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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26. 21:54




월간송진 11월호 Fan Art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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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 Art Part. 1 (Created by. 남중생)
2017. 11. 26. 21:52




월간송진 11월호 Fan Art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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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dish Winter (Written by. 보나)
2017. 11. 26. 21:45

BGM Yiruma / Autumn finds Winter





Reddish Winter

 



w. BONA



 

유독 가벼워진 공기가 이리저리 한기를 옮기고 다녔다. 진우는 학교를 앞두고 남은 세 발자국을 다 채우지 못한 채 멈춰 섰다. 미열이 온 몸에 깃들어 볼이 홧홧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미미한 근육통도 그를 못살게 굴었다. 늘 그랬다. 진우는 몸살감기와 함께 겨울을 맞이했다.

 

* * *

 

진우는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진 두 책걸상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다 쭈뼛거리며 제 자리를 차지했다. 몸이 물먹은 솜 마냥 축 늘어졌다.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책상 위로 엎드렸다. 옷자락에 묻은 서늘함이 달아오른 열을 달래주었다. 겨우 붙잡고 있던 의식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이내 굳게 닫혀 잠에 빠져들었다.

 

팔이 저리기 시작했다. 때 아닌 단잠에서 깨게 된 허무한 이유였다. 진우는 더운 숨을 몰아쉬며 엎드린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야가 분명치 않았지만 곧 빛을 되찾았다. 곧 벽시계에 맞춰진 초점은 가히 기함하듯 커다래졌다.

 

뭐야. 수업시간 지났어?”

자습하래. 점심시간까지 쭉.”

 

진우가 스프링마냥 몸을 튕기며 일어났다. 두통은 쪽잠을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정수리를 짓눌렀다. 앓는 소리가 미약하게 울려 퍼졌다.

 

아프면 전화하고 못 나온다 하지 그랬어.”

내가 또 송민호 배려했지. 고등학생 달랑 둘 있는 여기서 나 없으면 하루 종일 초등부 애들한테 축구 심판해달라고 불려 다녔을 걸? 그나저나 진짜 나 때문에 수업 안 하는 거야?”

. 네 말대로 고등학생 달랑 둘 있는데 하나 데리고 무슨 수업이야. 너 코도 골았어.”

소리컸어?”

선생님도 들으셨어.”

망했다. 깨우지 그랬어!”

건드리지도 못하게 곤히 자고 있었어.”

 

민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참동안 쥐고 있던 보온병의 뚜껑을 열었다. 콸콸 쏟아져 나오는 차는 노랗고 달콤한 향을 가득 담고 있었다.

 

유자차야?”

. 목 아파서 들고 왔는데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여기 있네. 마시고 더 자. 잠꼬대해도 모른 척 해줄게.”

 

진우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을 받아들었다. 입술과 혀에 닿은 신 맛이 금방 사라지고 목을 온하게 데워주었다. 지난밤부터 저를 괴롭히던 긴장감이 약간이나마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민호는 차가 바닥을 드러낼 때 마다 말없이 채워주기 바빴다.

 

고마워.”

아냐. 큰 것도 아닌데.”

 

진우는 짤막한 감사함을 건넴과 동시에 민호의 귓바퀴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묘한 붉은 빛을 띄우고 있었다. 민호는 늘 제 말 한마디, 한마디에 표정보다는 귀로 크게 반응했다. 진우는 그곳에서 눈길 한번 떼지 않고 다시 책상 위로 엎드렸다.

 

이따 병원 같이 가자.”

알았어.”

민호야.”

.”

너 귀 빨간 거 되게 귀엽다?”

잠이나 자. 눈에 졸음이 가득하네.”

 

버베나 향 베인 손바닥이 눈가로 드리워졌다. 진우 아직 안 잔다. 라는 엄포가 무색하게 잠의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나보다. 몇 번이고 움직이던 눈 주변 근육들이 잠잠해지더니 곧 소리 소문 없이 멈춰버렸다. 민호는 제 의자에 걸쳐있던 코트를 이불 삼아 등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괜스레 제 귀를 만지작 거려보았다. 어쩐지 사소한 행동으로 전부 들통 난 것 같아서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 * *

 

자전거 타자.”

버스 타야 빨리 가.”

겨우 15분 차이인데?”

“15분 동안 냉기 맞고 병원 갈 네 몸은 생각 안했어?”

그래도 자전거.”

그럼 내가 뒤에 탄다?”


진우는 어이없다는 듯 우와 하며 입을 한껏 벌렸다. 그러다 환자를 이렇게 대한다며 우리의 3개월 우정 말짱 도루묵 됐다며 자신이 무조건 뒤에 타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했다. 민호는 그 모습을 오롯이 내려 보고 있자니 볼 안쪽을 깨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저 한번 떠보려고 던진 말에 저리 발끈해서 종알거릴 줄은 누가 알았겠나. 결국 뒷좌석은 진우의 차지로 결론지어졌다.

 

얼마 전 새로 도색한 학교 정문을 빠져 나오자 넓게 뻗은 길이 드리워졌다. 바닥은 겨울비를 한껏 머금어 짙은 색을 띄고 있었다. 민호는 행여 길이 미끄러울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전거를 몰았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바람이 온 얼굴의 솜털을 간질였다.

 

이 길은 언제 봐도 운치가 좋아. 봄에는 더 예쁘지?”

여기 있는 나무 대부분이 벚나무야. 꽃잎 날리는 재미 보면서 봄 나는 거지 뭐.”

 

진우는 민호의 허리를 세게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 작고 한적한 시골 마을로 전학을 오게 된지 세 달이 조금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부모님은 늘 고향으로의 회귀본능을 지니며 도시 생활을 견디는 사람들이었다.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던 소원을 허락 해준 사람이 다름 아닌 진우였다. 자식의 교육환경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늘 계획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처음은 걱정이 한가득했다. 서른 명 남짓 하는 반의 일원에서 초, , 고등학생을 합한 전교생이 겨우 열다섯인 학교에서의 생활은 도무지 상상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와 같은 고등부 출석부에 적인 학생이 겨우 한명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뛰어서라도 다시 살던 곳으로 가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인간은 무섭도록 적응이 뛰어난 동물이지 않은가. 매우 유동적인 학교 운영시스템 덕에 책보다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 중 하나가 줄기차게 붙어 다니는 민호였다. 처음 제 집 이사를 도와주며 마주친 그와 낯가리기 바빴던 나날들이 이제는 제법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요즘이었다.

 

여기는 눈이 많이 와?”

. 운동장 헤치면서 가기 딱 좋을 만큼? 청소하기 귀찮아.”

이젠 내가 같이 도와주면 되잖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서운하다거나 짜증을 내고픈 생각은 전혀 없는 진우였다. 이미 예쁘게 솟아있는 광대뼈가 숱한 대답과 단어들을 대신해주기 때문이었다.

 

읍내는 점심시간이 지났지만 5일장 때문인지 여전히 사람들로 붐벼댔다. 자전거 바퀴가 병원 간판이 보이는 바로 아래 멈추어 섰다. 진우는 아까 없던 기침을 하며 바닥에 발을 디뎠다.

 

거봐. 금방 기침하잖아. 오늘 목도리 안 하고 왔어?”

원래 쓰던 게 보풀이 너무 심해서 이사하면 새로 사야지 하고 버렸지.”

 

진우의 눈매가 미려한 호선을 그렸다. 민호는 제가 하고 있던 노란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작은 얼굴이 감으면 감을수록 소멸되는 기분이었다. 진우는 스스로 비비던 손을 코트 주머니로 쏙 집어넣었다.

 

들어가자.”

먼저 들어가. 나 잠깐 어디 들렀다 갈게.”

뭔데, 뭔데! 나 몰래 찹쌀붕어빵 사먹으려고 하는 거지?”

너 은근 먹고 싶은 거 돌려 말한다?”

알면 그것도 같이 사오고. 빨리 갔다 와.”

들어가서 코부터 닦아.”

비염 송민호 선생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결국 뜻하지 않은 웃음이 터졌다. 민호는 거의 등 떠밀 듯이 진우를 병원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자그맣고 동그란 뒤통수가 접수처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모습을 본 후에야 발을 돌릴 수 있었다.

 

* * *

 

진우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입구가 꽉 묶인 검은 봉지의 정체는 무엇인지 말이다. 찹쌀붕어빵일리는 만무했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2000원 어치 모두 진우의 작은 입으로 직행했기 때문이다. 비밀의 봉지는 민호의 손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학교로 돌아와서도 책상에 걸어두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리 물어봤자 답해주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진우는 영어 지문을 해석하다 불쑥 불쑥 고개 드는 궁금증을 풀지 못해 안달이 났다.

 

.”

…….”

어라, 못 들은 척 한다?”

나 공부 중이잖아.”

그래. 드래곤볼 정독 중이시잖아요. 쟤 뭔데?”

별 거 아냐. 거기 3번 문제가 답 적어달라고 울고 있으니까 빨리 풀어.”

이거 풀면 알려 줄 거야?”

아니.”

치사한 놈.”

 

진우는 다시 문제를 곱씹고 쓸데없이 어려운 문제라며 괜한 화풀이를 했다. 민호는 말의 리듬이 저를 향한 투정이 담겼다고 느꼈다. 그래서 더 답해주고 싶지 않았다. 진우를 알고 난 이래로 가장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내심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 * *

 

하교 길은 짙게 진 노을이 요요했다. 진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뇌리 깊숙한 곳 까지 파고드는 열을 이겨 낼 재간이 없었다. 민호의 자전거를 빌려 돌아가고 싶었지만 중심을 잡고 앉아있는 것도 무리라 판단하여 버스에 몸을 실었다. 민호는 정류장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가벼이 손을 흔들었다. 물론, 진우는 앉자마자 눈을 감는 바람에 그 살갑고 간지러운 안녕을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버스가 떠났다. 차체가 사라지고 고요가 깃들자 민호는 자전거 손잡이에 달린 봉지를 꾹 쥐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진우의 총기 어리고 말간 눈이 내용물의 정체를 물을 때 마다 말해주고 싶어서 입이 간지러웠지만 꾹 참길 잘했다고 스스로 다독이는 민호였다.

 

* * *

 

[ 참치죽 가져다주러 간다. 5분 뒤에 문 좀 열어줘. ]

 

진우는 따뜻한 안감이 덧든 겉옷을 걸쳐 입었다. 곧 후드를 뒤집어쓰고 끈을 당겨 벗겨지지 않도록 고정 시켰다. 방을 나서자 소소한 간식거리를 손에 든 엄마와 마주쳤다.

 

이 밤에 어디 가게?”

민호가 참치죽 가져다준데. 요 앞에 나갔다 올게요.”

민호는 애가 참 살갑기도 하다. 아침에 일찍 와서 너 많이 아프냐고 무슨 차 좋아하냐고 캐묻고 가던데.”

 

진우는 평소 잘 구겨 신는 운동화에 발을 쏙 집어넣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 혹시 유자차라고 말해줬어?”

. 네가 뭘 가리는 편은 아닌데 개중에 그걸 잘 마신다고 말해줬지.”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분명 본인 목이 아파서 들고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기분 좋은 헛웃음이 나왔다. 온갖 생색을 내도 모자랐을 법한 상황에서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거짓말을 쳤다는 게 조금은 깜찍하게 봐줄만 하다고 생각했다. 진우는 마당으로 나서며 괜히 자고 있는 동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대문을 밀어 열었다. 민호가 작은 냄비 하나를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진우는 큼 소리를 내며 헛기침을 뱉었다.

 

빨리도 나온다.”

5분 쟀어. ? 그거.”

 

민호가 하루 내내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던 비밀의 검은 봉지도 함께 있었다.

 

계속 대답 안 해준 거 미안해서 알려주러 왔어?”

, 겸사겸사. 일단 이것부터 들어.”

, 따뜻하다. 안 그래도 입맛 없어서 밥 안 먹고 있었는데. 가족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내가 만들었는데?”

 

민호는 멋쩍은 듯 손가락 마디로 코를 비비다 말고 발을 뿌리박은 상대의 눈과 대면했다. 아무런 대꾸도 없는 저 반응이 미치도록 신경이 쓰이고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양가 없는 걱정과는 달리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또 뭘 하고 있어서 카톡 답이 없나 했더니 이거 만들고 있었어? 내가 먹어보고 진슐랭 스타 받을만한지 평가해줄게.”

약간싱거울 수도 있어.”

 

진우는 품에 안긴 냄비 뚜껑을 보며 신발 아래 감춰진 발가락을 움찔거렸다. 정말 이상하게도 어색한 순간이었다.

 

나 유자차 안 좋아해.”

 

정적을 깨부순 한 마디였다.

 

너희 어머님이 너 유자차 좋아한, 그러니까.”

농담도 못하냐. 왜 이렇게 쩔쩔매?”

 

역시 단순한 상대를 가벼운 말장난 속에 가두는 것만큼 흥미 생기는 일도 없다. 진우는 눈동자를 들어 올려 방심하고 있을 민호의 귓바퀴와 인사했다. 물론, 날씨 탓일 수도 있겠지만 점점 선홍빛이 짙어지고 있었다. 민호는 긴 호흡을 뿌리며 팔에 걸고 있던 문제의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들어가서 열어봐.”

내꺼였어?”

. 나름의 서프라이즈 랄까?”

너 모르지?”

?”

너 가만 보면 진짜 귀여운 구석 있어.”

알아. 그러니까 들어가서 밥 먹어. 약도 챙겨 먹고.”

갈 거야?”

우리 집이 저긴데 가야지 그럼.”

내 감사 인사 안 듣고 가려고?”

…….”

고마워. 오늘 하루 전부 다. 잘 가.”

 

진우는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뛰어 들어갔다. 미지의 검은 봉지가 온기를 품은 음식보다 미치도록 궁금했기 때문이다. 냄비는 제 책상 위 한자리를 차지했고 침대에 걸터앉아 리본묶음을 툭 하고 풀어냈다. 주름진 봉지는 바스락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토록 소중히 품고 있던 물건은 다름 아닌 빨간 목도리였다.

 

원래 쓰던 게 보풀이 너무 심해서 이사하면 새로 사야지 하고 버렸지.’

 

설마. 그 말 때문에 산거야?”

 

진우는 보들보들한 감촉에 길이까지 적당한 목도리를 한참이나 쥐고 있었다. 힘을 주어 만질수록 직접 골랐을 민호의 얼굴이 얼핏 떠올랐다. 무언가 고민 할 때 마다 미간을 옅게 찌푸리고 눈동자를 이리 저리 굴렸을 모습이 선했다.

 

대체 어디까지 놀래 키려고 그러는 거야.”

 

찬기 머금은 손바닥이 진우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 여전히 피열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감기 때문인지 예상 못한 선물 때문인지는 혼자만이 알고 있는 비밀로 남아있을 것이다.

 


* 목도리가 가지는 선물의 의미 중 하나는 당신을 제 마음 속에 두고 있어요.’



첫 시작을 함께 하게 된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_*




Written By. BONA (Twitter Account : @330__926)

내 마음 당신에게 (Written by. 열정맨)
2017. 11. 26. 21:37

BGM 검정치마 / EVERYTHING


 



내 마음 당신에게



w. 열정맨



 

 

5년간의 연애가 끝났다. 진우에게 2000일 동안 우주였던 사람은 먼지가 되었다. 그는 작은 입자로 나눠져 흩어졌다. 우주가 사라진 행성은 부서졌다. 22살에 시작된 첫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남은 건 먼지와 눈물밖에 없었다. 그가 사라졌고, 진우에게는 신경쇠약이 생겼다. 조울증이 찾아왔고, 불면증이 도졌다. 수면제 서너 알을 억지로 입으로 털어놓고 나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물도 잘 마시지 않아 빠짝 말라버린 입에는 음식물이 들어가기만 하면 도로 역류하기 일쑤였다. 보기 좋게 잡혀있던 몸은 점점 말라갔고, 빛나던 눈은 생기를 잃어갔다.

 

근 한 달을 미친 사람처럼 지내던 진우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다. 진우의 우주였던 사람의 후배, 민호였다. 그는 반 쯤 맛이 가버린 진우를 처음으로, 유일하게 찾아왔다.

 

“..., 밥 먹자.”

 

민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안부를 묻는 말도, 위로를 담은 말도 아니었다. 그 말에 진우는 그동안 지겹게도 흘리던 눈물을, 이젠 영영 말랐을거라 생각했던 눈물을 다시 쏟아내었다. 현관 앞에 가만히 서있던 민호는 몸을 발발 떨며 우는 진우의 어깨를 안고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절반의 물건이 빠져버린 집은 냉했고, 공허했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두 사람 사이에는 별 말이 오가지 않았다. 버틸만하냐, 많이 힘드냐. 따위의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말은 일체 나오지 않았다. 최소한의 예의였다. 민호는 다만 그의 두 눈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제대로 안 챙겨먹었지? 얼른 먹어. 진우의 고개가 작게 끄덕거렸다. 묽게 끓인 흰 죽. 진우의 첫 식사였다. 모래를 삼키는 것처럼 괴롭지도, 역류하지도 않는 밥을 먹었다.

 

밥을 먹게 되니 최악이었던 몸 상태는 꽤나 금방 회복되기 시작했다. 힘이 없어 축축 쳐지지 않았고, 썩은 동태 눈깔이던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밥을 다 먹은 뒤에야 진우는 겨우 한 마디 했다.

 

민호야, 내가 밥 먹을 자격이 있어? 그 물음에 민호는 지금껏 살아온 25년 중에 가장 열변을 늘어놓았다. 당연하지, . 산 사람은 살아야 될 것 아니야. 근영이 형도 형 이렇게 정신 못 차리고 힘들어하는 모습 보기 싫을거야. 얼른 털어내고 일어나야지. 얼마가 걸리든, 이제는 ... 잊어야 해.

 

잊어야 하는구나. 진우가 대답했다. 맞네. 잊어야 돼. 근데, 아직 한 달이야. 난 걔랑 오 년을 만났어. 아직도 눈 감으면 걔 얼굴이 떠오르고,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아직은... 전혀 잊혀지지가 않아, 민호야. 다시 울 듯한 표정의 진우에, 민호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형에게 근영이 형이 소중했듯이 나도 그 형이 소중한 사람이었어. 물론... 우리의 소중함은 조금 다르지만. , 얼마가 되더라도, 근영이 형을 마음에 반절은 묻어놓더라도 형이 좀 편해지길 바라.

 

노력해볼게. 고맙다, . 나 보러 와줘서. 예전에 군더더기 없는 그 밝은 미소만큼은 아니었지만 작게 입꼬리를 올린 진우가 아까와는 반대로 민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시간을 확인한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어, 갈게. 첫마디처럼 간결한 인사에 진우가 조금 더 웃음을 띄워냈다.

 

그가 나가고, 다시 진우만이 남았다. 단지 공허할 뿐이라고 느껴졌던 공간에는 아주 조금, 온기가 돌았다. 그 날, 수면제는 필요 없었다.

 

-

 

시간이 거듭했고, 낮과 밤은 반복되었으며 계절은 어느 덧 세 번이 바뀌었다. 가을이었다. 시간은 늘 흐른다는 법칙에 맞게 진우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고, 올 스톱이던 사회생활도 다시 시작됐다. 그간에 그의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은, 당연하게도 민호였다. 묵묵히 그의 옆을 지켰고, 시간만 나면 집을 찾아와 조금은 귀찮게 굴었다. 이제 진우에게서는 10개월 전의 폐인 같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절반 정도는 그를 잊었다. 반은 가슴에 묻었고.

