벅지로 흘러내릴 때까지 민호와 사랑을 진득하게 주고받았다.
3.
“네, 선생님. 감기래요. 몸살감기.”
색색거리며 잠이 든 고운 얼굴에, 그 이마를 쓸어내리며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한결 나아진 표정에 마음이 놓였다. 조금만한 손에 내 손을 가져가 꼭 잡았다. 출근. 불현듯 그 단어가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 민우가 많이 아픈가요?
“응급실에서 주사 맞고 오니 좀 나아졌어요. 그래도 오늘 하루는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 네네, 어머님. 요새 안 그래도 민우 옷차림이 너무 얇아서 저번에 말씀 드렸는데…
“아, 그랬었…죠.”
- 낮에는 따뜻한데 아침, 저녁으로 추워져서 그런지 민우가 유치원에서 기침을….
그 소리를 듣자마자 뒷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통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아니 조금 뜨거운 온도가 더 생생해졌다. “네, 어머님. 그럼 들어가세요.”라는 말을 끝으로 정신이 돌아왔다. 그 이후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머리를 한 번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 아이의 아픔이 나로서 비롯된 것이었나. 아이에게 관심을 좀 더 쏟았어야 했는데. 오죽했으면 유치원 선생님이 옷차림을 이야기했겠냐고. 두꺼운 잠바 하나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나에게 화가 났다.
“하아아….”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고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이 와중에 출근이라니. 출근. 아이가 아픈데 출근 걱정부터 하고 있다. 탁자 위에 올려둔 액자를 멍하니 바라보다 민우의 손등 위로 입을 맞추었다. 민호 생각이 났다. 이럴 때 민호가 있었다면. 민호는 어떻게 했을까.
“미안해, 민우야. 엄마가 너무 부족해서 미안해….”
입술로 전해지는 온기가 내 눈으로 옮겨 온 것만 같았다. 일에 치여서 제대로 신경 써주지 못하는 것도 미안하고, 아픈 민우를 두고 출근을 하는 것도 미안했다. 요새 엄마가 일이 너무 많아서 민우를 잘 챙겨주지 못했어. 미안함과 동시에 같잖은 핑계들이 자꾸만 스멀스멀 올라왔다. 일에 집중하면 민우에게 소홀해지고, 민우를 신경 쓰자니 일이 눈에 밟히고, 일은 그만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있는 기분에 숨이 막혔다. 마치 수면 위를 떠오른 물고기처럼.
0-2.
이별 선고를 받았다. 민호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내가 여기 있는 게, 오늘의 이 약속이 다 거짓이라고 착각하고 싶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며 이유를 물었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데 이유가 있어요? 헤어지고 싶으니까 헤어지는 거지. 제 할 말을 마친 송민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모습을 눈으로 따라가며 멍청하게 지켜만 보고 있었다.
3년 6개월간의 연애가 종지부를 찍었다. 첫 연애가 끝이 났다. 대학생 때부터 시작해 직장인인 지금까지 함께였던 시간들이 갑자기 끝이 났다. 첫 손잡기, 첫 포옹, 첫 입맞춤 그리고 첫 섹스까지 다 민호였는데, 그 긴 과정과 달리 끝은 너무 간단했다. 허무하기까지도 했다. 그 날, 무슨 정신으로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잠을 자는 거였다. 잠을 자면 괜찮을 거야. 허리가 아플 때까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안 난다 싶더니 자고 일어나서 눈물이 터졌다. 눈을 뜨자마자 습관처럼 카톡을 확인했다. 간밤에 민호에게 연락이 왔는지. 그제야 실감이 났다. 민호 프로필 사진에 함께 찍은 사진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대화창은 ‘거기서 보자’는 내용을 끝으로 진전이 없었다. 잘 자,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다녀요 따위의 말들은 과거가 된 것이다.
너무 이상하잖아.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안 그랬는데. 우리 진짜 잘 지내고 있었단 말이야. 나에게 구질구질함이나 쪽팔림 따위야 문제가 아니었다. 민호와의 이별을 인정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싫었다. 몇 번을 핸드폰만 들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며 고민하다 결국, 다시 민호에게 연락을 했다. 전화를 받을 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카톡을 보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흐려지는 눈에 힘을 주었다. 숫자 1이 사라지고 돌아오는 답은 ‘질린다’ 였다. 형이 그러는 거 진짜 질려요. 애도 아니고.