 

민호가 요즘도 근영이형 생각나? 물으면 아니, 이젠 목소리가 가물가물하네. 라고 답할 정도였다. 그래도 첫사랑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은 사실이네. 진우가 멋쩍게 웃으면 민호도 따라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나도 첫사랑 아직도 생각나는데, . 6년이 지났는데도.

 

진우와 민호가 함께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다. 그 속에서 진우는 안정을 찾아냈고, 호감을 키워나갔다. 진우에게 그는 빛이었고, 구원자였다. 영원한 어둠 속에 잠식됐던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운 왕자 쯤. 언제 아팠냐는 듯이, 그 사람은 점점 흐려져 갔고 본래 흐렸던 민호는 뚜렷해져 갔다. 또렷히 보이는 그를 보며 진우는 부정할 수 없었다. 세 계절 만에, 얼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는 사실을. 힘들 때 옆에 있어준 사람이라 감사한 마음일거라 생각했지만 감사함과는 영 다른 느낌이었다. 민호와 있을 때면 다른 잡념이 떠오르지 않고, 오직 그만 보였다. 그를 제외한 모든 게 뿌옇게 흐려진 것만 같았다. 빼도 박도 못하는 사랑의 서막이었다.

 

그 무렵에 민호는 사랑을 말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고민하는 나날이었다. 가장 걱정인 부분은, 형이 시작을 무서워하면 어쩌지_였다. 무너지는 그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봤고, 회복하는데 거의 일 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깊숙한 곳 어디든 두려움이 남아있을 가능성도 제외할 수 없었다. 민호는,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진우를 더 이상 보기 싫었다. 진우를 남겨둔 채 홀연히 떠나가버린 그 사람은 잊고 웃을 일만 있기를, 행복함만 느끼기를 바랐다. 이제야 간신히 아픔을 잊은 진우를, 공연히 제가 휘적이게 되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사랑을 거절당하는 것도, 그가 다시 울적해지는 걸 보는 것도.

 

-

 

끙끙 앓기만 하다 짧은 가을이 지나갔다. 일 년이었다. 진우의 우주가 사라졌다가 다른 세상이 만들어지기까지. 낙엽은 다 떨어졌고, 날은 추워져 손과 발이 어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곧 크리스마스였다. 잘 알지 않는가? 누구든, 그 날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도 막상 그 날이 되면 괜스레 설렌다는 것.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이브에, 민호와 진우가 만났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예정인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기만 하면 들리는 카페에 민호가 꽤 긴장된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탄절을 핑계로, 진우에게 사랑을 얘기할 생각이었다. 약속된 시간이 가까이 되자 진우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민호가 벌써 왔나, 카페를 두리번대던 진우가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먼저 와 있었네?”

준비가 일찍 끝나서. 형거 시켜놨어, 앉아.”

 

센스 있네. 고마워. 맑게 웃은 진우가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눈 오는 것도 썩 좋진 않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따듯한 데 앉아서 보기만 하는 건 그나마 괜찮다, 그치?

 

예전처럼 다시 말이 많아진 진우의 얼굴을 보던 민호는 멍해짐을 느꼈다. 막상 얼굴을 보니 얘기를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카페에서는 별 시답지 않은 얘기들이 오고 갔다. 너 졸업하는데 뭐 갖고 싶은 건 없냐, 올해 승윤이 다시 한국 들어온다더라, 승훈이 형 대학원 간다더라... 같은. 영양가 적은 대화를 하다, 크리스마스 이븐데 술 먹을래? 오랜만에. 라는 진우의 제안에 카페를 나섰다.

 

고기집으로 가는 와중에도 눈이 내렸다. 길이 조금 미끄러운 탓에, 진우는 여러 번 미끄러졌고 결국 민호에게 업히다시피 꼭 붙어 갔다. 겨우 겨우 도착해서야 민호는 식은땀을 훔칠 수 있었다.

 

오늘이 뭔 날인가 싶었다. 평소에는 많아도 소주 두 잔이면 더 이상은 마시지 않던 진우가 연신 술을 마셔대고 있었다. 잘 익어가는 고기도 열심히 먹어대면서. 무슨 일 있어? 걱정이 담긴 민호의 말에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며 혼자 한 병 반을 비우던 진우가 결국 취해버렸고, 테이블에 고개를 박았다.

 

, 또 언제 집까지 데려다주지. 오늘은 꼭 고백하려고 했는데, 망했다. 그 탓에 입맛이 썼다.

 

가게에서 나올 때는 12시가 다 되어 있었다. 여전히 눈은 내렸고, 조금 쌓인 탓에 미끄럽지는 않았다. 찬바람을 맞으니 정신이 조금 드는 지 민호의 등에 업혀있던 진우가 앓는 소리를 냈다. 민호야... 미안. 나 오늘 좀 많이 마셨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지, 진우는 틈새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민호야. 나 이제 걔 생각 많이 안 난다. 작년에는, 진짜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거든. 걔 없는 내가 상상이 안 가고, 내 옆에 더 이상 걔가 없는 게 너무 무서웠어. 아무리 울어도 다시는 못 만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어. 그래서 평생 근영이 생각만 하다 죽을 것 같았어. 이제 내 인생에는 사랑이 없을 것 같았다? 근데... 나 진짜 나쁜 놈인가봐. 근영이 없어진 지 일 년 밖에 안 됐는데... 좋은 사람이 생겼어.

 

민호의 걸음이 멈췄다. 그러자 으차, 하고 진우가 내려왔다. 누군데요, 형이 좋다는 그 사람이. 울음이 억눌린 목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가 싱긋 웃었다.

 

여기까지 나 업고 온거야? 힘들었겠네. 저기 봐, 앞에. 그의 말에 앞을 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겨울의 한강이 보였다. 애처럼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민호야.”

 

내가 좋다는 사람, 너야. 그 말에 민호는 애써 눌러 담던 눈물을 결국 왈칵, 쏟아냈다. 일 년 동안 고마웠어. 이제 우리, 어정쩡한 사이 말고 애인하자. , 혀엉...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단 말이야...

 

민호에게 있어서는 몇 개월만에 맺은 결실이었고, 진우에게는 온 세상이 다시 만들어진 것이었다. 여전히 눈은 내렸다.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폭죽이 터졌고, 진우가 민호의 품에 안겼다. 날은 추웠지만 당신과 함께라 따뜻한 것 같았다. 비로소 잃어버린 걸 찾은, 완전함을 가슴 가득히 느낄 수 있었다.

 

26, 28살의 삶에서 가장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내 마음 당신에게 Fin.



Written By. 열정맨 (Twitter Account : @YEOLJUNG_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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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董貞 - 繁花 (官方歌詞版) - 中視《三生三世十里桃花》插曲

 





복숭아도령

 


w. 도담



(독일 동화 미르테 나무의 요정을 각색하였습니다.)

 

 


먼 옛날 그러니까 호랑이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담배 피던 시절 아주 깊은 산골짜기에 도자기를 굽는 노인과 그의 부인이 살았다. 노인의 솜씨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정도로 유명한지라 상인들은 깊은 산골짜기까지 찾아와 노인의 도자기를 사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열흘에 한 번씩 찾아오는 상인들에게 도자기 서너 개 쯤 팔면 먹고 살 걱정도 없었고 부부간의 금슬도 남들이 질투할 만큼 좋았으나 애석하게도 둘 사이엔 아이가 없었다. 부부 모두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다 보니 애진작에 자식 욕심은 버렸다 말은 하지만 가끔씩 필요한 것들을 사기 위해 산 아래에 내려갈 때마다 제 부모 뒤꽁무니 졸졸 따라다니며 재잘 거리는 아이들이 두 사람의 눈에 밟혀 쉬이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남은 여생동안 어린 자식의 재롱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 되어버린 부부는 매일 밤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삼신할머니께 예쁜 아이 하나만 점지해 달라 정성스럽게 기도를 올렸다. 건강하고 예쁜 아이 하나만 점지해주면 잘 키우겠노라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올린 부부의 기도에 하늘도 감동한 모양인지 어느 날 부인의 꿈에 삼신할머니가 나타나 씨앗 하나를 건네주며 자식이라 생각하고 공들여 키우란 말을 남기고 떠났다. 꿈이 하도 생생하여 잠에서 깬 부인이 머리맡을 훑어보자 베개 아래엔 꿈에서 본 씨앗이 있었고 부인이 꿈 얘기를 해주자 노인은 그날부터 혼신의 힘을 다해 커다란 도자기 하나를 구웠다. 자식과도 같은 나무를 키울 화분이라며 몇날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화분을 만든 노인은 낙엽이 삭으면서 영양이 풍부해진 흙을 퍼다 날러 그 안을 채우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씨앗을 심었다. 낮에는 햇볕 잘 드는 마당에 내놓고 흙이 마르기라도 할까 개울물 떠다 적셔주고 밤에는 찬서리 맞지 않게 집안에 들여놓아가며 정성으로 키우니 며칠 만에 작은 싹이 움트고 그 조그마한 잎사귀가 날이 갈수록 커져 싹이 튼지 일 년이 되어갈 쯤엔 제법 나무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새봄이 찾아오자 나리는 눈발에 가지가 상하기라도 할까봐 겨우내 집안에 들여놓았던 화분을 바깥에 꺼내놓은 부부는 이제는 둘이 들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나무가 많이 자랐다며 흐뭇해하였다. 어린 아이마냥 재롱을 떠는 것도 옹알거리며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부부에게 이미 나무는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나무도 봄이 온 것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처음으로 꽃망울을 터트리고 그제야 부부는 나무가 복숭아 나무였음을 알게 되었다.

 

마마 너무 멀리 가시면 위험합니다.”

 

산 속 깊은 곳에 들어가야 짐승들이 있을 게 아니더냐.”

 

초행입니다.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내가 없어지면 온 산을 뒤져서라도 찾을 녀석들이 걱정은...”

 

마마!”

 

짐승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나 산과 들을 활보할 계절이었으니 오랜만에 사냥을 나온 왕자 민호는 노루를 쫓겠다며 말을 달리다 산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곁에서 시중을 드는 내관들도 호위무사들도 보이지 않자 민호는 제가 온 길로 돌아가겠다고 방향을 잡았지만 오히려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게 아무도 없느냐? 대답 좀 해보거라!”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다 똑같이 생긴 나무들뿐이니 같은 자리만 빙빙 맴도는 것 같단 생각에 민호는 말을 멈췄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호위무사들이 저를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 말에서 내려 나무 등치에 기댄 민호는 팔자 좋게 오수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잔 것일까 어느새 해는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그제야 민호도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산중에서 밤을 보내는 건 꽤나 위험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다시 말에 올라 무작정 달리기 시작한 민호는 몇 시진 만에 사람을 발견하고 안도하며 말을 세웠다.

 

이보시오 혹시 장정 여럿이 몰려다니는 거 보지 못했소?”

 

장정 여럿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럼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 좀 알려주시게.”

 

날이 늦어 지금 내려가면 중간에 해가 질 것입니다.”

 

연분홍색 베옷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사내는 민호에게 고개 너머에 노부부가 살고 있으니 그곳에 하루 신세를 지고 길을 물어 내일 떠나라 권하고는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분명 말을 타고 있는 쪽은 제 쪽이건만 사내의 걸음을 따라잡으려 해도 멀어지기만 하는 탓에 민호는 제가 귀신에 홀린 것은 아닌 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재 너머로 넘어가나 싶더니 민호가 넘어갔을 때 사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사내가 일러준 곳으로 향하니 그의 말대로 산중에 초가삼간 하나가 나타났다.

 

실례 좀 하겠소.”

 

묻는 말에 답이 없는 것이 주인이 집을 비운 듯하여 마당의 평상에 자리 잡고 앉은 민호는 옆에 놓인 복숭아나무에 시선을 뺏기고 말았다. 소담스럽게 핀 꽃송이가 얼마나 예쁜지 살면서 이리 아름다운 복숭아나무는 본적이 없다며 민호가 꽃가지 하나 꺾어 가져가려 나무에 손을 대자 웬 노인이 경기를 일으키며 다가와 그의 손을 쳐냈다.

 

누군데 남의 집 귀한 나무에 손을 대는 것이냐?”

 

...나는 그저 복숭아꽃이 참으로 아름다워...”

 

사람도 손가락이 부러지면 아프다 울어대는데 하물며 나무라고 아픈 걸 모르겠느냐?”

 

그리 중한 나무인지 몰랐습니다. 어르신.”

 

나무를 꼭 자식 대하 듯 애지중지하는 노부부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민호는 일단은 하룻밤 신세를 져야하니 밉보여선 안 되겠다 싶어 제가 가진 은자를 내어놓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은자는 됐다며 화분 옮기는 것이나 도와달라는 노부부의 말에 두 팔 걷어붙인 민호는 제법 무게가 나가는 화분을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 내어줄 방이 화분이 쓰는 방 밖에 없다며 불편해도 그곳에서 자라는 부인의 말에 민호는 제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작은 나무에게 방이 있는 것을 신기해하며 자리 잡고 앉은 민호는 방안에 은은하게 퍼지는 도화 향기에 서왕모의 곤륜 천도 밭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며 팔을 괴고 누워서는 나무가 심어진 화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집 뒤에 가마가 있는 것이 노인이 직접 만든 듯 싶은데 어린 아이가 자라 뛰놀다 청년이 되는 모습이 화분을 빙 돌며 그려진 것이 보통 공을 들인 물건이 아님을 민호는 단번에 알아 챘다. 자식 같은 나무의 가지를 꺾으려한 자신을 내쫓지 않고 방을 내어준 노부부에게 감사하며 민호는 복숭아 꽃 향기에 취해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사람인지 귀신인지 정체를 밝히거라...”

 

꿈인지 생시인지 잠결에 정신이 흐릿한 와중에도 제게 길을 일러주었던 사내가 제 옆에 누워있는 것을 알아보고 민호가 중얼거리자 사내는 말간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사람도 귀신도 아닙니다.”

 

알 수 없는 대답을 하고는 제 품을 답삭 파고드는 사내에게선 복숭아꽃과 같은 향기가 나 민호는 다시 눈을 감았다.

 

***

 

왕자마마!”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에 잠에서 깬 민호가 방문을 열고 나오니 용케 저를 찾은 내관과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그의 앞에 부복했다. 산중에 길을 잃은 나그넨 줄 알았던 이가 왕자마마라는 얘기에 노부부는 행여나 자신들이 결례를 범한 것은 없는지 걱정이 돼 마당에 납작 엎드린 채로 벌벌 떨기 시작했다.

 

다들 일어나거라.”

 

왕자마마를 몰라 뵙고 이런 누추한 곳을 내어드렸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내가 왕자라 밝히지도 않았는데 노공이 그걸 어찌 알겠는가? 게다가 나는 저 방에서 아주 잘 잤으니 미안해 할 필요 없네.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 하지.”

 

감읍하옵니다.”

 

헌데 슬하에 자식이 있는가?”

 

자식 복은 타고 나질 못한 탓에 이 나이 먹도록 슬하에 자식 하나 없어 저 복숭아나무를 자식 삼아 키우고 있습니다.”

 

노인의 대답에 간밤에 도화 향기가 나는 사내와 대화를 한 것은 아무래도 꿈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던 민호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것에 호위무사들을 시켜 화분을 마당으로 내놓았다.

 

내가 이 나라의 왕자라 해도 은자 몇 냥에 자식 같은 나무를 내어주진 않을 테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저 나무는 드릴 수 없습니다.”

 

달란 소리가 아니니 너무 걱정 말게. 그저 내 태어나 이리 예쁜 나무는 처음 봐서 해본 소리니까.”

 

민호는 노부부에게 적당한 포상을 해주라는 명을 내리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나무에게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던 민호는 제 마음을 그저 나무를 손에 넣지 못한 아쉬움쯤으로 치부했으나 실은 아쉬움 정도가 아니었다.

 

왕자가 며칠 째 자리보전하고 누운 이유가 무엇이더냐?”

 

그것이 의원들이 살피기에 옥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몸이 상한 것이 아닌데 어찌 저리 끙끙 앓고 있어?”

 

상사랍니다.”

 

상사?”

 

. 전하. 아무래도 왕자마마께서 상사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사냥에 다녀 온 뒤부터 저리 앓기 시작했지?”

 

.”

 

그곳에서 어여쁜 여인이라도 만났다더냐?”

 

마마께서 잠시 길을 잃긴 하셨지만 워낙 깊은 산중이라 만난 사람이라곤 산 속에서 도자기를 굽는 노부부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어찌 상사로 앓아누워?”

 

마마께서 열병을 앓으시면서 찾는 것이 있기는 한데...”

 

그래 어디에 사는 누구라더냐?”

 

그것이...조금...”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보거라.”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라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는 와중에도 웬 나무를 찾고 계십니다.”

 

나무?”

 

아무래도 사냥에 나섰다 길을 잃었을 때 머무른 노부부의 집에 있던 복숭아나무를 찾는 모양입니다. 마마께서 그 나무를 꽤나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고작 나무 때문에 앓아누운 아들 때문에 제가 쓰러지기 직전이라며 머리를 부여잡은 왕은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이 사경을 헤매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노부부의 집에서 복숭아나무를 가져오란 왕명을 내렸다. 처음에는 어찌 자식을 부모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냐며 안 된다 매달리던 노부부는 왕자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말에 저희가 키운 나무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순 없다며 결국 복숭아나무를 내어주었다. 노인이 정성들여 만든 화분 그대로 복숭아나무를 마차에 실은 궁인들은 부리나케 왕궁으로 달려갔다.

 

보거라. 네가 그렇게 찾던 복숭아나무를 가져왔단다.”

 

상사로 인한 열병에 시달리던 민호는 방안에 퍼지는 복숭아꽃 향기에 언제 앓았냐는 듯 고른 숨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왕자가 차도를 보이자 왕후는 왕자를 살피듯 복숭아나무를 정성껏 보살피란 명을 내리고 복숭아나무는 왕자의 침상 바로 옆에 자리한 채로 궁인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내가 보고 싶어서 아팠던 겁니까?”

 

잠시 정신이 돌아온 민호는 제 침상에 걸터앉은 사내를 보며 놀란 눈을 했다. 그의 소매 자락이 나풀거릴 때마다 도화향기가 주변에 퍼지고 민호는 반가운 마음에 그를 끌어안았다.

 

지금은 사람인 것이냐? 귀신인 것이냐?”

 

여전히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 귀신인 게 분명해. 복숭아나무에 사는 귀신인 거지?”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귀신에게 홀린 게 분명하다. 네게 홀린 것이야.”

 

아직 열이 가라앉지 않았네...”

 

사내의 차가운 손이 닿자 펄펄 끓고 있던 민호의 이마는 서서히 식기 시작했다 열기가 사라지자 한결 몸이 가뿐해진 민호는 사내의 옷자락을 손에 꽉 쥔 채로 잠에 빠져들고 사내는 한참동안 민호의 품에 안겨 있었다.

 

***

 

언제 앓았냐는 듯 멀쩡하십니다.”

 

오히려 땀 쭉 빼고 낫더니 개운하구나.”