매정한 놈. 애꿎은 베개에 화풀이를 하다 이불 속에 파고들었다. 내가 너무 칭얼거렸나봐, 나만 생각해서 떼를 썼나보다. 머리 한 쪽은 민호를 원망하고, 다른 한 쪽은 나를 원망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나 때문 아니야? 삭막함이 남은 이 집에 홀로 끙끙 앓았다. 밥은 고사하고 물 마시는 것도 전부 귀찮았다. 내겐 허무함이 가득했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숨죽여 계속 울었다. 이럴 거면 왜 내게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주었나. 잘해주지나 말지. 과제할 때 그냥 과제만 했어야했는데 나는 왜 그 애정을 받아들였나. 애정 같은 건,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는데. 열병에 시달리는 것처럼 몸 상태가 최악에 치달을 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민호가 친구라며 소개시켜준 승윤이었다. 전화가 끝나는 순간, 나는 곧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민호에게 가야해, 그 문장 하나가 내 몸을 지탱했다.
“송민호, 나야. 문 열어.”
- 형. 일단 진정하고 내 말 잘 들어요. … 민호 아파요.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나와서 이야기 좀 해!”
- 3년 남았대요. 길어야 3년.
“흡, 민호야, 나와. 나오라고. 나와 봐, 문 좀 열어줘….”
- 민호도 저한테 그랬어요. 지금 속이 답답한 거 빼면 사지 멀쩡한데 이게 무슨 소리냐고. 영화처럼 쓰러지지도 않고 피 토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길어야 3년이냐고.
“제발. 나와서 이야기 좀 해. 흐어엉, 제발….”
- 계속 부정하다가 결국에는 자기는 곧 죽을 송장인데, 형이랑 어떻게 있을 수 있냐고…. 그래서 민호가,
온몸에 있는 힘을 쥐어짜 문을 두드렸다. 제발 문 열어줘, 민호야.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니. 넌 진짜 바보야, 멍청이야. 꺽꺽 울면서 애원조로 말하길 몇 번, 그제야 문이 열렸다. 코끝으로 술 냄새가 났다. 민호의 표정은 내가 여태껏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낮고 우울한, 그리고 무서운 표정에 나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김진우. 이게 무슨 짓이야.”
“민호야,”
“묻잖아. 이게 무슨 짓이냐고.”
“너 아프다며.”
“뭐?”
“다 들었어. 전부 다.”
“어디서 뭘 어떻게 들은 건지 모르겠다. 내 귀엔 그거 다 헛소리야. 그냥 가라. 형.”
“거짓말 하지 마. 표정은 왜 그렇게 엉망인데.”
왜 너는 내가 짓는 표정이랑 똑같은데. 우는 건 나인데, 왜 너도 울 것 같은데. 눈물도 많은 주제에. 억지로 현관까지 들어가자 문을 잡고 있던 민호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문이 세게 닫히고 나서도 나는 간간히 훌쩍였고 너는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였다가 얼굴을 손으로 세수하듯 쓸어내린 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형, 그냥 가줘. 제발. 못 들은 척하고 가줘.”
“싫어. 못 가. 안 가.”
“김진우.”
“싫어. 안 들을 거야. 안 떨어질 거야.”
네 품에 파고 들며 얼굴을 묻었다. 허리를 세게 끌어안아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내 팔을 붙잡은 네 손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간절했다. 절박했다. 계속 네 곁에 있고 싶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내 입에선 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 같은 부류의 말을 계속 하고 있었다. 결국 너도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말없이 나를 세게 끌어안는 몸짓에, 울어야 하는 건 너인데 내가 소리를 내어 울었다. 신파극이 따로 없었다. 그만큼 너나 나나 이별은 감당하기 너무 힘든 것이었다.
4.
비염도 유전인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한바탕 감기가 지나간 듯 했으나, 코는 여전히 훌쩍거려서 병원에 한 번 더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 입에선 ‘비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민호도 하루 종일 휴지 달고 다녔는데. 또 코를 훌쩍이는 모습에 가방에 넣어둔 휴지를 꺼냈다.
“민우야, 흥해. 흥.”
“흥!”
“이거 봐. 민우 코에서 나온 거다. 에이, 지지다. 지지.”
뭉쳐둔 휴지를 앞에 내밀자 민우가 놀리지 말라며 입술을 내밀었다.
“알았어, 알았어. 엄마가 놀려서 미안해.”