 

복숭아나무는 꽃이 더 만발한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덧창 문 좀 더 열거라.”

 

이제 막 털고 일어나셨는데 찬바람 쐬시면 큰일 납니다.”

 

햇볕이 잘 들지 않아 그런다.”

 

화분을 바깥으로 옮길까요?”

 

내가 직접 하마.”

 

아랫것들 시키면 될 일을 굳이 제가 나서 화분을 바깥으로 옮긴 민호는 그 옆에 자리 잡고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얼굴 구경하기 힘들구나. 내 말 듣고 있는 것이지?”

 

민호 딴엔 복숭아나무 귀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었지만 궁인들이 보기엔 그저 복숭아나무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이니 왕궁 내엔 왕자가 열병을 심하게 앓더니 미쳐버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복숭아나무 귀신은 얼굴을 보여주기 싫은 모양인지 민호가 잠든 한밤중에야 잠깐 모습을 드러내 민호의 머리를 쓸어주며 자장가를 불러주거나 민호가 없을 때 민호의 방을 어지럽히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곁에 두고는 있으나 보지 못하는 것에 애가 닳기 시작한 민호는 이러다 또 상사병이 도지겠다며 작정하고 밤을 새며 복숭아나무 귀신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길 며칠, 쏟아지는 졸음에 슬슬 민호의 눈이 감기려는 찰나에 복숭아나무 귀신이 말간 웃음소릴 내며 그의 앞에 나타나자 왕자는 때를 놓치지 않고 숨겨놓았던 촛대에 불을 붙였다.

 

이렇게 해야만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냐?”

 

절더러 복숭아나무 귀신이라 부르더니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그리도 보고 싶으셨습니까?”

 

그래서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대는 사람인가? 귀신인가?”

 

나는 사람도 귀신도 아닙니다.”

 

복숭아나무 귀신은 본디 서왕모의 복숭아밭을 가꾸는 하급 신인 진우도령이었다. 먼 옛날 진우도령이 실수로 동방삭에게 천도복숭아를 내어주는 바람에 동박삭은 삼천갑자를 살게 되었고 때문에 명계의 질서가 어지러워졌다는 이유로 진우도령을 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신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곤륜의 천도 밭에서 쫓겨나 구천을 떠돌게 된 진우도령을 불쌍하게 여긴 삼신할미는 그를 자그마한 복숭아 씨앗으로 만들어 자식이 없는 노부부의 집에 보내주었고 나무로 일 년을 꼬박 채우면 사람의 형상을 갖출 수 있게 도술을 걸어주었다. 아직은 사람의 모습을 다 갖추지 못하였기에 도령은 밤마다 몰래 나무에서 나와 민호를 만나고 간 것이었고 사정을 모르는 그에게 이리 들킨 것이었다.

 

그대는 내가 태어나 본 복숭아나무 중에 가장 예쁜 꽃을 피우는 나무야.”

 

이제 저도 며칠만 있으면 나무가 아니라 사람이 됩니다.”

 

아마 그때가 되면 너는 내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예쁜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그대의 눈엔 예쁜 겁니까?”

 

누가 봐도 예쁠 테지.”

 

그대는 참으로 절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내가 보고 싶어 앓아누울 만큼 좋은 것입니까?”

 

그래. 나는 네가 보고 싶어 앓아누울 만큼 네가 좋아. 그러니 네가 사람이 되면 나와 혼인해 주겠느냐?”

 

인륜지대사를 어찌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인계에선 나를 키워준 노부부가 나의 아비이고 어미이니 그들에게 먼저 허락을 받고 두 분을 모신 가운데 백년가약을 맺음이 옳습니다.”

 

그래. 당장 두 분을 모셔오라 명하마.”

 

그리고 앞으론 보고 싶을 때 이리 하지 않아도 됩니다.”

 

품안에서 꺼낸 작은 방울을 꺼내 복숭아나무 가지에 매달은 도령은 왕자에게 제가 보고 싶을 때면 이 방울을 흔들라는 말을 남기고는 다시 나무로 돌아갔다. 날이 밝자마자 궁인들에게 노부부를 모셔오란 명을 내린 민호는 왕궁의 세공사를 시켜 도령에게 선물할 가락지를 준비 하라 일렀다. 산골짜기에서 왕궁까지는 거리가 제법 되는 탓에 노부부가 왕궁으로 오는 동안 복숭아나무의 꽃은 하나둘씩 떨어지고 새파란 이파리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

 

어마마마께서 불러드린 여인들은 만나지 않습니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양반집 규수들을 어찌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야?”

 

저는 이미 혼인을 약조한 이가 있습니다.”

 

그게 누구더냐?”

 

때가 되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 소개해 드릴 테니 여인들을 그만 돌려보내시지요.”

 

왕자가 퇴짜를 놓는 바람에 간택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왕궁에 모인 아홉 명의 명문가의 여식들은 아쉬운 마음에 왕자님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자며 왕자의 침소인 동궁으로 향했다. 열린 덧창 너머로 왕자를 발견한 여인들은 소문대로 준수한 왕자의 미모에 하나같이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인들이 저를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왕자는 복숭아나무를 애정이 듬뿍 담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왕자에게 아끼는 복숭아나무가 있다는 얘기는 이미 도성 내에 파다하게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자신들이 고작 작은 나무 한그루만도 못한 것만 같단 생각에 여인들이 복숭아나무를 질투하는 동안 왕자는 나뭇가지에 달린 작은 방울을 흔들어 도령을 불러냈다. 왕자가 방울을 흔들자 나무에서 복숭앗빛 발그레한 뺨을 가진 사내가 나와 왕자의 품에 답삭 안기는 것을 목격한 여인들은 왕자가 왜 그렇게 복숭아나무를 애지중지 하는 이유를 알아차리고 모종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나흘 뒤에 노공과 부인이 도착한다고 하는구나.”

 

빨리 두 분을 뵙고 싶습니다.”

 

그래. 나도 두 분이 빨리 왕궁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너와 내가 혼례를 올릴 수 있으니까.”

 

복숭아꽃이 다 지면 도착하시겠네요.”

 

받거라.”

 

무엇입니까?”

 

네게 주는 증표.”

 

세공사를 시켜 분홍빛이 도는 산호석을 깎아 도화를 새겨 넣은 가락지를 만들게 한 민호는 완성이 되자마자 진우에게 한시라도 빨리 가락지를 건네주고 싶은 마음에 체통을 지키시라는 내관의 잔소리를 못들은 체 하며 쏜살같이 동궁으로 달려와 진우를 불러낸 것이었다. 민호는 진우의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워주며 하루라도 빨리 노부부가 도착하게 해달라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내 마음과도 같은 것이니 항상 지니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가락지에 새겨진 앙증맞은 복숭아꽃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도령과 그런 도령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왕자는 다가오는 불행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나흘 뒤 노부부가 성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에 마중을 나간 왕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홉 명의 여인들은 궁을 지키는 이들에게 은자를 쥐어주고 몰래 왕자의 침소에 숨어들었다. 왕자가 나뭇가지에 달린 방울을 흔들면 나무에 살고 있는 도령이 나타난 것을 아는 여인들은 방울을 흔들어 도령을 불러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도착하셨나요?”

 

왕자가 저를 불러낸 줄로만 알고 모습을 드러낸 도령은 생전 처음 보는 여인들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에 당황하며 다시 나무에 몸을 숨기려 했지만 여인들은 도령을 붙잡아 꼼짝 못하게 만들고는 품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왕자가 자신들을 봐주지 않는 것은 다 이 복숭아나무 귀신이 왕자님을 홀렸기 때문이라 여긴 여인들은 귀신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도령에게 칼을 찔러 넣었다. 귀신은 쉽게 죽지 않는다며 다시 살아나 왕자를 홀리지 못하게 가락지를 낀 손가락을 제외한 아홉 개의 손가락을 잘라 나눠가진 여인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도령을 두고 사라져버렸다. 도령에게 변고가 생긴 줄 꿈에도 모르는 왕자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 노부부에게 복숭아나무의 정체에 대해 설명하기 바빴다. 자신들이 애지중지 키운 나무가 알고 보니 곤륜에서 쫓겨난 도령이란 사실에 놀라는 한편 진짜 자식이 생겼다는 것에 노부부도 설레는 마음으로 왕궁으로 향했지만 세 사람이 도착했을 때 눈앞에 벌어진 광경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예쁘던 복숭아나무의 가지는 이리 저리 꺾이고 부러진 데다 노인이 공들여 만든 새하얀 화분은 붉은 피로 뒤덮여있었기 때문이었다. 민호가 아무리 방울을 흔들어 보아도 진우는 나타나지 않았고 노부부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했다. 몇날며칠을 밥 한 술, 물 한 모금 넘기질 않고 복숭아나무의 가지에 달린 방울만 흔들어대는 왕자를 보며 왕과 왕후의 근심과 걱정이 날로 커지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마음의 병에 걸린 왕자의 소식에 나라 전체가 슬픔에 잠겼다. 모두가 생기를 잃어버린 복숭아나무를 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이 상황을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노부부는 다시 나무를 돌보기 시작했다. 부인은 복숭아나무의 꺾인 가지를 다시 세워 붙이고 부러진 가지는 새 가지가 자랄 수 있도록 예쁘게 잘라주었고 노인은 날이 밝으면 볕이 잘 드는 곳으로 화분을 옮기고 깨끗한 물을 길러와 흙을 적셔주었다. 밤에는 서리에 맞지 않게 따뜻한 곳에 들여놓고 지새우고 다시 아침이 밝으면 햇살이 내리쬐는 곳으로 옮기기를 반복하다보니 복숭아나무에 잎사귀들은 다시 생기 넘치는 푸른빛을 뽐내며 쑥쑥 자라났다. 부러진 곳에서도 며칠새 두 개의 가지가 새로 자랐으나 이상하게도 한 가지에는 이파리가 하나도 없고 다른 가지엔 겨우 자그마한 잎사귀 하나만이 자라나 있었다. 복숭아나무가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는 얘기에 나무를 찾은 왕자는 잎사귀가 하나뿐인 가지에서 제가 도령에게 준 반지를 발견했다. 그가 죽어 또 영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진 않을까 시름에 잠겨있던 민호는 반지를 발견하곤 아직 도령이 나무에 남아있음을 확신했다.

 

아직 여기에 머무르고 있거든 부디 내게 모습을 보여 주거라.”

 

왕자의 간절한 애원을 들은 모양인지 복숭아나무는 잎사귀를 바스락거렸다. 처음엔 그저 나뭇잎들이 살랑거리던 소리는 어느새 도령의 목소리가 되어 왕자에게 말을 걸었다.

 

복숭아꽃이 다 떨어졌는데도 나는 아직 완전한 사람이 되질 못했어요. 내 두 손에는 손가락이 하나뿐이랍니다. 왕자님. 그대의 나라엔 9개의 복숭아나무 묘목이 자라고 있어요. 그것은 나의 살과 뼈. 내 손가락을 돌려주세요.”

 

도령의 부탁에 왕자는 곧장 방을 내걸었다. 가장 아름다운 복숭아 묘목을 가져오는 이에게 상을 내리겠다고 말이다. 도령을 죽인 아홉 명의 여인들은 그 소식에 기뻐하며 당장 화분을 들고 왕궁으로 향했다. 복숭아나무 귀신이 살아 돌아올 수 없게 손가락을 잘라 나눠가진 뒤 그 손가락을 숨기기 위해 화분에 심자 그곳에서 복숭아나무가 싹을 틔웠기 때문이었다. 왕자에 눈에 들기 위해 정성껏 치장을 하고 나타난 여인들은 상을 기대하며 왕자에게 자신들의 화분을 보여주었다. 도령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길 바라는 진심을 담아 왕자와 노부부가 여인들이 가져온 묘목을 복숭아나무 주변에 옮겨 심자 복숭아나무는 스스로 가지에 달려있는 방울을 흔들었고 말끔하게 차려입은 도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대로 영영 보지 못하는 줄 알았다.”

 

왕자님과 혼인 하겠다 약조하였지 않습니까? 전생의 업은 벌을 받는 걸로 이제 끝이 났습니다.”

 

다시는 내 곁을 떠나지 말거라.”

 

곤륜의 천도 밭을 관리하는 신이었을 때 지은 죄를 다 씻어내지 못한 채로 복숭아나무로 다시 태어난 진우는 이 일로 마지막 남은 업을 말끔하게 씻어내고 진정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왕자는 물론이고 노부부와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던 진우는 저를 보고 사색이 된 아홉 명의 여인들을 알아보고는 그들의 죄를 왕자에게 알렸다. 왕자가 없는 사이에 왕자의 침소에 몰래 들어온 것도 큰 죄이건만 그것도 모자라서 그의 정인을 해쳤으니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었다.

 

저들에게 무슨 벌을 내리길 원하느냐?”

 

제가 전생에 지은 죄 때문에 업을 씻어내는 고난을 겪었듯 저 여인들도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왕자님께서 부러 나설 필요 없습니다.”

 

도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말로 하늘이 벌이라도 내리는 모양인지 쩍 하고 땅이 갈라지더니 여인들을 삼키고 그녀들이 있던 자리엔 손가락 모양의 풀이 돋아났다. 왕자는 왕궁의 누구도 이 풀에 물을 주지 말라 명했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언제나 타는 목마름에 몸부림쳐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지만 그녀들도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업을 씻어내면 언젠간 다시 제 모습을 찾을 터였다.

 

***

 

국왕 부처와 노부부의 허락을 얻은 왕자와 도령은 드디어 성대한 혼례식을 치렀다. 해가 바뀔수록 두 사람의 사랑이 커져가듯 복숭아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나고 더 이상 화분에서 키울 수 없을 만큼 크기가 커지자 왕자와 도령은 가장 큰 가지를 꺾어 화분에 심고 나무는 왕궁의 정원에 옮겨 심었다. 그렇게 나무가 자라나면 가지 하나만 화분에 남기고 정원에 옮겨 심다보니 복숭아나무들이 넘쳐나 봄이 찾아오면 왕궁엔 복숭아꽃이 만발했다. 꽃들이 만발한 정원을 거닐며 서왕모의 곤륜 천도 밭이 부럽지 않다는 민호의 말에 진우 또한 사랑하는 정인과 함께 있으니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니겠냐며 받아치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Written By. 도담 (Twitter Account : @D0_damm)

Replenish (Written by. 신검사)
2017. 11. 26. 21:26

 Replenish



w. 신검사




민호의 몸이 앞으로 빠르게 고꾸라지며 잡고있던 핸들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혔다. 머리에서 뜨끈한 느낌이 드는것이 끈적한 무언가가 흐르는 것 같았다. 뒤에서 매캐한 연기가 올라와서 숨을 막히게 했다. 좌석이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찌그러졌다. 뒷자리에 아무도 앉아있지 않던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박은 뒷차의 앞좌석에 앉은 사람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누군가 구급차를 불렀는지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민호는 앞이 뿌옇게 변하는것을 느꼈고 정신을 잃었다.




*




겨우 눈을 떴다. 한번도 본적 없는 하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몸의 근육이 아우성을 치며 쑤셔왔다. 으윽- 하고 신음을 내며 겨우 상체만 일으켰다. 민호의 팔에는 링거가 연결되어있었고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잠시 후, 병실 문을 열고 진우가 들어왔다. 사고가 난 민호의 걱정을 많이 했는지 전보다 얼굴이 많이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형. 어떻게 된거야?”


“민호야.”


일어나 있는 민호를 확인한 진우는 힘없이 민호를 불러왔다. 며칠간을 쓰러져 있었는지는 몰라도 진우의 마음고생을 잔뜩 시킨것만은 분명했다. 진우는 민호의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앉았다. 민호가 멀쩡하게 다시 일어난 사실을 확인한 그는 긴장이 풀려서 인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진우를 눈치 챈 민호는 앉은 채로 옆에 있던 진우를 품안에 꼬옥 안았다.


“형. 나 이제 괜찮아.”


진우는 민호의 말을 무시하며 몸을 비틀어 민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으나 그는 진우를 더욱 꽉 안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한참을 애쓰던 진우는 이내 포기했는지 조용히 그의 품 안에 안겼다. 잠시후 민호는 어깻죽지가 축축하게 젖어오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 진우의 양 어깨를 잡아서 마주 보았다. 진우의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중이었다.


“...끼”

“...?”

“나쁜 새끼. 흐윽, 사고나 당하고 다니고. 남 걱정시키고.”


진우는 눈물을 간신히 삼켜가며 민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 예쁜 얼굴을 하고 내뱉는 걸죽한 욕설은 민호에게 위협이 되기는 커녕 귀엽게만 느껴졌다. 민호는 그런 진우를 다시 품에 안으며 토닥토닥 달랬다.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네가 뭐가 미안해. 빨리 놔.”

“나 이제 안 아파. 안 다칠게.”

“이씨…”


진우는 자신을 안고있던 민호의 등짝을 주먹으로 한대 퍽- 하고 내리쳤다. 민호는 왜 환자를 때려! 하고 장난스레 성질을 내며 진우를 밀쳐냈다. 그리고 진우의 양 볼을 잡고 잔뜩 못생겨 지게 만든 후 못난아- 하고 부르고는 보드라운 입술위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런 민호의 행동에 진우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고개를 빼려고 했지만 민호는 구겨진 미간에도 한번, 삐져서 내민 입술에까지 다시 한번, 흔적을 남겼다. 


“됐어. 저리가. 화장실 갈거야.”


진우는 민호의 손을 냉정히 뿌리치고는 일어났다. 그 때,


민호는 순간 어지러움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앞이 핑 돌며 누군가 한바퀴 저어논 것 같이 뒤섞였다. 시야가 점점 흐려졌고 이내 까맣게 변해갔다. 마치 완성된 그림위에 검은 물감을 엎지른 것 처럼. 그는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매스꺼움에 헛 구역질을 했다. 갑작스레 휘청거리는 민호의 모습을 본 진우는 황급히 민호에게로 갔다. 


“왜그래?”



민호에게서 아무 대답이 없자 진우는 의아해하며 재차 물었다.


“왜 그러는데?”

“앞… 앞이… 안보여…캄캄해”


“뭐?”

“아.. 안보여. 형. 안보인다고. 앞이.. 안보여.”

“송민호.”

“아니지..? 내가 안보이는게 아니잖아. ㄴ..누가 실수로 불을 끈거 아냐?” 



민호는 너무나 황당해서 웃음밖에 나오려 하지 않았다. 눈앞에 손을 갖다대었다, 땠다를 반복하며 혼자 미친사람처럼 하, 하하, 그렇게 웃었다. 진우는 그 자리에 얼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가 해 줄 수 있는게 없었다.


민호가 옆에 놓인 탁자를마구 더듬기 시작했다. 이제는 비명을 질렀다. 위에 놓여있던 화분을 만졌다. 만져지는데, 분명 자신의 앞에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데, 보이지 않았다. 던졌다. 손에 잡히는 모든것을. 화분이 바닥으로 날아들어 깨져버렸다. 깨진 조각이 진우의 다리를 긁어 생채기를 만들어냈다. 진우의 종아리에서 새빨간 피가 한 줄기 흘러나왔지만 그런것을 느낄 정신따위는 없었다.


민호는 계속해서 병실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화분, 그 옆에 옷장, 열어서 옷, 그 옆에 의자, 한 병실이 완전히 뒤집어 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 서있는 진우를 더듬어 찾았다. 손끝에서 그의 얼굴이 느껴졌다. 눈, 눈 끝으로 뻗어나온 기다란 속눈썹, 그 끝에 맺혀있는 촉촉한 눈물, 그 아래로 코, 그 아래로 자신과 몇번이고 맞추던, 입술. 분명 손끝이 진우가 앞에 있다고 그의 감각이 진우가 바로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말해 주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웃던 진우, 자신이 슬플 때 같이 울어주던 진우, 자신이 화가 날 때 같이 화내주던 진우.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형… 형… 형이 안보여, 형 얼굴이,”

“ㅁ..민호야.”

“내 앞에 있는데 왜 안 보여?”



진우는 잔뜩 울 것 같은 얼굴로 민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순간에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여기 있는데… 왜…!”


여기 있는데 대체 왜 안 보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목이 나갈 정도로, 그 목이 나가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진우의 얼굴을 양손으로 꽉 부여잡았다. 분명히 자신의 눈 앞에 진우가 서 있었다. 진우가 아프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얼굴을 꽉 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에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눈물이 주체없이 흘러나왔다. 흘러 흘러서 옷을 적셨다. 잡고있던 진우의 얼굴또한 손바닥이 눈물로 범벅이 될 정도로 젖어들었다. 그렇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눈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살아나서, 진우의 피부가 더욱 생생히 손에 느껴졌지만 그 생경한 감각이 너무도 싫어서 소름이 끼쳤다. 


이제 민호가 할 수 있는것은 그 자리에서 울음을 토해내는 것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제정신이 아니어서, 정신이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았기에 더욱 소리내어 울었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자신의 목소리가 현실감없이 들려왔다. 귓바퀴를 맴돌아 나갔다. 차라리 이 소리에 다 묻어버리고 이 눈물에 다 묻어버리고 그대로 없어져 버렸으면. 그리고, 그 어둠끝에, 어둠만이 남았다. 




*




그는 화가였다. 어린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아 전문가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작품들을 계속해서 그려냈다. 그의 그림은 한국을 넘어서 해외로 진출했고 그 가격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작품을 내놓으면 경매에 붙여졌고, 처음에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수입이 이제는 통장의 잔고가 넘쳐날 정도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제 그는 볼 수 없었다. 그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색깔을. 자신의 그림을. 그는 절망했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떠도 감았을때와 같이 펼쳐지는 까맣디 까만 전경이 그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는 자신이 세상 한가운데 갇혀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타인을 만나는 일이 어려워지자 스스로 벽을 쳤다. 그리고 진우에게 목말라했다. 다른 사람들과 채우지 못한 애정을 채워주는것은 진우의 몫이었다. 하지만 진우가 주는 애정을 온전히 받아 흡수하지 못했다. 그의 깨져버린 화분같은 마음에 진우의 애정은 그대로 새어 바닥만을 흥건히 적셔버렸다. 그리고 그 결핍은 온 집안을 뒤집어 놓는 것으로 나타났다.


병원에서 특별히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진우가 그 짐들을 지고, 또 민호를 데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




이젤, 그 위에 캔버스를 놓고 한참을 그 앞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채로 어떻게 무엇을 그려나가야 할지 생각해보려고 애썼으나 머릿속을 채운것은 막막함 밖에 없었다. 옆을 더듬어 붓을 간신히 잡았다. 눈만 보였다면 붓을 손에 쥐는 것 쯤이야, 쉽다고 의식하는 것 조차 하지 않을정도로 간단한 일이었겠지. 무슨 색을 섞는 건지도 모르는 채 붓에 물감을 묻혔다.


앞에 커다란 선을 하나 그었다. 아니, 그으려고 했다. 그가 한 것은 허공을 붓으로 한 번 휘저은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민망함보다 화가났다. 이런 선 하나 긋는 것 쯤이야, 자신이 원하는대로 마음껏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선을 두껍게 할 것인지 얇게 할 것인지, 힘을 줄 것인지 주지 않을 것인지, 물이 많은지 적은지, 생각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되었던 것들이 눈앞이 보이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게되었다. 정확히는, 자신감을 잃었다. 전과 달라진거라고는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그것 하나밖에 없었지만 그 하나가 그의 자신감을 앗아갔고 모든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남은 거라고는 절망감과 무기력함 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찾아온 감정은 분노였다. 신은 왜, 대체 왜, 하필이면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해서 한창 새 작품을 만들고 그곳에 빠져들 시기에 붓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하는 신세로 만들었을까. 왜 자신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생을 해온 붓질한번을 제대로 못 하는 것일까.


꼴도 보기 싫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앞에 놓인것이 싫었다. 그대로 들고있던 붓을 내던졌다. 붓이 벽에 부딪히며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옆에 놓여있던 물감이며, 파레트를 모두집어던졌다. 방안이 모두 물감과 물로 범벅이 되어 있을게 뻔했지만 그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 상관이 없었다. 그 난장판이 된 모습조차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났다. 앞에 있는 캔버스를 던졌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앞으로 한발짝 더 다가가서 이젤을 땅바닥에 내리 꽂았다. 그의 강력한 힘에도 불구하고 망가지지 않았다. 망가지지 않아서 더 부수고 싶어졌다. 방안에 퍽-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생기라고는 하나 없는 표정으로 이젤을 내리찍는 민호의 모습은 너무도 차가워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진우가 황급히 방문을 열었다. 이미 눈이 뒤집혀 이성을 찾아볼 수 없는 민호의 표정에 그는 기겁을 하며 달려갔다. 민호는 그 것을 알지 못하고 방안에 있는 물건을 손에 잡히는 대로 던졌다 진우가 날아오던 붓에 맞고 악-하는 소리를 냈다. 그제서야 민호가 행위를 멈추었다.


그제야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시 온몸을 휩쓰는 무력함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 조차 없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물은 하염없이 흐르기 시작했고 그위를 진우가 덮어주었다.


“괜찮아.. 괜찮을거야.”

“흐윽… 흑,”


민호를 껴안고, 보듬고 쓰다듬어 겨우 진정을 시켰다. 민호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묻고 엄마가 갓난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또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




추운 날씨 때문에 입에서 하아얀 김이 잔뜩 나왔다. 민호는 칭칭감은 목도리에 얼굴을 절반가량 묻은 채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진우를 기다렸다. 집에서 일을 하고 싶을때만 하는 프리랜서 민호와 달리 매일같이 출근을 하는 진우는 부지런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민호를 부러워 했다. 그런 진우를 아는 민호는 매일같이 진우가 집으로 돌아올 때 버스정류장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잠시후, 정류장앞에 버스 한대가 섰고 그곳에서 진우가 걸어나왔다. 진우를 본 민호는 그를 반갑게 쳐다보며 장갑 낀 손을 흔들었고 진우는 배시시 웃으며 민호에게 갔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민호의 품 안에 얼굴을 포옥 묻으며 안겼다. 민호는 자신보다 살짝 내려오는 키때문에 볼에 오는 머리카락에 얼굴을 부드럽게 비볐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안겨오는 진우 덕분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몸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듯 했다.


“추운데 왜 또 나와있어?”

“자기가 나오라고 해놓고, 뭐라는거야.”


민호는 풉, 하고 짧게 웃으며 진우를 장난스레 타박했다. 민호의 타박에 진우는 입을 한껏 벌리며 웃었고, 민호는 그런 그를 사랑스럽게 내려다 보았다.


“너무 춥다. 빨리 집가자. 내가 보일러 빵빵하게 틀어놓고 왔어.”

“그래. 금요일인데 치킨 시켜 먹을까?”


진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민호는 핫팩을 자신의 손에 쥐고 그 위에 진우의 손을 덮었다. 두 손 사이에 옮겨지는 온기가 둘의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데웠다. 둘은 눈을 맞추며 주변의 차가운 공기를 멋대로 따뜻하게 만들어 버린 채 집으로 향했다.

.

.

.

꿈이었다. 다시 행복한 순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했던것도 잠시, 그 잠깐 마저도 꿈이라는 이름아래서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옆에 누워 아직 곤히 자고 있는 진우가 느껴졌다. 다시는 전처럼 둘이 함께 눈을 맞추며 사랑을 나눌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감이 몰려왔다. 눈 아래에 눈물이 고였다 툭, 떨어졌다. 떨어지는 눈물조차 볼 수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그가 분명 물리적으로 잃은 것은 시력뿐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잃었고 진우와 나누던 사랑을 잃었고 일상을 잃었다. 진우와 함께하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다른 연인들과 별 다를 바 없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카페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 같이 쇼핑을 가고… 그 특별하지 않지만 둘이 같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특별했던 순간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었다.




*




평범한, 아니, 평범하고 싶은 나날들이 지나갔다. 여전히 민호는 우울해 했고 어떨때 신나하다가도 어느 한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슬퍼했다. 진우는 그런 민호를 받아주었다. 받아 줄 수 있는 만큼.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모든 것은 민호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 하나로 모든것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다.


여전히 민호는 한시라도 진우가 곁에 있지 않으면 성질을 냈고,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았다. 진우의 사랑을 목말라했다. 하루라도 물을 주지 않으면 시들어 버리는 화분처럼. 마치 한쪽이 깨져버려 물을 아무리 줘도 아래로 새어버려 흙에 물이 제대로 스미지 못하는 화분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아무리 말해도 그는 더 많은 것을 원했고 그 사랑한다는 말을 마음깊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들어갔다. 물을 먹지 못한 꽃처럼. 따스한 봄날 다른 꽃들이 모두 봉우리를 열고 햇빛을 맞이할 때 홀로 햇빛을 보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꽃처럼.


진우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민호의 회복을 위해 자신의 꿈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자신이 민호옆에 붙어있지 않으면 무슨일이 생길지 몰라 항상 불안했다. 민호를 혼자 두기가 너무도 불안했다. 그 혼자 시들어가는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두달이라는 시간이 더 지나갔다.




*




민호는 진우의 애정어린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시들어갔다. 삶의 목적 없이 그저 죽지못해 살았다. 하루를 아무 하는 일 없이 멍을 때리며 보내기 일수였고, 기껏해야 티비를 보거나 라디오를 듣는 정도였는데 그마저도 금방 싫증을 내고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방 그만두었다. 무기력한 민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만은 없었던 진우는 그의 삶의 목적의 일부였던 일을 다시 시작하도록 해 주고 싶다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비록 힘든 길이겠지만 조금은 괜찮아지지 않을까. 


“민호야.”

“왜.”


밥을 먹는 중 이었다. 민호를 부르자 그가 초점없는 눈동자를 진우를 향해 돌렸다. 진우는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너도 이제 다시 하고싶은걸 하는건 어때?”


진우의 말에 민호는 큭, 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형도 알잖아. 나, 아무것도 못해.”

“....”

“그림도 못그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뭘 해.”

“안보여도 그리는 연습을 차차 해보는 건...”

“형이 뭘 알아?”

“....”

“형이 그림을 그리려고 할 때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내 심정을 아냐고.”


민호는 소리가 나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식탁에 부딪히는 소리가 무거운 공기를 스쳤다. 그는 머리를 괸 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북받치는 감정에 심호흡을 했다.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을 반복하는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힘들어 보였다.


“나는 이제 그래. 그냥…”

“....”

“....”

“미안.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진우는 고개를 푹 숙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고 민호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식탁 모서리에 다리를 부딪혔지만 빈정이 상한 상태에서 그런것이 느껴질리는 만무했다. 밥맛이 떨어진건지 나 그냥 잘게, 하는 짧은 말을 남기고 벽을 더듬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캄캄한 어둠속에 색색깔의 물감들을 엎질러 놓은 마냥 머릿속이 복잡했다. 물감들이 섞여 탁한 색을 만들어냈다.





*





고요한 방안에 째깍이는 시계소리가 울려퍼졌다. 민호가 눈을 감고 누운지도 꽤 오랜시간이 지났다. 진우보다 먼저 잠자리에 누웠음에도 불구하고 진우가 옆자리에 잠든 상태였다. 지금까지 잠에 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몇시간 째 잠들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날 저녁 진우가 했던 말들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을 먹어도 자리에 앉았을 때 느껴지는 절망감, 두려움. 그 감정들을 이길 수 없었다. 자신이 전과 같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끔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붓을 잡고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면, 진우의 도움이 있다면 할 수 있을까.



그의 그림을 보며 항상 멋지다고,아름답다고 말하던 진우는 보이지 않는 민호가 그린 그림까지도 그렇게 말해줄까. 



그럴 것 이다. 여전히 멋진 작품이라고 말해 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외면해도 진우만은 옆에 남아있어줄 것이다. 



그는 다시 붓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을 위해서,그리고 진우를 위해서. 그는 더 이상 누워있지 않기로 했다. 그는 진우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그림을 그려오던, 많은 시간을 함께하던 그 방으로 향했다 





*





창으로 따스한 겨울햇살이 비춰왔다. 밖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집안은 밖과 상반되게 따뜻한 공기가 맴돌았다. 그 따뜻함을 느낄 새도 없이 진우는 옆자리가 허전한 것을 눈치채고는 벌떡 일어났다.


“송민호! 어딨어?”


진우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민호의 방으로 갔다. 민호가 작업실로 쓰던, 이제는 들어가지 않던 방. 그곳에 민호가 앉아있었다. 이젤을 새워놓고, 쓰지 못할 정도로 얼룩져있던 팔레트가 깨끗이 닦아져 있었다. 붓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민호는 그 앞에 앉아, 어떤 그림을 그릴지 생각을 하는 듯, 그렇게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민호야.”


진우의 부름에 민호가 뒤를 돌았다. 손에 붓을 쥔 채였다. 언제부터 앉아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민호의 얼굴은 그의 고뇌를 여실히 드러내는 듯 했다. 그 앞에 앉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민호의 마음을 생각하니 진우의 가슴도 같이 갈갈이 찢기는 듯 했다. 


진우는 말없이 민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민호가 쥐고 있던 붓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민호에게 만져보게 해주었다. 매끈한 붓이 민호의 손 안으로 들어왔다. 민호는 가만히 진우가 하는데로 손에 감각을 집중했다.


“이게 둥근붓, 4호야. 기억해.”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차례로 하나하나, 모두 손에 대주었다. 한손으로는 민호의 손과 포개어 그의 손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붓을 잡고. 민호는 손 끝을 간질이는 감촉에 간지러운지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나, 그림 그릴 수 있겠지?”

“할수 있어. 같이 연습하면.”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초점없는 두눈에 생기가 도는 듯 했다. 민호가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일들이 얼마나 어려울지, 얼마나 힘들지 눈에 선했다. 그러나 민호는 이제 결심을 한 듯 진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민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진우의 손가락이 들어갔다. 손바닥이 맞물리며 온도를 교환했다. 차가웠던 손은 진우의 온기로 채워져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민호는 일어서서 진우와 마주보았다.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눈앞에 있는것이 느껴졌다. 손을 뻗어서 진우의 얼굴을 하나하나 느끼기 시작했다. 


이마 맨 위 부터 시작해서 점점 아래로, 아래로, 매끈한 콧대를 만지고 눈두덩이를 쓰다듬었다. 진우는 민호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며 눈을 감았다. 민호는 이제 양손으로 진우의 얼굴을 잡고 부드럽게 문질렀다. 양 볼이 상기되었는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좋아하면서도 약간을 쑥스러워할 진우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엄지로 입술을 찾았다. 붉게 물들어서 자신을 기다릴, 아름다운 입술. 그 위로 민호는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까칠하던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들고, 물들었다. 


진우의 입안으로 말캉한 것이 들어왔다. 민호도, 사실 고팠다. 진우가. 어쩔 수 없이 깨져버린 화분이었고, 깨진것을 고칠 줄을 몰라서, 그래서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 부분을 진우가 막아주었다. 영양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흙이, 그 위에 새싹이 물을 먹기 시작했다.


민호는 진우의 입안을 사이사이 탐했다. 진우가 자신을 쓰다듬어 주었듯이. 부드럽게, 또 어쩌면 끈적하게. 진우의 입안을 스치는 민호의 것에 진우는 눈을 감고 신음을 흘렸다. 입안이 적셔지며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고 진우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민호의 머리카락이 기분좋게 손을 간질였다. 


이제 더 이상 민호는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끝없이 물을 주어도 받지 못하는 그런 화분이 아니었다. 그는 진우를 번쩍 안아들었다. 진우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둘은, 그렇게 대낮에, 침실로 들어갔다. 민호는 어차피 낮이든, 밤이든, 보이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젖어들어갔다.




Written By. 신검사 (Twitter Account : @vencedor_forW)

선물 (Written by. PARAN)
2017. 11. 26. 21:24

선물

 




w. PARAN




* 알오물, 엠프렉 요소 있습니다.

* 수위물입니다.

 

0-5.

그런 집안이었다. 우리 집을 가리켜 이름이 있다, 돈이 많다고 하기엔 너무 애매하다고 했다. 심지어 부모님의 학벌 역시 애매하다고 했다. 인서울이긴 한데, 다들 거기서 말을 멈췄다. 아버지는 항상 소위 말하는 재벌가들이 속해 있는 그 그룹에 끼고 싶어 하셔서 안달이었다. 알파나 오메가가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지위에서 모두 차별 없는 세상으로 나갔다고 그렇게 떠들어 대었지만 그쪽이나 우리 집은 예외였다. 아버지는 알파라는 우월감에 찌들었고, 어릴 때부터 못하는 게 없던 누나는 알파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아버지 성에 차지 않았다. 관심들은 자연히 내게 쏟아졌다. 돈은 어떻게든 벌면 되는데, 남은 문제는 너다. 아직 발현은 되지 않았지만 아비가 알파니 너도 무조건 알파일 것이다. 진우야, 잘 해야 한다. 잘 해야 해. 내 어깨를 잡고 흔들던 아버지의 눈빛을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잘 해왔다. 성적도 애매하지 않았다. 늘 좋았고, 내 지위도 아버지처럼 어정쩡한 게 아니라 회장이라는 타이틀을 쥐고 있었다. 거기 그 김씨네 아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훤하고. 학교에서도 회장이라며? 아버지는 내가 된 냥 으스스 어깨를 세우셨다. 모두가 내게 관심을 가지고 나를 치켜세웠다. 딱 발현이 되기 전까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춘기에 접어들고 시간이 꽤 지나서도 발현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베타와 다름없는 상태가 되자 아버지는 애써 웃으며 오메가만 아니면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사춘기가 끝날 무렵, 내 손에는 오메가라는 글자가 적힌 진단서가 떨어졌다. 종이 쪼가리를 보자마자 손바닥이 볼을 향해 날아왔다. 내가 너에게 들인 돈이 얼마인데. 고작 이딴 종이 받으려고 너를 그렇게 공부시키고 먹이고 재운 거 아니다. 우성 오메가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 줄 아느냐. 그렇게 해서 거의 다 잡을 뻔한, 그토록 가지고 싶던 그들의 왕관을 놓치게 된 아버지는 누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쥐 죽은 듯이 살아야했다. 그저 죽은 듯이. 그냥 오메가도 아니고 우성 오메가, 그게 내 죄였다.