“흥! 민우 화나떠.”
“화났어?”
“…엄마가 민우 안아주면 화 풀릴 수도 있어.”
“그럼 당연히 안아줘야지.”
민우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금세 웃는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귀여운 녀석. 이렇게 단순한 점도 아빠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형도 만만치 않거든요, 라는 볼멘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너보다는 아니야. 와, 대박. 김진우 진짜 뻔뻔해. 그걸로 투닥투닥거릴 모습이 떠올랐다. 민호가 있다는 조건 하에 가능한 일이지만.
“엄마 우리 지금 어디가?”
“아빠 보러 가.”
“아빠아?”
“응, 아빠. 민우 아빠.”
오래간만에 민호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벨트까지 꼼꼼하게 메어주고 내 자리로 돌아와 시동을 틀었다. 매년 있는 기일 외에도 늘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일이다 육아다 이것저것에 치여 가야지라는 생각만 하고 가질 못했을 뿐이지. ○○추모공원. 네이비게이션에 장소를 입력하면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접어들면서 종알종알 떠들던 민우도 잠이 들었다. 옆을 힐끔 바라 보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손으로 틀어둔 라디오를 조용히 줄였다. 민호를 보러 가는 일은 설레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먹먹했다. 민호는 항상 기억에 품고 있지만 저편에 숨겨두는 사람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와서 숨겨둔다는 표현도 뭐하지만. 아직도 나는 현실에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퇴근하면 같이 돌아올 사람이 한 사람 더 있는데. 저기 문 열고 들어올 사람이 있는데. 닫힌 문을 빤히 쳐다보는 버릇이 생긴 것도, 민호 생각 하나에 웃었다가 울었다가 하는 일도 전부 내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친절한 목소리를 뒤로 주차를 마쳤다. 민우는 여전히 잠에 푹 빠져있다. 아이를 홀로 차 안에 둘 수 없어 품에 안고 챙겨둔 가방을 들었다. 눈앞에 빽빽한 나무들이 보였다. 저 사이에 민호가 있다. 민우 아빠가, 내 남편이, 우리 민호가.
0-4.
그 날, 울면서 내가 민호 품에 파고든 날엔 창 너머로 해가 뜨는 걸 볼 때까지 사랑을 나누었다. 섹스하면서도 둘 다 엉엉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쑤시는 허리를 붙잡고 겨우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자 술판이 따로 없었다. 회사는 그만 두었다고 했다. 어차피 살 날 얼마 안 남은 거 모아둔 돈 다 쓰고 죽을 심산이었단다. 그리고 억지로 목숨 이어갈 바에 할 거 그냥 일찍 죽는 게 낫다 생각고 해서 술을 대판 마셔댔다고 했다. 기가 찼다. 헛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술병을 한 곳으로 모았다. 헤어지자, 뭐다 한 번만 더 그런 소리해봐! 내 말에 민호는 그저 조용히 청소기를 돌릴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독립을 했다. 직장까지 다니는 아들놈이 독립하겠다는 말에 말리는 사람 하나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간절히 원한 독립은 단순하고 싱겁게 얻어졌다. 허탈하기 짝이 없었으나 한 편으로 매우 개운했다. 캐리어 하나 끌고 민호네 집으로 들어갔다. 날 반기던 민호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급하게 앞으로 뛰어왔다. 내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살피기 바빴다.
“얼굴이 왜 이래.”
“집에 결혼 할 사람이 있다고 했어. 결혼식은 생략하고 바로 혼인신고서 쓴다고 했다가.”
“혼인…신고서?”
“어. 너랑 나랑. 혼인 신고서 쓴다고 통보하니까 재떨이가 날아왔어.”
“…형.”
“퇴근하고 집에 오면 곰 같은 남편이 날 반긴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설레는 걸.”
아무렇지 않게 굴며 잠바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독립은 민호와 미리 의논한 사안이었지만 혼인 신고서는 좀 더 생각해보자며 민호가 나를 설득했다. 나는 시간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먹었으니까. 충분한 고민과 생각을 거쳐 내린 결정이었다. 민호를 마음에서 보내줄 자신도, 마음도 없었다. 술에 취한 어느 날에, 울면서 사랑 받고 싶다고 매달린 김진우와 그런 나에게 조용히 입술을 맞춰온 송민호를 기억하기에 더더욱. 결정에 대한 결과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말은 하지 않지만 하루하루가 초조했다. 민호의 겉모습이야 아직 멀쩡하지만 언제 쓰러질지 모를 일이었다. 민호는 침대 위에서 3-6개월 치의 생명 연장해서 뭣하냐며 수술 대신 약을 타왔다. 도긴개긴이지만 어차피 아픈 거 침상 위에서 골골거리는 것보다 내 옆에 있겠다는 게 민호의 생각이었다.