 

집에서 내 존재가 잊혀 질만큼, 손님들조차 내 이름을 더 이상 오르지 않을 정도로 누나는 주어진 과제를 잘 수행했고, 나는 쥐 죽은 듯이 잘 살아왔다. 아버지나 누나나 그들이 생각하는 성공은 더 이상 내가 관여할 것이 아니었다. 나는 완전한 자유를 꿈꿨다. 그 잘나신 알파들을 피해 이 집으로부터 독립 하는 것. 발현이 나타난 17살 이후 더디게 가던 시간은 흐르고 흘러 20, 드디어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조심스레 독립을 이야기하니, 멀쩡한 집 놔두고 뭣하러 밖에 나가냐는 소릴 들었다. 예상했던 소리였다. 이제 어른이니까 혼자서 어떻게 뭘 해보고 싶다고 떠듬거리며 말했던 것 같다. 아버지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게 나였다. 아까운 돈 쓰고 싶지 않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아야 했다. 이제는 내가 뭘 해도 미운 모양이었다.

 

바스러진 내 감정이야 둘째 치고, 절망스러운 게 더 컸다. 내 삶의 모든 게 돈에 의해 제약받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어른이라니. 어른 구실도 못하는 주제에 사회에서 어른이라고 불리니 너무 우스웠다. 나는 이 집도 내 마음대로 벗어나질 못하는데.

 

세상이 달라졌다 해도 계급의식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치켜세우거나 깎아내리는 사람은 어딜 가나 존재했다. 신입생 환영회 때, 알파라며 우쭐해하는 놈 하나, 둘을 발견하고 학과생활이 참 재미없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대로 내 삶은 무난하게 굴러갈 줄 알았다.

 

 

1.

 

559.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십여 분 전부터 챙겨둔 가방을 움켜쥐었다. 아직 일에 집중하고 있는 척,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있다. 긴장 반, 초조함 반 그리고 설렘 조금.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괜히 창을 내렸다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6, 퇴근 시간이다. 아래창의 시계가 6:00으로 변하기 무섭게 목에 걸린 사원증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계에 찍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또 신속하게 밖으로 나간다. , 물론 내일 봬요!”는 잊지 않는다.

 

오늘도 진우씨가 1등으로 찍었네. 매일을 봐도 그렇게 보고 싶은가봐. 뒤늦게 따라 나온 동료의 말에 철없이 웃으며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칼퇴 하는 모습이 얌체 같아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빠른 걸음으로 금세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에 다 오기도 전에 차 리모컨을 눌렀다. 가벼운 멜로디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 앉자마자 무섭게 시동을 걸고 옆자리 히터부터 틀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회사를 빠져나가면 완벽한 퇴근의 모습이 완성되는 것이다.

 

복잡한 퇴근길을 지나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628. 평소보다 10분정도 일찍 도착하겠는데. 기분이 좋아져 손가락으로 핸들을 피아노 치듯 두드렸다.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고, 이제는 익숙해진 도로 위를 달린다. 깜짝 놀랄 일이다. 몇 년 전의 내가 보거나, 민호가 보거나. 모두 놀랄 일이겠지. 알아서 잘하네. 다행이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의 다 도착해서 문제가 생겼다. 주차 공간이 부족했다. 근처를 도는 수밖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차를 대기 위해 눈과 핸들을 이리저리 돌렸다. 겨우 한 군데를 찾아 주차하고 내렸는데, 시곌 보니 평소와 똑같은 시간에 도착할 듯싶었다. 옷맵시를 가다듬으며 놀이터를 지나 문을 잡아 당겼다.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민우 어머님! 잠시만요, 민우 부를게요. 민우야!”

 

 

선생님이 안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올 동안 나는 유치원 내부를 찬찬히 둘러본다. 벽에 붙어있는 게시판이 눈에 들어왔다. 입학식 사진부터 시작해 체험학습, 생일 파티 등 그 속에서 민우가 어디 있는지 열심히 찾아본다. 그러는 사이에 엄마!”라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장난감을 잠깐 놓았다가 다시 쥐면 될 것을, 그게 싫었는지 민우는 야구잠바도 한 쪽만 입고 가방도 한 쪽만 맸다. 선생님이 뒤에서 어떻게든 입혀준다고 쩔쩔거리는데 민우는 가만히 있지 못한다. 유치원 현관에 서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 민우가 그대로 나를 향해 달려왔다.

 

 

엄마아!”

민우야! 송민우!”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 쭈그려 앉아 민우가 품 안에 쏙 들어올 수 있게 두 팔을 벌렸다. 가까이 오는 민우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따라 웃으며 반기는데 민우가 아래로 점점 내려간다? 이윽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민우가 넘어졌다. 민우야! 선생님과 내가 거의 동시에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선생님은 뒤에서 급하게 민우를 일으켜 세웠다. 매끈한 바닥에 발이 미끄러진 모양이었다. 다행히 상처는 안 났지만 그 충격이 꽤나 컸는지 고개를 든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울음이 터졌다.

 

 

흐어어엉, 엄마아.”

 

 

민우의 울음소리에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했다. 넘어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어떡해야하지? 일단 달래야 한다는 마음에 신발을 벗고 민우에게 다가갔다. 그 사이에 선생님은 민우에게 민우야, 많이 놀랐지? , 괜찮아. 괜찮아. 넘어져서 아팠겠다.”라며 말려 올라간 잠바를 내려주었다. 선생님이 민우를 품에 안고 나에게 올 때까지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민우야. 안 다쳤네. 괜찮아.”

 

 

아이를 건네받고 한쪽 팔로 엉덩이를, 남은 팔로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울지 마. 코를 훌쩍이며 눈물범벅인 얼굴이 내 어깨를 비빈다.

 

 

민우 어머님.”

,!”

오늘 민우가 많이 보고 싶었나 봐요. ‘언제 6시가 와요?’라고 자꾸 묻다가 친구들이랑 잘 놀더니 엄마 왔다는 말에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뛰어나왔네요.”

.”

 

 

울음이 멎어가는 민우의 등을 토닥이며, 선생님과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민우야, 괜찮아? 어디 봐봐. 안 다쳤네. 엄마가 뭐랬어. 뛰어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집에서도 그러더니 왜 자꾸 뛰어다녀. 아까 하지 못한 말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가시가 돋은 말이 내 목구멍을 찔렀다.

 

 

모든 것을 감안하고 한 임신이었지만, ‘엄마라는 두 글자는 아직 내게 너무 어려웠다.

 

 

 

0-4.

 

서양화과 15학번 송민호입니다-오후 02:03

 

되게 깔끔하네. 핸드폰 액정 위로 뜬 문자를 꾹꾹 눌렀다. 강의 정보도 보지 않고 이름만 보고 신청했다가 예상치 못한 조별 과제를 만났다. 교수님 재량으로 조를 편성한 탓에 웬 미대생이랑 같이 하게 되었다.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건 꽤나 거북한 일이라 되도록 조별 과제 있는 수업은 피했는데. 내 잘못이니 누굴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과제 안내를 끝으로 수업이 마치자마자 그 남자는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폰을 내밀었다. 저기요, 낮은 중저음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울렸다.

 

 

진우씨 좀만 있으면 시험기간인데 과제 빨리 끝낼래요?- 오후07:45

 

 

으악, 진우 씨래. 들어도 들어도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다. ‘~’, ‘~학우님과 같은 표현들이 아직도 어색했다. 이건 아마 영영 안 익숙해질 것 같은데. 쭉 펼쳤던 다리를 모아 접었다. 뭐 했다고 벌써 시험기간이야. 투덜거림도 같이. 그러면서 손은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네 좋아요 짧고 명료한 문장이었다.

 

그의 제안에 우리는 제출일 보다 일찍 과제를 하게 되었다. 그와 내가 서로 시간표를 공유하고 공강 시간에 만나 후딱 처리하기로 했다. 이렇다고 시험공부를 더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만. 만나서 함께 논의하고 발표를 준비하면서 자연히 말 섞는 일이 늘어났다. 오메가인 내가 낯선 사람을 경계를 하고 피하는 게 쉬웠지, 단기간에 친해지는 일이야 거의 없었다. 타인에 대한 경계는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 오메가를 천대하고 무시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민호와 처음 만나 과제를 했을 때도 그랬다. 필요한 말 이외에는 일체 나누지 않았다. 금방하고 끝내고 싶은 마음이 컸으니까. 대부분은 왜 이렇게 까칠하게 구냐며 신경질을 냈지만, 민호는 내게 그런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나중을 기약하고 카페에 나서려는 나에게 그는 잠깐만 기다리라며 핫초코를 느닷없이 내밀었다. 추운데 가면서 드세요. 이게 뭔가 싶어 가만히 그 손만 바라보았다. , 단 거 싫어하세요? 멋쩍은 웃음에 거절하기도 뭣해서 감사합니다, 라며 들고 나와 버렸다. 너무 뜬금없다고 여기면서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홀짝홀짝 마신 핫초코는 매우 맛있었다. 다음번에 과제할 때 또 거기 가자고 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게 아마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 봤을 때 느낀 딱딱함과 무서움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덩치만 큰 순둥이. 사소한 배려를 느낄 때마다 마음 모퉁이 하나가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담이 늘고 강의실에서 나란히 앉게 되었다. 형 오늘 지각이야? 라는 문자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스며들다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나도 모르게 내 영역 일부를 민호에게 내어주고 있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앞에서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 민호를 바라보았다.

 

 

. 내 얼굴 뚫리겠어요.”

? , 미안.”

 

 

으악, 진짜 쪽팔려. 눈을 재빨리 밥에 고정시키고 입안에 숟가락을 집어넣었다. 쑤셔 넣었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살짝 쳐다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너무 길었나보다. 급하게 먹는 나를 향해 민호가 체하겠다며 물을 건넸다.

 

 

장난이에요. 천천히 먹어요. 천천히.”

으응.”

 

 

얼굴이 왜 이렇게 홧홧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요즘 안 그래도 쟤 때문에 마음 싱숭생숭하고 이상한데,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는 거야. 이것도 다 송민호 때문이야. 어처구니없는 변명만 속으로 늘어놓으면서 물을 삼켰다.

 

 

 

 

2.

옆에서 끙끙 앓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주위가 너무 어두워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스탠드를 찾았다. 이곳저곳을 더듬다가 겨우 스탠드를 켜 옆에 누워있던 민우를 확인했다. 땀이 흘러내리는 얼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민우야,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난다. 체온계, 체온계가.”

 

 

필요할 때 어디 있는지 생각이 꼭 안 나지. 체온계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더듬으며 서랍 이곳저곳을 열었다. 한 쪽에서는 응급실을 데리고 가야하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일단 찬물에 수건부터 적셔야 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 무는 가운데 겨우 체온계를 찾아 아이의 귀에 가져갔다. 삐이, 소리와 함께 화면을 확인하니 37도가 넘는 숫자가 떴다.

 

 

,엄마. 엄마아.”

, 민우야. 엄마 여기 있어. 민우, 열 많이 난다. 병원 가야겠다. 병원.”

 

 

땀에 젖은 민우의 앞머리를 넘겨주고 지갑과 핸드폰, 겉옷을 급하게 챙겼다.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아파서 끙끙거리는데. 민우가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민우를 내 옷 안에 밀어 넣고 급하게 밖으로 나섰다. 이 근처에 병원이 어디 있었는지, 이럴 때는 응급실을 가야하는지. 아님 약국을 가야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여전히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울고 있는 아이를 보자니 나도 같이 울고 싶어졌다. 대신 아파줄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할 텐데.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다 큰 놈이 뭐 하나 할 수 있는 게 없어. 나도 모르게 어떡해. 어떡하지.”만 반복적으로 내뱉고 있었다.

 

 

미치겠네. 병원이 어디 있었택시!”

 

 

고요함으로 잦아든 밤거리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앞에 지나가는 택시 하나를 잡아 몸을 실었다. 가까운 응급실로 빨리 가주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민우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0-3.

민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마음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나는 그의 앞에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이 요동치는 건 물론 의식하지 않던 체향까지 느꼈다. 제일 우스운 건, 나 자신이었다. 그가 알파라고 밝혔을 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거였다. 이미 송민호라는 사람이 단단한 내 성벽을 무너뜨리고 눌러 앉은 탓이었다.

 

 

미노야. 있자나, 나 너 좋아해에.

 

 

문제는 나였다. 사귀는 건 꿈도 못 꾸고 고백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함께 지내면서 이렇게 아옹다옹 지내는 게 훨씬 좋다고 그렇게 몇 번을 속으로 다짐했다. 전공 과제한다고 연락 뜸해진 민호에게 섭섭해 할 수도 없어서 그 마음을 숨기고, 나 말고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모습이 질투가 나는데 내가 그럴 자격이 없어서 애써 쿨한 척했다. 그런데 고작 술 하나 조절 못하고 취해버려선, 그간 내 노력들을 다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내 스스로가 우리의 관계를 무너뜨린 것이었다. 술 먹고 고백이라니, 술 먹고! 취중고백을 한 다음 날, 민호네 자취방에서 눈을 떴다는 사실에 또 좌절하면서 급하게 신발을 눌러 신었다. 이것보다 더 추하고 민폐인 게 어디 있을까. 내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형 전화받아요- 오후03:23

피하지 말고 만나서 이야기 좀 해요- 오후03:24

 

 

나 너랑 할 이야기 없어. 액정 위로 비친 한참 전에 온 카톡을 모두 답장하지 않고 그대로 핸드폰을 덮었다. 그 날 이후 민호를 피했다. 강의 시작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와 문 근처에 앉고, 수업이 끝날 때는 누구보다 빠르게 튀어 나갔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나를 자꾸 찾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베개 위로 얼굴을 묻었다. 못들은 척 할 테니 예전처럼 지내자고 할까?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그런 말을 들을 바에 차라리 이러는 게 나아.

 

그렇게 요령껏 잘 피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전공 수업이 마치고 그만 붙잡혀 버렸다. 문 앞에 떡하니 나를 기다리는 송민호를 보고 속으로 기함했다. 형만 내 시간표 있는 줄 알아요? 나도 있어요? 민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뒤따라 나오는 사람들이 시선이 우리에게 몰렸다. 급하게 손목을 뺀 나는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이야기하자며 먼저 발을 옮겼다.

 

 

빨리 그 할 말하고 가줄래. 요새 많이 바쁘거든.”

 

 

김진우 진짜 최악이다. 말은 그렇게 모나게 한 주제에 민호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무서웠다.

 

 

, 그 때 그 말 아직 기억해요?”

무슨 말.”

나 좋아한다는 거요.”

기억 안 나.”

정말로요?”

 

어느 덧, 민호가 내 코앞까지 다가와 물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 안 나. 미안해.”

그럼 왜 나 피해요?”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 외에는 나 피할 이유는 없는데.”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데.”

아니요, 제가 대답하고 싶어서요.”

 

 

내가 물러선 만큼 민호가 다시 다가왔다. 무슨 말을 할지 도무지 감히 잡히지 않는 나는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우물쭈물 서로가 서로를 할퀴던 내 두 손을 잡아 민호가 앞으로 끌었다. 당황한 내가 빼려고 하자 힘을 세게 쥐었다.

 

 

나는 살면서 그 날만큼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고백을 못 들어봤거든요.”

?”

나도 좋아해요, .우리 사귈래요?”

 

 

우리 사귈래요?

 

 

목소리와 말 그리고 표정까지 어느 하나 달지 않은 게 없었다. 너무 달다. 나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눈동자가 서로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숙일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너무 뜨거웠기에. 대신 위아래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할게요, 민호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사랑 받고 싶지만 미움 받는 게 더 무서워 항상 뒤로 물러나 있는 게 나였다. 그런 나에게 민호는 태양 그 이상이었다. 사랑 받고 싶다고 칭얼거려도 된다며 제 애정을 주었다. 그간 못 받았던 걸 보상 받는 것처럼 나는 그의 사랑을 잔뜩 취했다. 내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호는 학교와 집이 멀어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부터 자유를 갈망하는 나에게 민호의 자취방은 도피처이자 임시 휴게소와 같은 곳이었다. 처음에 외박하는 걸 일일이 보고했는데, 엄마 이외에 신경 쓰는 사람은 이제 없는 것 같아서 이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자취방이 내 것인 냥 드나들었다. 오늘도 역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발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민호야,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매트리스 위에서 자는 민호가 제일 먼저 보였다. 잠을 굳이 깨우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신발과 겉옷, 가방을 벗고 난 후 그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 따뜻해. 고개를 돌리니 새근새근 잘만 자는 민호가 보였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가슴이 더 뛰고 흥분되는 걸 느끼며 눈을 가만히 감고 있는 얼굴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었다. 진한 눈썹, 오똑하고 다부진 콧대, 말랑한 입술까지 손가락이 도달한 찰나,

 

 

.”

, 깜짝이야.”

 

 

민망함에 손을 재빨리 거두었다. 민호가 한 쪽 팔로 눈을 가리며 입을 열었다.

 

 

내 문자 못 봤어요?”

문자?”

오늘 하루만 우리 집 오지 말라 구요. 아침에 브리드 싸이클 와서 약 먹고 자고 있었는데, 지금 형 때문에 약이 다 소용없게 됐어.”

.”

어서 가요. 내가 주체 못할 것 같아.”

 

 

이것 때문이었나. 아까보다 더 진해진 체향에 내 몸이 불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주먹 쥔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본능을 억누르고 애써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페로몬에 노출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갈려면 진작 알아차리고 갔어야했다. 바지를 벗고 민호의 몸 위로 올라 타 그의 팔을 내렸다.

 

 

김진우,”

하자. 나도 주체하기 힘들어서.”

 

 

엉덩이 사이로 발기한 민호의 성기를 느끼며 그것을 살살 비볐다. 민호의 페로몬이 더욱더 진해졌다. 민호가 상체를 일으켜 내 얼굴을 붙잡고 입을 부딪쳐왔다. 입을 벌리고 뜨거운 혀를 받아내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티셔츠 속으로 손이 들어와 가슴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손마저도 뜨거웠다. 입을 뗀 민호가 내 가슴이 얼굴을 묻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행위에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맨투맨을 벗자 얇은 반팔 티셔츠가 드러났다. 그 위로 도드라진 유두를 빨아올리며 민호가 뭉개진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아무 것도 안 나오는데 왜 이렇게 달지. 여기는 항상 달더라.”

하아, 무슨, 개소리야,”

 

 

다른 한 쪽은 손으로 지분거리며 옷이 축축해지고 남을 정도로 젖꼭지를 빨았다. 민호가 무릎을 세워주지 않았더라면 자극에 못 이겨 진즉에 뒤로 넘어갔을 것이다. 반팔을 벗기는 손길에 나 역시 손을 뻗어 민호의 옷을 끌어 올리자 벗기기 쉽게 움직여줬다. 전부 다 탈의한 민호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허벅지 위로 내 두 다리를 얹히고 다리를 벌렸다. 그 틈 사이로 내 엉덩이가 빠졌다. 나는 민호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김진우.”

으응

아래가 축축하다. 젖었어.”

 

 

애액으로 잔뜩 젖은 속옷 위로 민호는 비문을 문질렀다. 하필 삼각브리프를 입은 탓에 젖은 속옷이 달라붙었다. 발끝이 절로 오므라들었다.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민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 좀 보여줘요, 그 말에도 겨우 고갤 들자 다시 입을 부드럽게 맞춰왔다.