여러 차례의 대화를 걸쳐 우리는 혼인 신고서는 물론, 아이도 가지기로 했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건 내 욕심이 더 컸다. 나는 어떻게든 민호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려고 애썼다. 아이도 그 중의 일부였다.
아이를 가지기로 마음먹으니 식탁 위의 억제재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먹지 않았다. 모처럼 맞는 여유로운 주말이었다. 민호는 그림 그리기에 몰두해 있었고 나는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아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뉘였다. 감기라는 생각이 언뜻 스칠 즈음, 이불에 베여있던 민호의 페로몬향이 내 코를 거세게 자극했다. 아, 드디어. 망설임 없이 바로 민호에게 달려가 그 넓은 품에 안겼다.
“하읏, 아, 아으, 흐”
“이제는 가슴만 빨아도 바로 축축해지는 거 알아요? 봐봐, 빤지 얼마나 되었다고 밑에가 다 젖었어.”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애액을 훑은 손가락을 민호가 내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기나긴 전희였다. 쾌감을 온 몸에서 이끌어 낼 모양인지 평소보다 짙고 오랜 애무에 벌써부터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아래에서는 넣어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뜨거운 열을 내뿜는 구멍이 녹진녹진하게 수축하고 이완하기를 반복했다.
프리컴으로 축축하게 젖은 속옷이 벗겨졌다. 상체를 일으켜 아까부터 무섭게 발기한 민호의 것을 입에 담으려고 했다. 잠깐만, 민호가 아래로 내려와 헤드에 등을 기대고 내 엉덩이가 그의 앞으로 향하게 허리를 잡아당겼다. 엉덩이는 최대한 들어 올리고 상체는 내려 풍성한 체모 사이로 민호의 성기를 입에 담았다.
“으으음!”
손가락이 들어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뜨겁고 말캉한 게 비문을 건드렸다. 손 하나가 엉덩이 한 쪽을 단단히 붙잡고 남은 손이 아래로 내려왔다. 민호의 것을 물고 있는 입에서 뭉그러진 신음 소리가 나왔다. 혀의 돌기가 애널과 주름을 매만지며 구멍을 건드리자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아래를 흔드는 손길과 뒤에서 오는 자극에 신경이 쏠려 입 안에 있는 민호의 것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겨우겨우 느리게 쓸어 올리고 내릴 반복할 뿐.
민호 손에서 가버리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정을 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민호가 내 상체를 뒤집자 그의 배 위로 앉는 꼴이 되었다. 내가 뒤로 넘어지지 않게 다리를 세워 접은 덕분에 등을 기댈 수 있었다. 마주보고 있는 상태가 되자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다시 키스를 나눴다. 등허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앞으로 넘어와 젖꼭지를 꼬집었다. 그가 주는 자극을 마음껏 느끼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키스에 집중하느라 내가 다시 침대 위로 눕혀진 줄도 몰랐다. 다리 사이로 자리 잡은 민호가 다리 하나를 잡아 한 쪽을 허리에 걸쳤다. 민호의 것이 안으로 들어온다는 생각에 긴장과 흥분이 섞여 나를 보채게 만든다. 어서 넣어달라는 말에 민호는 요도를 천천히 비문에 갖다 대었다.
“하응! … 아, 흐으, 읏”
민호의 성기가 더 깊게 파고들 수 있도록 다리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움직임이 느려질수록 애가 타는 건 나였다. 천천히 나갔다가 한 번에 쾅하고 빠르게 들어오는 성기에 온몸이 반응했다. 다시 고개를 쳐 든 성기에서 묽은 액이 질질 흘렀다. 민호가 허리에 걸친 다리를 거칠게 잡아 풀더니 적나라하게 두 다리를 벌렸다. 민망한 자세에 얼굴 붉힐 세도 없이 수직으로 내려 박기 시작하는 탓에 나는 입을 벌리고 신음을 있는 대로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까 전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강하게 쾌락점을 찍어 누르는 행위에 눈물까지 고였다.