 

 

하으음.”

 

 

엉덩이를 주무르던 두 손이 속옷을 반쯤 내려 진득하게 젖은 부분으로 다가가 비문을 둥글게 만졌다. 주름과 비문을 번갈아 자극하던 손길 때문에 자꾸 그 쪽 부분이 움찔거렸다. 애써 혀로 쓸리는 입천장에 신경을 돌리고 있을 때 손가락이 쑤욱 들어왔다. 손가락이 한 개가 두 개가 되고, 새 개가 되어 내벽 이곳저곳을 찔렀다. 맞댄 입에서 작은 탄성이 튀어나왔다. 한참 전에 발기한 성기가 만져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손을 뻗어 아래를 잡아 흔들자 그걸 눈치 챈 민호가 입술을 떼곤 내 손을 치웠다.

 

 

왜에

혼자 먼저 가는 건 치사하잖아요.”

히잉,”

, . 진짜. 콘돔만 끼고요.”

하지마. 안에 다 해

?”

브리드 때 임신한 오메가 이야기 한 번도 못 들어 봤어. 그냥 해.”

 

 

안에다 질펀하게 싸줘. 뒷말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졌다. 내 딴에 용기 내고 말한 건데, 잠잠한 민호가 이상해 고개를 들자마자 몸이 아래로 내려가 뒤집혔다. 무릎을 꿇고 엉덩이가 들린 자세가 민망해 이불을 세게 쥐었다. 내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은 민호가 제 성기를 비문에 살살 문질렀다. 나는 프리컴이 맺힐 만큼 정말 가고 싶은데, 밑으로 또 손을 뻗었다가 손등을 맞았다. 울상 짓자 민호가 금방이라도 흔들어 줄 것처럼 내 아래를 쥐었다. 그리고 그의 성기가 안으로 서서히 들어왔다.

 

 

하윽,”

 

 

몇 번의 관계를 맺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버거운 크기였다. 긴장을 풀라는 듯 민호가 등에 입을 맞추어 왔다. 허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처음에는 천천히 진입하던 성기가 한 번에 훅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내벽을 조였다. 민호의 입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내 귀를 자극했다. 안을 거세게 몰아치고 나가는 성기를 느끼며 낭심과 기둥을 번갈아 주무르는 손길에 나는 완전히 자지러지고 말았다.

 

 

, , 아읏, 미노, 미노야 !”

 

 

그의 손 안에 결국 끈적한 액체를 쏟아 내었다.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 민호가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았다. 부드럽게 만지는가 싶더니 이내 아까보다 세게 성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이어진 거센 피스톤질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앞이 번쩍번쩍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원래 시야가 보이기를 반복하며 음탕한 말을 계속 질러대었다.

 

 

깊어어, 하읏, , 미노야! 하으으, , 좋아, 거기,

 

 

사타구니와 엉덩이가 부딪혀 쩍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불을 쥔 손 위로 민호의 손이 겹쳐졌다. 민호의 피스톤질에 맞춰 허리와 엉덩이를 움직였다. 낮고 강한 숨소리가 귓속을 제대로 파고들었다. 엄청난 자극이었다. 하아, 민호가 깊게 숨을 내쉬며 귓불을 빨았다. 안이 따뜻해질 즈음 민호가 목에 새긴 잇자국을 혀로 살살 쓸었다.

 

후희를 즐기는 와중에 다시 내 몸이 뒤집혔다. 삽입한 채로 몸이 빙그르르 돌아가자 성기도 따라서 내벽을 돌았다. 눈을 마주치자 민호가 사랑해라며 이마를 맞대어 왔다. 이미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몸인데 얼굴에만 열이 더 오르는 것 같았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겨우 나도사랑해. 작게 속삭이자 민호가 웃으면서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췄다. 쪽쪽거리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들으며 그가 주는 애정을 한껏 느꼈다.

 

 

.”

?”

한 번으로는 역시 부족하죠?”

 

 

두 다리가 들리면서 민호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아직 질펀하게 싸지도 못한 것 같은데. 그 날 오후, 나는 하얗고 뿌연 액체가 애널에서 허벅지로 흘러내릴 때까지 민호와 사랑을 진득하게 주고받았다.

 

 

 

3.

 

, 선생님. 감기래요. 몸살감기.”

 

 

색색거리며 잠이 든 고운 얼굴에, 그 이마를 쓸어내리며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한결 나아진 표정에 마음이 놓였다. 조금만한 손에 내 손을 가져가 꼭 잡았다. 출근. 불현듯 그 단어가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 민우가 많이 아픈가요?

응급실에서 주사 맞고 오니 좀 나아졌어요. 그래도 오늘 하루는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 네네, 어머님. 요새 안 그래도 민우 옷차림이 너무 얇아서 저번에 말씀 드렸는데

, 그랬었.”

- 낮에는 따뜻한데 아침, 저녁으로 추워져서 그런지 민우가 유치원에서 기침을.

 

 

그 소리를 듣자마자 뒷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통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아니 조금 뜨거운 온도가 더 생생해졌다. “, 어머님. 그럼 들어가세요.”라는 말을 끝으로 정신이 돌아왔다. 그 이후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머리를 한 번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 아이의 아픔이 나로서 비롯된 것이었나. 아이에게 관심을 좀 더 쏟았어야 했는데. 오죽했으면 유치원 선생님이 옷차림을 이야기했겠냐고. 두꺼운 잠바 하나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나에게 화가 났다.

 

 

하아아.”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고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이 와중에 출근이라니. 출근. 아이가 아픈데 출근 걱정부터 하고 있다. 탁자 위에 올려둔 액자를 멍하니 바라보다 민우의 손등 위로 입을 맞추었다. 민호 생각이 났다. 이럴 때 민호가 있었다면. 민호는 어떻게 했을까.

 

 

미안해, 민우야. 엄마가 너무 부족해서 미안해.”

 

 

입술로 전해지는 온기가 내 눈으로 옮겨 온 것만 같았다. 일에 치여서 제대로 신경 써주지 못하는 것도 미안하고, 아픈 민우를 두고 출근을 하는 것도 미안했다. 요새 엄마가 일이 너무 많아서 민우를 잘 챙겨주지 못했어. 미안함과 동시에 같잖은 핑계들이 자꾸만 스멀스멀 올라왔다. 일에 집중하면 민우에게 소홀해지고, 민우를 신경 쓰자니 일이 눈에 밟히고, 일은 그만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있는 기분에 숨이 막혔다. 마치 수면 위를 떠오른 물고기처럼.

 

 

 

0-2.

이별 선고를 받았다. 민호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내가 여기 있는 게, 오늘의 이 약속이 다 거짓이라고 착각하고 싶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며 이유를 물었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데 이유가 있어요? 헤어지고 싶으니까 헤어지는 거지. 제 할 말을 마친 송민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모습을 눈으로 따라가며 멍청하게 지켜만 보고 있었다.

 

36개월간의 연애가 종지부를 찍었다. 첫 연애가 끝이 났다. 대학생 때부터 시작해 직장인인 지금까지 함께였던 시간들이 갑자기 끝이 났다. 첫 손잡기, 첫 포옹, 첫 입맞춤 그리고 첫 섹스까지 다 민호였는데, 그 긴 과정과 달리 끝은 너무 간단했다. 허무하기까지도 했다. 그 날, 무슨 정신으로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잠을 자는 거였다. 잠을 자면 괜찮을 거야. 허리가 아플 때까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안 난다 싶더니 자고 일어나서 눈물이 터졌다. 눈을 뜨자마자 습관처럼 카톡을 확인했다. 간밤에 민호에게 연락이 왔는지. 그제야 실감이 났다. 민호 프로필 사진에 함께 찍은 사진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대화창은 거기서 보자는 내용을 끝으로 진전이 없었다. 잘 자,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다녀요 따위의 말들은 과거가 된 것이다.

 

너무 이상하잖아.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안 그랬는데. 우리 진짜 잘 지내고 있었단 말이야. 나에게 구질구질함이나 쪽팔림 따위야 문제가 아니었다. 민호와의 이별을 인정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싫었다. 몇 번을 핸드폰만 들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며 고민하다 결국, 다시 민호에게 연락을 했다. 전화를 받을 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카톡을 보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흐려지는 눈에 힘을 주었다. 숫자 1이 사라지고 돌아오는 답은 질린다였다. 형이 그러는 거 진짜 질려요. 애도 아니고.

 

매정한 놈. 애꿎은 베개에 화풀이를 하다 이불 속에 파고들었다. 내가 너무 칭얼거렸나봐, 나만 생각해서 떼를 썼나보다. 머리 한 쪽은 민호를 원망하고, 다른 한 쪽은 나를 원망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나 때문 아니야? 삭막함이 남은 이 집에 홀로 끙끙 앓았다. 밥은 고사하고 물 마시는 것도 전부 귀찮았다. 내겐 허무함이 가득했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숨죽여 계속 울었다. 이럴 거면 왜 내게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주었나. 잘해주지나 말지. 과제할 때 그냥 과제만 했어야했는데 나는 왜 그 애정을 받아들였나. 애정 같은 건,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는데. 열병에 시달리는 것처럼 몸 상태가 최악에 치달을 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민호가 친구라며 소개시켜준 승윤이었다. 전화가 끝나는 순간, 나는 곧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민호에게 가야해, 그 문장 하나가 내 몸을 지탱했다.

 

 

송민호, 나야. 문 열어.”

- . 일단 진정하고 내 말 잘 들어요. 민호 아파요.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나와서 이야기 좀 해!”

- 3년 남았대요. 길어야 3.

, 민호야, 나와. 나오라고. 나와 봐, 문 좀 열어줘.”

- 민호도 저한테 그랬어요. 지금 속이 답답한 거 빼면 사지 멀쩡한데 이게 무슨 소리냐고. 영화처럼 쓰러지지도 않고 피 토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길어야 3년이냐고.

제발. 나와서 이야기 좀 해. 흐어엉, 제발.”

- 계속 부정하다가 결국에는 자기는 곧 죽을 송장인데, 형이랑 어떻게 있을 수 있냐고. 그래서 민호가,

 

 

온몸에 있는 힘을 쥐어짜 문을 두드렸다. 제발 문 열어줘, 민호야.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니. 넌 진짜 바보야, 멍청이야. 꺽꺽 울면서 애원조로 말하길 몇 번, 그제야 문이 열렸다. 코끝으로 술 냄새가 났다. 민호의 표정은 내가 여태껏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낮고 우울한, 그리고 무서운 표정에 나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김진우. 이게 무슨 짓이야.”

민호야,”

묻잖아. 이게 무슨 짓이냐고.”

너 아프다며.”

?”

다 들었어. 전부 다.”

어디서 뭘 어떻게 들은 건지 모르겠다. 내 귀엔 그거 다 헛소리야. 그냥 가라. .”

거짓말 하지 마. 표정은 왜 그렇게 엉망인데.”

 

 

왜 너는 내가 짓는 표정이랑 똑같은데. 우는 건 나인데, 왜 너도 울 것 같은데. 눈물도 많은 주제에. 억지로 현관까지 들어가자 문을 잡고 있던 민호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문이 세게 닫히고 나서도 나는 간간히 훌쩍였고 너는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였다가 얼굴을 손으로 세수하듯 쓸어내린 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냥 가줘. 제발. 못 들은 척하고 가줘.”

싫어. 못 가. 안 가.”

김진우.”

싫어. 안 들을 거야. 안 떨어질 거야.”

 

 

네 품에 파고 들며 얼굴을 묻었다. 허리를 세게 끌어안아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내 팔을 붙잡은 네 손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간절했다. 절박했다. 계속 네 곁에 있고 싶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내 입에선 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 같은 부류의 말을 계속 하고 있었다. 결국 너도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말없이 나를 세게 끌어안는 몸짓에, 울어야 하는 건 너인데 내가 소리를 내어 울었다. 신파극이 따로 없었다. 그만큼 너나 나나 이별은 감당하기 너무 힘든 것이었다.

 

 

 

4.

비염도 유전인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한바탕 감기가 지나간 듯 했으나, 코는 여전히 훌쩍거려서 병원에 한 번 더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 입에선 비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민호도 하루 종일 휴지 달고 다녔는데. 또 코를 훌쩍이는 모습에 가방에 넣어둔 휴지를 꺼냈다.

 

 

민우야, 흥해. .”

!”

이거 봐. 민우 코에서 나온 거다. 에이, 지지다. 지지.”

 

 

뭉쳐둔 휴지를 앞에 내밀자 민우가 놀리지 말라며 입술을 내밀었다.

 

 

알았어, 알았어. 엄마가 놀려서 미안해.”

! 민우 화나떠.”

화났어?”

엄마가 민우 안아주면 화 풀릴 수도 있어.”

그럼 당연히 안아줘야지.”

 

 

민우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금세 웃는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귀여운 녀석. 이렇게 단순한 점도 아빠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형도 만만치 않거든요, 라는 볼멘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너보다는 아니야. , 대박. 김진우 진짜 뻔뻔해. 그걸로 투닥투닥거릴 모습이 떠올랐다. 민호가 있다는 조건 하에 가능한 일이지만.

 

 

엄마 우리 지금 어디가?”

아빠 보러 가.”

아빠아?”

, 아빠. 민우 아빠.”

 

 

오래간만에 민호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벨트까지 꼼꼼하게 메어주고 내 자리로 돌아와 시동을 틀었다. 매년 있는 기일 외에도 늘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일이다 육아다 이것저것에 치여 가야지라는 생각만 하고 가질 못했을 뿐이지. ○○추모공원. 네이비게이션에 장소를 입력하면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접어들면서 종알종알 떠들던 민우도 잠이 들었다. 옆을 힐끔 바라 보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손으로 틀어둔 라디오를 조용히 줄였다. 민호를 보러 가는 일은 설레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먹먹했다. 민호는 항상 기억에 품고 있지만 저편에 숨겨두는 사람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와서 숨겨둔다는 표현도 뭐하지만. 아직도 나는 현실에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퇴근하면 같이 돌아올 사람이 한 사람 더 있는데. 저기 문 열고 들어올 사람이 있는데. 닫힌 문을 빤히 쳐다보는 버릇이 생긴 것도, 민호 생각 하나에 웃었다가 울었다가 하는 일도 전부 내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친절한 목소리를 뒤로 주차를 마쳤다. 민우는 여전히 잠에 푹 빠져있다. 아이를 홀로 차 안에 둘 수 없어 품에 안고 챙겨둔 가방을 들었다. 눈앞에 빽빽한 나무들이 보였다. 저 사이에 민호가 있다. 민우 아빠가, 내 남편이, 우리 민호가.

 

 

 

0-4.

그 날, 울면서 내가 민호 품에 파고든 날엔 창 너머로 해가 뜨는 걸 볼 때까지 사랑을 나누었다. 섹스하면서도 둘 다 엉엉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쑤시는 허리를 붙잡고 겨우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자 술판이 따로 없었다. 회사는 그만 두었다고 했다. 어차피 살 날 얼마 안 남은 거 모아둔 돈 다 쓰고 죽을 심산이었단다. 그리고 억지로 목숨 이어갈 바에 할 거 그냥 일찍 죽는 게 낫다 생각고 해서 술을 대판 마셔댔다고 했다. 기가 찼다. 헛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술병을 한 곳으로 모았다. 헤어지자, 뭐다 한 번만 더 그런 소리해봐! 내 말에 민호는 그저 조용히 청소기를 돌릴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독립을 했다. 직장까지 다니는 아들놈이 독립하겠다는 말에 말리는 사람 하나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간절히 원한 독립은 단순하고 싱겁게 얻어졌다. 허탈하기 짝이 없었으나 한 편으로 매우 개운했다. 캐리어 하나 끌고 민호네 집으로 들어갔다. 날 반기던 민호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급하게 앞으로 뛰어왔다. 내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살피기 바빴다.

 

 

얼굴이 왜 이래.”

집에 결혼 할 사람이 있다고 했어. 결혼식은 생략하고 바로 혼인신고서 쓴다고 했다가.”

혼인신고서?”

. 너랑 나랑. 혼인 신고서 쓴다고 통보하니까 재떨이가 날아왔어.”

.”

퇴근하고 집에 오면 곰 같은 남편이 날 반긴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설레는 걸.”

 

 

아무렇지 않게 굴며 잠바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독립은 민호와 미리 의논한 사안이었지만 혼인 신고서는 좀 더 생각해보자며 민호가 나를 설득했다. 나는 시간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먹었으니까. 충분한 고민과 생각을 거쳐 내린 결정이었다. 민호를 마음에서 보내줄 자신도, 마음도 없었다. 술에 취한 어느 날에, 울면서 사랑 받고 싶다고 매달린 김진우와 그런 나에게 조용히 입술을 맞춰온 송민호를 기억하기에 더더욱. 결정에 대한 결과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말은 하지 않지만 하루하루가 초조했다. 민호의 겉모습이야 아직 멀쩡하지만 언제 쓰러질지 모를 일이었다. 민호는 침대 위에서 3-6개월 치의 생명 연장해서 뭣하냐며 수술 대신 약을 타왔다. 도긴개긴이지만 어차피 아픈 거 침상 위에서 골골거리는 것보다 내 옆에 있겠다는 게 민호의 생각이었다.

 

여러 차례의 대화를 걸쳐 우리는 혼인 신고서는 물론, 아이도 가지기로 했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건 내 욕심이 더 컸다. 나는 어떻게든 민호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려고 애썼다. 아이도 그 중의 일부였다.

 

아이를 가지기로 마음먹으니 식탁 위의 억제재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먹지 않았다. 모처럼 맞는 여유로운 주말이었다. 민호는 그림 그리기에 몰두해 있었고 나는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아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뉘였다. 감기라는 생각이 언뜻 스칠 즈음, 이불에 베여있던 민호의 페로몬향이 내 코를 거세게 자극했다. , 드디어. 망설임 없이 바로 민호에게 달려가 그 넓은 품에 안겼다.

 

 

하읏, , 아으,

이제는 가슴만 빨아도 바로 축축해지는 거 알아요? 봐봐, 빤지 얼마나 되었다고 밑에가 다 젖었어.”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애액을 훑은 손가락을 민호가 내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기나긴 전희였다. 쾌감을 온 몸에서 이끌어 낼 모양인지 평소보다 짙고 오랜 애무에 벌써부터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아래에서는 넣어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뜨거운 열을 내뿜는 구멍이 녹진녹진하게 수축하고 이완하기를 반복했다.

 

프리컴으로 축축하게 젖은 속옷이 벗겨졌다. 상체를 일으켜 아까부터 무섭게 발기한 민호의 것을 입에 담으려고 했다. 잠깐만, 민호가 아래로 내려와 헤드에 등을 기대고 내 엉덩이가 그의 앞으로 향하게 허리를 잡아당겼다. 엉덩이는 최대한 들어 올리고 상체는 내려 풍성한 체모 사이로 민호의 성기를 입에 담았다.

 

 

으으음!”

 

손가락이 들어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뜨겁고 말캉한 게 비문을 건드렸다. 손 하나가 엉덩이 한 쪽을 단단히 붙잡고 남은 손이 아래로 내려왔다. 민호의 것을 물고 있는 입에서 뭉그러진 신음 소리가 나왔다. 혀의 돌기가 애널과 주름을 매만지며 구멍을 건드리자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아래를 흔드는 손길과 뒤에서 오는 자극에 신경이 쏠려 입 안에 있는 민호의 것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겨우겨우 느리게 쓸어 올리고 내릴 반복할 뿐.

 

민호 손에서 가버리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정을 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민호가 내 상체를 뒤집자 그의 배 위로 앉는 꼴이 되었다. 내가 뒤로 넘어지지 않게 다리를 세워 접은 덕분에 등을 기댈 수 있었다. 마주보고 있는 상태가 되자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다시 키스를 나눴다. 등허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앞으로 넘어와 젖꼭지를 꼬집었다. 그가 주는 자극을 마음껏 느끼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키스에 집중하느라 내가 다시 침대 위로 눕혀진 줄도 몰랐다. 다리 사이로 자리 잡은 민호가 다리 하나를 잡아 한 쪽을 허리에 걸쳤다. 민호의 것이 안으로 들어온다는 생각에 긴장과 흥분이 섞여 나를 보채게 만든다. 어서 넣어달라는 말에 민호는 요도를 천천히 비문에 갖다 대었다.

 

 

하응! , 흐으,

 

 

민호의 성기가 더 깊게 파고들 수 있도록 다리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움직임이 느려질수록 애가 타는 건 나였다. 천천히 나갔다가 한 번에 쾅하고 빠르게 들어오는 성기에 온몸이 반응했다. 다시 고개를 쳐 든 성기에서 묽은 액이 질질 흘렀다. 민호가 허리에 걸친 다리를 거칠게 잡아 풀더니 적나라하게 두 다리를 벌렸다. 민망한 자세에 얼굴 붉힐 세도 없이 수직으로 내려 박기 시작하는 탓에 나는 입을 벌리고 신음을 있는 대로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까 전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강하게 쾌락점을 찍어 누르는 행위에 눈물까지 고였다.

 

 

너무, , 좋아! 아앙! 어떡, , , 흐으

후우, 김진우, 진우야.”

으읏, 미노, 미노야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민호의 페로몬마저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시원한 향이 코끝에 다가오며 파도처럼 덮쳤다. 점멸의 순간에 민호가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강하게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 이후로 우리는 몸을 계속 섞었다. 내 몸 모든 부분이 민호의 손길을 탔고, 서로가 떨어지면 죽을 것 마냥 입술과 몸을 붙였다. 이 시간 일분일초가 우리에겐 너무 소중했기에 더욱 절실했다.

 

몇 번의 정사인지 기억도 안날 무렵, 힘없이 그의 상체로 쏟아져 내렸다. 나를 품에 안아 옆으로 뉘인 그가 머리를 살살 쓸었다. 민호의 손길을 느끼며 쇄골 부근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나 따뜻한데, 이렇게나. 이렇게나. 문득 밀려오는 서러운 감정에 눈물이 났다. 우리 둘 다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어서일까.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은 민호가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내가 잠이 들 때까지도 사랑한다고 속삭여줬다.

 

 

5.

잠든 민우를 안고 위로 올라왔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자 풀내음이 밀려 왔다. 기억을 더듬어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 송민호가 적힌 명패를 찾는다. 얼핏 보면 다 똑같은 나무속에서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옆에 안내번호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겨우 명패를 발견한 나는 보자마자 인사부터 건넸다. 안녕, 민호야.

 

 

여기 봐봐. 민우도 왔어. 많이 컸지? 민우가 피곤했나봐 여기 도착하기도 전에 잠이 들었어. 민우도 아빠한테 인사하면 좋을 텐데.”

 

 

민우를 고쳐 안으며 들고 있던 가방을 밑에 내려다 두었다. 말을 하려고 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웅크리고 풀기를 몇 번, 그제야 나는 안부를 물었다.

 

 

민호야. 잘 지내?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 회사 일은 지치고 힘든데, 뭐 돈 버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그렇지? 근데 민우 얼굴만 보면 그거 다 잊어버려. 정말로. 어제는 민우가 미술대회에 그림 보낸 거 상 받아왔더라. 당신 닮아서 그림 하나는 야무지게 잘 그려. 우리 아들 화가 시킬까? 당신도 미대 다녔잖아. 나는 가위질도 잘 못하는데 민우는 뚝딱뚝딱 잘해. 할 말 되게 많았는데 지금 막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된다.”

 

 

후우, 숨을 몰아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민우가 되게 아팠어. 요새 날씨 춥잖아. 내가 바쁘다고 우리 민우 옷도 제대로 못 챙겨줘서 감기에 걸렸어. 진짜 나쁜 엄마지? 새벽에 끙끙 앓으면서 땀이란 땀은 다 흘리고 있는 거야. 급하게 애 안고 밖을 나왔는데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덜컥하는 기분이었어. 민호 네가 너무 아파서 쓰러진 날이 생각났거든. 너무 무섭고 애는 아프다고 우는데 나는 이것저것도 못하고. , 진짜.”

 

 

안 울려고 했는데. 그 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땐 울지 않았는데, 왜 지금에서야 터지는지. 그간 쌓아둔 게 많았나보다. 삭이고 또 삭힌 케케묵은 감정들이 잘 참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민우가 깰까봐 애써 입술을 꾹 물었다.

 

 

민우가 겨우 잠든 거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나는 또 출근 생각이 나는 거야. 애가 아픈데. 출근해야 해. 나한테 너무 화가 났어. 있잖아. 가끔씩은 민우가 울면 나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애 따라서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야. 내가 너무 서툴러서 그런가봐. 나도 엄마가 처음이니까. 민호야, 나는 내 나름대로 민우랑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이젠 정말 모르겠어.

 

 

 

0.

좋아하던 술을 일체 끊고 음식도 가려 먹은 지 한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거하게 헛구역질을 한 나를 본 민호가 곧바로 테스트키를 사왔다. 정확히 빨간색 두 줄이 떴다. 임신이었다. 그 날 이후로 전보다 더 조심히 몸을 움직였다. 나보다 민호가 더 안절부절 못했다. 샤워라도 하면 문 앞에서 계속 , 도와줄까?”라고 물었다. 아직 배도 안 불렀는데 영 불안한 모양이었다.

 

4개월쯤 지나니 서서히 신체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저리거나 붓고, 허리와 등이 쑤시기 시작했다. 배가 불러오자 민호는 저가 씻게 주겠다고 난리였다. 다른 목적이 있는 거 아니고? 놀리듯이 묻자 민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런 몹쓸 인간은 아니야! 누가 뭐랬나. 키득키득 웃으면서 태교용 음악을 틀었다. 우리 당분간 이런 노래만 들어야 해. 감상으로 시작해서 결국 잠으로 끝이 났지만, 자주 들으려고 노력했다.

 

입덧이 확실히 고역이긴 했다. 밥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났다. 낮에 그렇게 못 먹다가도 밤이 되면 식욕이 돌아왔다. 왜 그러는지 정말 의문이었다. 자다가도 음식이 먹고 싶어 일어났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일이 늘어났다. 아마 종류란 종류는 다 시켜 먹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민호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버거워했다. 이러다 영영 잠에 드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자는 시간이 늘었다. 이것 외에도 몸에 이상이 있는데 숨기는 게 아닌지,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누가 지금 누구를 걱정하는가 싶었다.

 

민호는 꽤나 태교에 열심이었다.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배에 몇 번이고 뽀뽀를 하고 쓰다듬어 내린 줄 모른다. 내 배는 이 이상 부풀면 터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출산할 시기가 임박하자 우리는 유아용품을 구입했다. 조그마한 신발이 민호 손 위에 올라가자 잭과 콩나무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귀여워서 어떡해! 고 큰 덩치로 방방 들떠있는 민호를 보자 문득 가슴이 저릿했다. 내가 아이를 품고 있는 동안, 민호는 서서히 말라갔고 병원에 들락거리는 횟수도 늘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이별을 준비해야했다.

 

출산 예정일보다 일찍 아이가 우리를 찾아왔다. 쿡쿡 쑤시는 배를 부여잡고 병원엘 갔다. 괴로워하는 내 모습에 민호는 제 입술만 짓이기며 내 손을 붙잡았다. 분만실로 들어가고,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를 만났다. 아이를 보자마자 아픈 것도 사라지고 웃음이 터졌다. 진한 눈썹이 영락없는 송민호 아들이었다. 눈도 작고 코도 작고 입도 작고, 다 작아. 신기해하는 나를 보며 민호가 입을 열었다.

 

 

아까 형이 그렇게 힘들어 하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더라. 속상하고 화가 났어.”

계속 곁에 있어 줬잖아. 그럼 됐지, .”

 

 

안녕, 민우야. 엄마야. 미리 지어둔 이름을 부르며 볼을 부볐다. 입 안에서 아직 민우라는 두 글자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엄마라는 호칭도 낯간지러웠다. 아직 제대로 눈 뜨지도 못하는 아이를 민호와 나는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커주렴, 작은 소망을 담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민호는 아이를 보는데 소질이 있었다. 내가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거리면 민호는 차분하게 아이를 안고 등을 두드렸다. 아이의 웃음을 보기 위해 온갖 표정을 지었고, 몇 번이나 안고 뽀뽀했는지 모른다. 민우가 주는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에겐 힐링이자 큰 행복이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민호는 민우가 100일을 조금 넘길 때까지 우리와 함께 있었다. 멀쩡한 몸이 나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약을 꾸준히 먹고 있었다고 해도 병의 속도는 늦출 수가 없었다. 갑자기 쓰러진 민호는 며칠 동안 그렇게 싫다던 병원 침대 위에서 앓기만 하더니, 결국 눈을 뜨지 못했다. 영영. 간다는 인사도 없이.

 

 

 

6.

고 작은 손이 내 얼굴에 닿았을 때, 놀란 내가 아이를 바라보자 민우는 내게 이야기했다. 울지 마, 그 순간 나는 나를 제일 사랑해주던 누군가와 겹쳐 보이는 환상을 보았다. 엄마 울지 마. 자그마한 손이 내 뺨을 닦았다. 으응, 엄마 안 울어. 안 울게. 뺨 위로 올라온 손을 맞잡아 쥐었다. 민우는 분명 선물이었다. 민호가 이 세상에 살았다는 흔적이자, 내게 남겨진 소중한 선물이었다.

 

 

민우야, 아빠야. 인사해야지. 아빠, 안녕.”

아빠. 안녕!”

 

 

엄마, 나 내려죠. 내 품에서 내려온 민우가 나무로 달려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그 나무를 감싸 안았다. 다 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걸 안으려고 애를 썼다. 아빠, 이렇게 하면 안 춥지? 왜냐면 내가 따뜻하니까! 그 모습에 울던 것도 잊어 버리고 웃음이 났다. 뭐가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종달새처럼 지저귀는 모습을 나는 한참동안 눈에 담았다.

 

 

 

7.

 

 

559.

 

고대하던 퇴근 시간이다. 늘 으레 그러하듯 누구보다 일찍 6시가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사원증을 찍는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내가 제일 먼저다. 동료 하나가 오늘은 내가 1등 하려고 했는데, 진우씨를 이길 수가 없어 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이기시려면 가방 싸는 법부터 연습해야할 걸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도착했다.

 

밖에 나가기 싫을 정도로 추워진 날씨에 시동을 켜고 제일 먼저 한 일은 히터를 트는 것이다. 민우 춥겠다. 차를 부드럽게 몰아 유치원으로 향했다. 빡빡한 퇴근길은 몇 번을 지나도 도통 적응이 되질 않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유치원 행사나 민우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를 기다린다. 저 멀리서 우당탕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그 쪽으로 돌리면, 오늘도 역시 가방도 제대로 안 메고 뛰어오는 철부지 하나가 있다. 끈 달린 벙어리장갑을 한 쪽에 끼고, 한 쪽은 바닥에 질질 끌면서 나를 향해 급하게 달려왔다. 저러다 또 넘어지는이크, 생각하기 무섭게 쿵하는 소리를 내며 민우가 넘어졌다.

 

 

민우야.”

나 괜차나!”

 

 

민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릎을 살살 매만졌다. 그제야 장갑도 가방도 똑바로 입고 걸어온다. 그 모습이 너무 의젓해 보였다. 두 팔을 벌리자 민우가 품 안으로 들어왔다. 민우 안 울고 대단한데, 선생님도 놀란 눈치였다. 난 씩씩하거든여! 민우의 말에 선생님과 내가 동시에 웃었다.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유치원을 나서며 민우는 후후 입을 불었다. 입에서 나오는 김을 보고 용가리라며 용을 흉내 내기 바빴다.

 

 

민우, 아까 안 아팠어? 괜찮아?”

으응, 지금도 조금 아픈데 참을 수 이쪄.”

우리 민우 멋있는데.”

그러엄!”

 

 

의기양양한 모습이 꼭 송민호 같았다. 어떻게 이리 아빠를 쏙 빼다 닮을 수가 있지? 민우와 사소한 이야기로 떠들며 집으로 들어가는 길, 느닷없이 작은 손가락이 하늘로 향했다. 눈이다! 누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하얀 눈들이 포근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올해의 첫 눈이었다.

 

-


안녕하세요! 파란입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다들 옷은 따뜻하게 입고 다니시죠??

 

드디어 마감을 했습니다 이만사천자를 쓰며 하얗게 불태웠네요

월간 송진 창간호에 참여하게 되어 너무너무 기뻤고 이렇게 끝을 맺으니 시원섭섭합니다 쓰고 퇴고하면서 '! 너무 부족해! 이걸 어떻게 내놓지?' 이 생각만 오조억번한 것 같아요;-;

 

처음에 이 글은, '때로는 아이가 울면 나도 따라 울고 싶었다'는 문장과 임출육(임신육아출산)이라는 소재에 꽂혀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건지 아직도 의문이에요...

 

인물들의 감정선을 좀 더 표현하고, 각자의 사정이나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미 방대한 분량에(...) 기타 문제로 그러지 못했습니다 수위 부분에서 기력을 소진한 것도 있어요 허헣 진우가 왜 집에서 완전히 독립하였는지, 민호가 진우와 이별을 결심했을 때 마음이나, 혼인신고서와 임신을 주저한 이유, 입덧하는 진우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민호, 진우가 민호를 보내는 과정 등을 더 세심하게 다루지 못해 아쉽고 또 쓰면서 표현의 한계를 많이 느꼈습니다 읽으시면서 충분히 읭? 하셨을 거에요 쓰고 나니 진짜 못 적은 거 많네요(ㅠㅠㅠㅠ) 제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상,하로 나누어서 내용을 보충하거나, 민호 입장에서 외전을 쓰고 싶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거 포함해서요!

 

이 긴 글과 제 사담까지 읽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월간송진에 참여해 글을 쓸 수 있어 너무 행복했습니다

관리자님께도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세요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D

 

- 파란 드림


Written By. PARAN (Twitter Account : @something_cloud)

화.쏘.공(화분이 쏘아 올린 작은 공) (Written by. Norah)
2017. 11. 26. 21:20

화.쏘.공 (화분이 쏘아 올린 작은 공)



w. Norah




[진우형번호그만바꿔: 관심 가는 행동과 말은 자제해줬으면 좋겠어. 오후 11:38]

 

그럴 거면 애초에 관심 끄는 행동과 말을 자제했어야죠. 사람 마음은 잔뜩 들쑤셔 놓고 이제 와서 자기 혼자 발 뺀다 이거지? 왜인지 그 말도 안 되는 수작들에 말려든 것 같은 송민호(위너 멤버, 25) 씨의 넋두리였다.

 

앞집으로 이사 온 지 고작 세 달 째의 일이었다. 손에는 깨진 화분이 담긴 종량제 봉투 하나가 달랑달랑 들려 있었다. 꽁꽁 싸매서 이 집에서 쫓겨나듯 나오기 직전 동거인 김진우(직장동료, 27) 씨가 쥐여준 것이다. 괜히 심통이 나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오락실 스트리트파이터라도 되는 것처럼 광클했다. 이게 다 얘 때문이다.

 

[진우형번호그만바꿔: 밖에서 무생물한테 대신 성질부리는 거 다 들리거든? 무척 신경 쓰이네. 부탁할게. 오후 11:40]

 

, !”

 

모든 건 화분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었다.

 

 

 

*

 

 

 

, 내 앞에서 끼 부리지 마.”

 

자기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걸까. 민호는 황당함을 넘어 이제는 억울할 지경이었다. ‘그냥 웃다가 쳐다보는 것도 안 돼요?’라고 물었더니 개정색으로 맞받아쳤다. , 안 돼. 진우는 의외로 단호한 면이 있었다.

 

좔 모루겠쒀여. 분명 10분 전까진 요즘 핫하다는 나몰라패밀리 협찬 영상을 보면서 같이 낄낄댔단 말이다. 큭큭큭 숨도 못 쉬고 웃으면서 따라하다가 눈이 마주쳤을 뿐이었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대뜸 훈계하는 거다. 어디서 형님에게 눈웃음을 치냐는 둥 혼자 실컷 열을 내더니 방으로 사라졌다. 같이 끓여 먹기로 한 2인분의 라면은 결국 다 민호 차지가 됐다. 이제는 웃는 것도 금지 당했다. 아니, 그렇게 좋으면 잘해주든가. 맨날 성질만 부리면서 어쩌라는 건지 정말. 혹시 자신을 좋아하는 게 그렇게 화가 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싶어서 민호도 심란하기 그지없는 상태가 됐다.

 

처음에는 그래 우리 형 요즘 많이 예민하구나 싶었지. 일 년 내내 쉴 틈 없이 스케줄을 뛰었으니까. 아무리 바쁜 게 쉬는 것보다 낫다고 하지만 그래도 형도 사람인데 잠이 부족하면 짜증이 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게 한두 번 반복되는 패턴이 아니게 된 순간부터는 문제가 됐다. 진우가 유독 자신에게 예민해지기 시작한 처음을 떠올려 보니 여름쯤이었다.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벌칙으로 볼에 사이좋게 뽀뽀를 네 번씩 주고받았던 적이 있었다. 어차피 방송의 재미상 무조건 벌칙은 뽀뽀하기로 결론 날 것이 뻔했는데, 역시나였다. 이렇게 된 거 웃기게 재미라도 살려보자 했는데, 막상 볼에 닿는 감촉이 너무 이상했다. 그러니까 너무 촉촉하고, 말랑했다는 거지. 그때 어렴풋이 들려오던 이승훈(직장동료, 26) 씨의 한 마디.

 

이러다가 이상해지는 거 아냐?’

 

이상해졌다. 그건 민호보다 진우 쪽이었다. 곧바로 며칠 되지 않아 태국 공연 일정으로 출국을 했는데, 공항을 향하는 벤 안에서부터 침묵으로 일관하는 거다. 자신에게 뭔가 화난 게 있나 싶어서 민호가 먼저 수그리고 들어갔다. 진우의 호텔방을 두드렸다. 빼꼼 고개를 내민 얼굴에 심란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손에 든 위스키 병을 흔들어 보이며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렸다. 평소보다 훨씬 적은 양의 알코올을 들이켰음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빨리 취했다.

 

, 괜찮아요?”

귀고 싶어.”

?”

너만 보며능……싶어어

 

뭐라고 중얼거리기에 푹 숙여진 고개를 따라 눈을 맞췄더니 대뜸 어깨를 붙잡는 진우였다. 눈에 초점이 안 맞는 것 같은데요, .