“너무, 아, 좋아! … 아앙! 어떡, 해, 에, 흐으”
“후우, 김진우, 진우야.”
“으읏, 미노, 미노야아, 윽”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민호의 페로몬마저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시원한 향이 코끝에 다가오며 파도처럼 덮쳤다. 점멸의 순간에 민호가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강하게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 이후로 우리는 몸을 계속 섞었다. 내 몸 모든 부분이 민호의 손길을 탔고, 서로가 떨어지면 죽을 것 마냥 입술과 몸을 붙였다. 이 시간 일분일초가 우리에겐 너무 소중했기에 더욱 절실했다.
몇 번의 정사인지 기억도 안날 무렵, 힘없이 그의 상체로 쏟아져 내렸다. 나를 품에 안아 옆으로 뉘인 그가 머리를 살살 쓸었다. 민호의 손길을 느끼며 쇄골 부근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나 따뜻한데, 이렇게나…. 이렇게나…. 문득 밀려오는 서러운 감정에 눈물이 났다. 우리 둘 다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어서일까.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은 민호가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내가 잠이 들 때까지도 사랑한다고 속삭여줬다.
5.
잠든 민우를 안고 위로 올라왔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자 풀내음이 밀려 왔다. 기억을 더듬어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 ‘송민호’가 적힌 명패를 찾는다. 얼핏 보면 다 똑같은 나무속에서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옆에 안내번호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겨우 명패를 발견한 나는 보자마자 인사부터 건넸다. 안녕, 민호야.
“여기 봐봐. 민우도 왔어. 많이 컸지? 민우가 피곤했나봐 여기 도착하기도 전에 잠이 들었어. 민우도 아빠한테 인사하면 좋을 텐데.”
민우를 고쳐 안으며 들고 있던 가방을 밑에 내려다 두었다. 말을 하려고 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웅크리고 풀기를 몇 번, 그제야 나는 안부를 물었다.
“민호야. 잘 지내?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 회사 일은 지치고 힘든데, 뭐 돈 버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그렇지? 근데 민우 얼굴만 보면 그거 다 잊어버려. 정말로. 어제는 민우가 미술대회에 그림 보낸 거 상 받아왔더라. 당신 닮아서 그림 하나는 야무지게 잘 그려. 우리 아들 화가 시킬까? 당신도 미대 다녔잖아. 나는 가위질도 잘 못하는데 민우는 뚝딱뚝딱 잘해. 할 말 되게 많았는데 지금 막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된다.”
후우, 숨을 몰아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민우가 되게 아팠어. 요새 날씨 춥잖아. 내가 바쁘다고 우리 민우 옷도 제대로 못 챙겨줘서 감기에 걸렸어. 진짜 나쁜 엄마지? 새벽에 끙끙 앓으면서 땀이란 땀은 다 흘리고 있는 거야. 급하게 애 안고 밖을 나왔는데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덜컥하는 기분이었어. 민호 네가 너무 아파서 쓰러진 날이 생각났거든. 너무 무섭고 애는 아프다고 우는데 나는 이것저것도 못하고…. 아, 진짜.”
안 울려고 했는데. 그 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땐 울지 않았는데, 왜 지금에서야 터지는지. 그간 쌓아둔 게 많았나보다. 삭이고 또 삭힌 케케묵은 감정들이 잘 참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민우가 깰까봐 애써 입술을 꾹 물었다.
“민우가 겨우 잠든 거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나는 또 출근 생각이 나는 거야. 애가 아픈데. 출근해야 해. 나한테 너무 화가 났어. … 있잖아. 가끔씩은 민우가 울면 나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애 따라서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야. 내가 너무 서툴러서 그런가봐. 나도 엄마가 처음이니까. 민호야, 나는 내 나름대로 민우랑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이젠 정말 모르겠어.
0.
좋아하던 술을 일체 끊고 음식도 가려 먹은 지 한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거하게 헛구역질을 한 나를 본 민호가 곧바로 테스트키를 사왔다. 정확히 빨간색 두 줄이 떴다. 임신이었다. 그 날 이후로 전보다 더 조심히 몸을 움직였다. 나보다 민호가 더 안절부절 못했다. 샤워라도 하면 문 앞에서 계속 “형, 도와줄까?”라고 물었다. 아직 배도 안 불렀는데 영 불안한 모양이었다.
4개월쯤 지나니 서서히 신체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저리거나 붓고, 허리와 등이 쑤시기 시작했다. 배가 불러오자 민호는 저가 씻게 주겠다고 난리였다. 다른 목적이 있는 거 아니고? 놀리듯이 묻자 민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런 몹쓸 인간은 아니야! 누가 뭐랬나. 키득키득 웃으면서 태교용 음악을 틀었다. 우리 당분간 이런 노래만 들어야 해. 감상으로 시작해서 결국 잠으로 끝이 났지만, 자주 들으려고 노력했다.
입덧이 확실히 고역이긴 했다. 밥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났다. 낮에 그렇게 못 먹다가도 밤이 되면 식욕이 돌아왔다. 왜 그러는지 정말 의문이었다. 자다가도 음식이 먹고 싶어 일어났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일이 늘어났다. 아마 종류란 종류는 다 시켜 먹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민호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버거워했다. 이러다 영영 잠에 드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자는 시간이 늘었다. 이것 외에도 몸에 이상이 있는데 숨기는 게 아닌지,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누가 지금 누구를 걱정하는가 싶었다.
민호는 꽤나 태교에 열심이었다.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배에 몇 번이고 뽀뽀를 하고 쓰다듬어 내린 줄 모른다. 내 배는 이 이상 부풀면 터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출산할 시기가 임박하자 우리는 유아용품을 구입했다. 조그마한 신발이 민호 손 위에 올라가자 잭과 콩나무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귀여워서 어떡해! 고 큰 덩치로 방방 들떠있는 민호를 보자 문득 가슴이 저릿했다. 내가 아이를 품고 있는 동안, 민호는 서서히 말라갔고 병원에 들락거리는 횟수도 늘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이별을 준비해야했다.
출산 예정일보다 일찍 아이가 우리를 찾아왔다. 쿡쿡 쑤시는 배를 부여잡고 병원엘 갔다. 괴로워하는 내 모습에 민호는 제 입술만 짓이기며 내 손을 붙잡았다. 분만실로 들어가고,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를 만났다. 아이를 보자마자 아픈 것도 사라지고 웃음이 터졌다. 진한 눈썹이 영락없는 송민호 아들이었다. 눈도 작고 코도 작고 입도 작고, 다 작아. 신기해하는 나를 보며 민호가 입을 열었다.
“아까 형이 그렇게 힘들어 하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더라. 속상하고 화가 났어.”
“계속 곁에 있어 줬잖아. 그럼 됐지, 뭘.”
안녕, 민우야. 엄마야. 미리 지어둔 이름을 부르며 볼을 부볐다. 입 안에서 아직 민우라는 두 글자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엄마’라는 호칭도 낯간지러웠다. 아직 제대로 눈 뜨지도 못하는 아이를 민호와 나는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커주렴, 작은 소망을 담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민호는 아이를 보는데 소질이 있었다. 내가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거리면 민호는 차분하게 아이를 안고 등을 두드렸다. 아이의 웃음을 보기 위해 온갖 표정을 지었고, 몇 번이나 안고 뽀뽀했는지 모른다. 민우가 주는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에겐 힐링이자 큰 행복이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민호는 민우가 100일을 조금 넘길 때까지 우리와 함께 있었다. 멀쩡한 몸이 나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약을 꾸준히 먹고 있었다고 해도 병의 속도는 늦출 수가 없었다. 갑자기 쓰러진 민호는 며칠 동안 그렇게 싫다던 병원 침대 위에서 앓기만 하더니, 결국 눈을 뜨지 못했다. 영영. 간다는 인사도 없이.
6.
고 작은 손이 내 얼굴에 닿았을 때, 놀란 내가 아이를 바라보자 민우는 내게 이야기했다. 울지 마, 그 순간 나는 나를 제일 사랑해주던 누군가와 겹쳐 보이는 환상을 보았다. 엄마 울지 마. 자그마한 손이 내 뺨을 닦았다. 으응, 엄마 안 울어. 안 울게. 뺨 위로 올라온 손을 맞잡아 쥐었다. 민우는 분명 선물이었다. 민호가 이 세상에 살았다는 흔적이자, 내게 남겨진 소중한 선물이었다.
“민우야, 아빠야. 인사해야지. 아빠, 안녕.”
“아빠. 안녕!”
엄마, 나 내려죠. 내 품에서 내려온 민우가 나무로 달려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그 나무를 감싸 안았다. 다 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걸 안으려고 애를 썼다. 아빠, 이렇게 하면 안 춥지? 왜냐면 내가 따뜻하니까! 그 모습에 울던 것도 잊어 버리고 웃음이 났다. 뭐가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종달새처럼 지저귀는 모습을 나는 한참동안 눈에 담았다.
7.
5시 59분.
고대하던 퇴근 시간이다. 늘 으레 그러하듯 누구보다 일찍 6시가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사원증을 찍는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내가 제일 먼저다. 동료 하나가 오늘은 내가 1등 하려고 했는데, 진우씨를 이길 수가 없어 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이기시려면 가방 싸는 법부터 연습해야할 걸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도착했다.
밖에 나가기 싫을 정도로 추워진 날씨에 시동을 켜고 제일 먼저 한 일은 히터를 트는 것이다. 민우 춥겠다. 차를 부드럽게 몰아 유치원으로 향했다. 빡빡한 퇴근길은 몇 번을 지나도 도통 적응이 되질 않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유치원 행사나 민우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를 기다린다. 저 멀리서 우당탕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그 쪽으로 돌리면, 오늘도 역시 가방도 제대로 안 메고 뛰어오는 철부지 하나가 있다. 끈 달린 벙어리장갑을 한 쪽에 끼고, 한 쪽은 바닥에 질질 끌면서 나를 향해 급하게 달려왔다. 저러다 또 넘어지는…이크, 생각하기 무섭게 쿵하는 소리를 내며 민우가 넘어졌다.
“민우야.”
“…나 괜차나!”
민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릎을 살살 매만졌다. 그제야 장갑도 가방도 똑바로 입고 걸어온다. 그 모습이 너무 의젓해 보였다. 두 팔을 벌리자 민우가 품 안으로 들어왔다. 민우 안 울고 대단한데, 선생님도 놀란 눈치였다. 난 씩씩하거든여! 민우의 말에 선생님과 내가 동시에 웃었다.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유치원을 나서며 민우는 후후 입을 불었다. 입에서 나오는 김을 보고 용가리라며 용을 흉내 내기 바빴다.
“민우, 아까 안 아팠어? 괜찮아?”
“으응, 지금도 조금 아픈데 참을 수 이쪄.”
“우리 민우 멋있는데.”
“그러엄!”
의기양양한 모습이 꼭 송민호 같았다. 어떻게 이리 아빠를 쏙 빼다 닮을 수가 있지? 민우와 사소한 이야기로 떠들며 집으로 들어가는 길, 느닷없이 작은 손가락이 하늘로 향했다. 눈이다! 누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하얀 눈들이 포근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올해의 첫 눈이었다.
- 結
안녕하세요! 파란입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다들 옷은 따뜻하게 입고 다니시죠??
드디어 마감을 했습니다 이만사천자를 쓰며 하얗게 불태웠네요
월간 송진 창간호에 참여하게 되어 너무너무 기뻤고 이렇게 끝을 맺으니 시원섭섭합니다 쓰고 퇴고하면서 '악! 너무 부족해! 이걸 어떻게 내놓지?' 이 생각만 오조억번한 것 같아요;-;
처음에 이 글은, '때로는 아이가 울면 나도 따라 울고 싶었다'는 문장과 임출육(임신육아출산)이라는 소재에 꽂혀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건지 아직도 의문이에요...
인물들의 감정선을 좀 더 표현하고, 각자의 사정이나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미 방대한 분량에(...) 기타 문제로 그러지 못했습니다 수위 부분에서 기력을 소진한 것도 있어요 허헣 진우가 왜 집에서 완전히 독립하였는지, 민호가 진우와 이별을 결심했을 때 마음이나, 혼인신고서와 임신을 주저한 이유, 입덧하는 진우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민호, 진우가 민호를 보내는 과정 등을 더 세심하게 다루지 못해 아쉽고 또 쓰면서 표현의 한계를 많이 느꼈습니다 읽으시면서 충분히 읭? 하셨을 거에요 쓰고 나니 진짜 못 적은 거 많네요(ㅠㅠㅠㅠ) 제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상,하로 나누어서 내용을 보충하거나, 민호 입장에서 외전을 쓰고 싶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거 포함해서요!
이 긴 글과 제 사담까지 읽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월간송진에 참여해 글을 쓸 수 있어 너무 행복했습니다
관리자님께도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세요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D
- 파란 드림
Written By. PARAN (Twitter Account : @something_clou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