 

아놔, 이 깜찍한 새끼.”

??”

재롱떠는 거 작작해줬으면 좋겠어. 오늘부터 1일 하고 싶어지니까.”

???”

 

동그래진 민호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최대 확장됐다. 복숭아처럼 두 볼이 발개진 진우는 그런 민호를 보며 자못 험악한 고백과 달리 참으로 해사하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넌 왜 입술이 그렇게 동그랗구 말할 때 입모양도 귀여워?”

???”

 

그것은 시발점(욕 아님)이었다. 계절을 지나 가을이 되면서 진우의 뜬금없는 고백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때는 불어나는 살림살이에 더 이상 그들의 분가를 미룰 수 없었던 날이었다. 그래 봤자 앞에서 앞으로 나눠서 이사하는 것이었는데, 인테리어를 하면서도 나름 취향이 잘 맞아서 침실도 함께 꾸미기까지 하지 않았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심지어 작은 선인장이라도 집에 식물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진우를 닮은 다육이를 선물한 것이 고작 지난 달이다. 그날 진우의 표정이 어땠던가. 상당히 좋지 않았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는 민호다.

 

, 제가 형을 위해서 다육이 한 쌍을 사왔어요. 우리의 이사를 기념하는 선물이에요. 앞으로 잘 키워봐요.”

뭐야, 이 좆만한 것은.”

 

사실 진우는 민호가 내민 다육이를 보고 할 말을 잊어버렸다는 것이 맞았다. 뭐야, 이 존나 귀여운 것은. 말이 곧이곧대로 나왔어야 했는데, 격한 감정에 실언을 했음도 알아채지 못하고 소중하게 화분을 받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송민호는 그렇게 안 생겨서 이렇게 섬세하고 쁘띠한 구석이 있단 말이다. 화분을 건네는 손이 덩치에 비해 살짝 작은 것도 진짜 무슨 큰 멍뭉이 같이 귀여웠다.

 

, 송민호.”

, 뭐요. 선물 마음에 안 들면 말로 해요. 사람 성의가 있지. 그리고 내 건 그것보다 크거든요!”

됐고. 왜 네 손은 몸에 비해서 좀 작은 편이야?”

?”

 

자신이 사온 다육이를 보고 좆만한 것이라고 표현해 놓고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는 진우였다. 굳어있던 표정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뭐라는 거야, 이 형이.

 

저기요, 김 형.”

진우 형.”

그래요, 진우 형. 아니 그건 용인 가서 울 엄마한테 물어봐요. 그리고 제 손이 모 오때서요?”

 

똑같은 화분을 들고 있는 자신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진우에 민호가 손을 뒤로 숨겨버렸다. 저번에는 몰랐는데 눈꼬리가 밑으로 쳐져 있다며 왜 무표정일 때도 눈꼬리가 이렇게 귀엽게 쳐졌냐며 버럭 화를 내지 않았던가. 하루는 밥 먹을 때 볼이 옴뇸뇸 귀엽다며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더니 민호도 아닌 진우가 화들짝 놀라서 5m는 후다닥 떨어졌다. 그러니 이번에는 손이 문제냐 싶은 거다.

 

이러다가 깨물어 버릴 것 같으니까 장갑이라도 껴.”

 

진우가 진심으로 이를 갈고 있어서 무서워진 민호였다.

 

뭐라고요?”

한 번만 더 손으로 어필하면 확 사귀자고 할 거야.”

 

벙 쪄버린 민호를 뒤로하고 진우는 중얼거리면서 테라스로 향했다. 둘이서 사는 거 너무 위험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 테이블에 화분을 내려놓는 손길이 퍽 조심스러웠다. 그 이후로 진우는 다육이에게 민호 몰래 미노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최소 하루에 한 번 인사를 건넸다.

 

미노야, 민호한테 나 보면서 눈웃음칠 거면 카톡이라도 미리 주고 웃으라고 해.”

미노야, 민호한테 오늘 귀여움이 치사량을 넘었으니까 내일은 작작하라고 해.”

미노야, 민호한테 오늘 얼굴 너무 못 봤으니까 내일은 좀 치대도 된다고 해.”

 

그리고 과다 입력을 당한 미노는 나날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부담 갖지 말라는 의미로 책상 위에 선인장을 올려놓듯이라는 관용구가 괜히 탄생한 것이 아니었는걸. 잊을 만할 때쯤 물을 주면 된다는 걸 몰랐던 진우는 사람이고 동물이고 식물이고 애정을 쏟으면 쏟을수록 좋다고 판단, 그만 난테크하는 것처럼 미노를 키워버렸던 것이다. 앓아누운 미노를 보고 진우도 울상이 됐다.

 

그 시각 민호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회사에서 작업 중이었다. ‘너 왜 집에 안 오니?’ 부르르 울리며 카톡이 왔다. 폰을 들어 올렸는데 오랜만에 뜨는 진우의 이름에 바짝 긴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오늘은 또 뭐라고 혼내려나. 매일매일 신박한 것들로 혼이 나던 터라 이젠 궁금해하는 저 자신이 웃겼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뚝 끊겼다. 뭐야, 이 형?

 

[진우형번호그만바꿔: 전화는 정중하게 사양할게 오전 1:33]

[그럼 이 시간에 왜 카톡 했는데요 오전 1:33]

[진우형번호그만바꿔: 지금 목소리가 별로 안 예뻐서 매력을 어필할 수 없어 오전 1:33]

[? 혹시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오전 1:34]

[진우형번호그만바꿔: 없지만 궁금해서ㅡㅡ 난 가끔 네가 집만 지키고 있었음 좋겠어 그 큰 멍뭉이같이 그런 거 있잖아 인절미같이 생긴 애 오전 1:35]

 

자신은 진심으로 걱정돼서 말하는데, 진우의 말들이 점점 장난처럼 느껴지는 민호였다. 처음 대뜸 귀엽다는 등의 말을 했을 땐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칭찬이니까 나쁘진 않았지. 그러다가 내 앞에서 눈웃음치지 마라, 끼 부리는 거 아니냐 그러지 마라 등의 말을 했을 땐 억울했다. 아무렇지 않게 사귀고 싶다는 말을 꺼내는 요즘 태도는 별로 기분 좋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놀리는 것 같단 말이다. 민호는 오늘은 꼭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읽씹하고 당장 집으로 향했다. 진우는 테라스에 앉아 사색에 빠진 듯했다. 민호가 그 옆자리에 앉을 때까지 돌아보지 못했던 걸 보면 말이다.

 

, 저랑 이야기 좀 해요.”

뭐야 내 카톡 읽씹한 애잖아?”

요즘 형 이상한 거 알죠.”

내가? 아닌데?”

진짜 저한테 왜 그래요? 막 아무 때나 사귀자고 덜컥 고백하고?”

그럼 안 되는 거야?”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들이면 저도 고맙게 생각이라도 해볼 것 같거든요.”

그런데 왜!”

여름부터 지금까지 거의 세 달 동안 그랬어요. 맨날 말로만 말로만. 귀여워해 주고 좋아해 주는 건 고마운데요, 저도 이쯤 되니까 짜증 난다고요.”

막 튀어나오는 걸 어떡해 그러면.”

그럼 참아요. 제가 봤을 때 형은 진심 아니에요. 저 놀리려고 그러는 거지.”

네가 나야? 뭘 안다고 진심이 아니래!”

 

발끈해서 일어난 진우의 허벅지에 걸려 테이블이 들썩였고, 그만 미노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언성이 살짝 높아지려고 했던 가운데, 화분이 와장창 깨지면서 정적이 흘렀다. 부동 상태가 된 진우는 얼굴이 하얘져서 그 광경을 눈에 담고 있을 뿐이었다. 민호 역시 놀랐는데 진우의 표정이 너무 좋지 못해서 일단 따지려던 것을 중단하기로 했다. 대신 치우려고 쪼그려 앉으려는데 진우가 빨랐다.

 

흐어엉, 미노야 미아내. 내가 너 결국 깨뜨리고 말았어. 소중하게 대해 줬어야 했는데 욱해서, 어떡해. 아프지. 내가 미아내.”

 

그 사과의 방향이 어디로 쏟아지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노야, 내가 너 진짜 엄청 좋아했는데 흐어엉, 그래서 맨날 너한테 표현하고 싶은 대로 다 말하고 사랑은 있는 그대로 다 주고 싶었는데 그러면 주체가 안 되니까 나도 참는다고 참았는데에!”

…… 지금 울어요?”

근데 그래도 네가 너무 좋아서 그러는 걸 어떡해. 흐어어어어엉.”

 

고백의 방향도 어디로 쏟아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왜 선인장 이름은 나랑 똑같이 지어 놔서 사람 헷갈리게 해.

 

이거, 네가 버리고 와.”

 

진정된 진우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봉투에 화분의 잔해를 넣어 민호의 손에 쥐여줬다. 감정까지 다 털어버리고 오라는 말처럼 느껴져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붙이면 되잖아요.”

못 붙여, 완전 산산조각 났잖아.”

 

입술이 떨어졌다가 알겠어요 한 마디만 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나서 받은 카톡에선 관심 가는 행동을 자제해 달라니. 결국 버리지 못한 깨진 화분을 거실에 늘어놓고 접착제를 찾았다.

 

형 자요?”

……자거든!”

자면서 어떻게 말해요. 잠꼬댄가.”

그런가 보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까 관심 꺼줬음 좋겠어.”

미노는 어딨어요?”

……내 눈앞에 있잖아.”

민호 말고 미노요.”

 

시름시름 앓고 있는 미노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워 보여서 민호도 손길이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래도 자신이 준 선물을 이토록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눈앞에서 보니까 괜히 쑥스러웠다. 말없이 미노를 옮겨 심는 커다란 등짝을 아닌 척 이불 사이로 쳐다보고 있던 진우였다.

 

뭐 하는데에

미노 집 재건축했어요. 짜잔.”

이게 모야.”

 

접착제로 붙인 티가 나서 볼품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진우는 몇 백 년 만에 발견된 청자와 바꾸자고 해도 (과장 많이 더해서) 절대 바꾸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침대 밑에 무릎을 꿇고 팔을 괴고 쳐다보는 민호의 얼굴도 너무 다정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버린 진우였다. 계속 보고 있다간 진짜 뽀뽀라도 해버릴 것 같았거든.

 

뭐예요. 이것도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도대체 뭘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건데.”

알겠어, 고마워! 근데 이것 좀 놔, 진짜 힘만 더럽게 세!”

얼굴 좀 보고 얘기하죠, ?”

 

이불을 두고 난데없는 힘겨루기 중이었다. 그 바람에 민호의 몸이 반쯤 침대 위로 올라왔고, 진우는 진심으로 식겁하기 시작했다.

 

있잖아, 침대 위로는 올라오지 마!”

, 제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서요? 제가 형이에요?”

맞아내가 무슨 짓 할지 몰라서야.”

 

정적이 흘렀다. 마침 말 나온 김에 확실히 할 것이 남았다. 민호가 침대 위에 아예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진우가 최대한 구석으로 멀어졌다.

 

, 뭔데?!”

, 제가 좋아요?”

응 아니!”

제가 왜 좋아요? 언제부터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좋아진걸! 아니 안 좋아하는데?”

근데 왜 앞으로 관심 가는 행동 자제해 달라고 하는 건데요?”

아이씨, 그건좋으니까 그러지!”

그럼 그냥 그렇다고 말하면 되는 거잖아요. 대신 진심으로 대해줘요. 장난하지 말고.”

난 계속 장난 아니었다구!”

그리고 화 좀 그만 내요. 그러다가 형 진짜 빵 터져버릴 것 같아서 무서워.”

알게써나 그럼 진짜 진심으로 마음 가는 대로 한다아?”

제대로 받아줄 테니까, 제대로 귀여워해 줘봐요. 혹시 알아 홀라당 넘어갈지?”

 

아님 이미 넘어갔을 수도 있고.

 

?”

 

덥석 내밀어지는 손바닥에 자동 반사로 주먹 쥔 손을 올려놓은 민호였다. 뭐하는 거지?

 

?”

 

이어 자신의 턱을 간지럽히는 진우의 하얀 손가락이 느껴졌다. 뭐지 지금?

 

뽀뽀!”

???”

 

입술을 내미는 말간 얼굴을 보며 민호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혹시 나를 무슨 집에서 키우는 커다란 개처럼 생각하는 건가? 생각에 빠진 민호의 뺨을 잡고 진우가 말했다.

 

민호 너, 나랑 볼에 뽀뽀했어, 안 했어?”

, 했죠.”

너 나한테 이마랑 목에도 뽀뽀했어, 안 했어?”

했죠, 아마?”

둘이서 합쳐서 여덟 번 뽀뽀했어, 안 했어?”

그거야, 했죠

그럼 입술에 뽀뽀 한 번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안 어려워?”

그러니까 그게.”

한 번인데? 카메라 앞에서 여덟 번도 한 사인데!”

, 그렇죠?”

그치?”

 

왠지 말도 안 되게 허술한 이 수작들에 넘어가버린 송민호 씨였다. 아니 근데 갑자기 너무 진도 점프하는 거 아니에요? 그의 항변은 묵살 당했다.

 

 

 

오늘 제대로 온라인 집들이해줄게!”

 

[우와 진우 오빠 방 너무 예뻐요]

[침대 맡에 저 스티커들은 뭐예요?]

[헐 오레베죠 그림 진짜 최고된다]

 

테라스는 더 장난 아니에요. 짜잔. 여기 앉아서 민호랑 이야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러는 곳.”

 

[오빠 선인장도 키워요?]

[진우 화분 상태 왜 그래?]

[무슨 선인장이에요? 나도 키울래~~]

 

, 화분 깨졌어. 흐흐흐. , 이거 솔직하게 말해도 되게찡? 채플이니까. 그건 민호랑 조금 이런저런 할 얘기가 있어서 말하다가 조금 격해져서 내가 실수로 테이블 쳤는데 괜찮아요. 민호가 바로 다시 붙여줬엉.”

 

[테이블도 좀 덜컹 한 것 같은데 그것도 그때 고장 난 거야?]

 

아니이

[뭔데뭔데]

 

퍽 수줍은 고백이었다. 그래도 민호가 늘 솔직하고 진심으로 하자고 했으니까.

 

아니, 그건화해하다가.”

 

 

 

그 시각 작업실에 있던 민호는 진우가 채플을 시작했다는 소리를 듣고 잠깐 켜봤다가 그만 식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니저 형 부를 시간도 없었다. 대충 짐을 챙겨서 눈썹 휘날리게 택시를 잡고 집을 향해 달려가는 내내 민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만 부여잡을 뿐이었다.

 

아오, 진짜 진우 형!!! 그걸 방송에서 말하면 어떡해!”



Written By. Norah (Twitter Account : @by_nor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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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선물 (Written by. Jody)
2017. 11. 26. 21:17

최고의 선물



w. Jody



또 왔어, .

 

진우는 창 너머를 흘끔거렸다. 바깥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가 서 있었다. 전시관 유리에 코가 짓눌리다시피 얼굴을 갖다 댄 채. 저렇게 유리에 자국 내면 안 될텐데. 진우는 바구니에 가득 담아 온 먹이를 펭귄들에게 차례대로 던지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언제부턴가 주기적으로 제 일터를 찾아오기 시작한 남자애. 처음엔 단지 수족관을 좋아해서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거라고 추측했다. 진우를 향한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기 전까지.

 

* 

 

 

분명 자율이라고 했다. 이번 견학은 고 3이 되기 전 학교에서 마지막으로 허락한 일탈이었고, 우리가 가고 싶은 곳으로 견학 장소를 고르겠다는 담임의 말에 2학년 6반은 삽시간에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반 아이들은 입이라도 맞춘 듯 놀이공원을 외쳤다. 누가 보면 살면서 단 한 번도 그 곳을 가보지 않은 사람들처럼. 정작 담임은 모두가 가고 싶어했던 놀이공원은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아버렸지만 말이다! 애원을 해도 놀이공원만은 안 된다는 담임의 확고한 의지에 6반엔 절망스런 탄식이 가득 찼다. “, 선생님 제발요!” 그 중 제일 실망한 건 송민호였다.

 

학교에서도 놀이공원은 안 된다고 했으니까 그런 줄 알고. 반장, 네가 책임지고 후보 정하고 투표해서 결과 가지고 교무실로 와라.”

 

그렇게 2학년 6반 견학 장소는 아쿠아리움으로 결정됐다. 담임에게 보고하고 오겠다고 교실은 나서는 승윤을 보며 민호는 이를 갈았다. 근데 아까 이럴 바엔 그냥 경복궁 가자고 한 새끼 누구야. 칠판에 후보들 중 하나로 경복궁이 쓰여질 땐, 차라리 제 눈을 찌르고 싶었다. 되지도 않는 후보들이 다 지워진 칠판 위엔 하얀색으로 쓰인 아쿠아리움이라는 글자만 남아있었다. 발도 디디기 싫은 후보들 사이에서, 모두들 우는 심정으로 차악을 선택한 결과였다.

 

 

이렇게 하나도 안 신나는 외출이라니. 민호는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우울했다. , 존나 가기 싫다. 내가 생선들 봐서 뭐 하냐고... 게다가 집에서 아쿠아리움까진 한 시간이나 걸렸다. 지하철 역 앞에서 만난 승윤의 표정도 그리 밝진 않았다. 출근 시간대를 지난 것이 무색하게도 역 안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많은 인파에 없던 흥도 더 떨어질 정도였다. 좁은 지하철 칸에서 사람들 사이에 꽉 끼여버린 민호가 우울하게 웅얼거렸다. 이거 누구 좋자고 가는 견학이냐? 강승윤 넌 반장이니까 알 거 아냐.

 

아마 담임 아닐까.”

존나 최악이다.”

끝나고 우리끼리 롯데월드나 가자. 애들 다 후다닥 보고 나와서 그 쪽으로 빠진다고 했어.”

 

자리가 나도 앉을 타이밍을 놓쳐 한 시간을 꼬박 서서 아쿠아리움에 도착했다. 아니 다를까, 그곳은 한 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세상 재미가 없었다. 놀랍도록 재미가 없다는 점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였다. 의욕이 없는 건 반 애들 다 마찬가지였다. 몇 명만 눈을 반짝거리며 구경할 뿐 대부분은 구경을 하는 건지, 출구를 찾는 건지 모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안을 돌아다녔다. 민호도 다르지 않았다. 해저 터널을 지날 땐 잠깐 와, 하며 신났었다. 그마저도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가신 게 함정이지만.

 

민호의 옆에 감흥 없이 대충 수족관 안을 관람하던 승윤이 별안간 와씨, 펭귄이다!” 하며 어디론가 뛰었다. 다소 방정맞게 뛰는 승윤에 민호는 혀를 찼다. 애도 아니고 펭귄이 뭐가 좋다고. 도착한 펭귄 전시관 앞에는 승윤 말고도 반 애들이 꽤 구경을 하고 있었다. 유리벽을 짚고서 찰싹 달라붙어 있던 승윤은 물속에서 펭귄이 헤엄치는 대로 몸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옆에서 민호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뒷짐을 진 채 물속을 구경했다.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흔하게 보여주는, 제가 익숙하게 아는 수족관 풍경이었다.


지금 펭귄 친구들이 먹고 있는 생선은 열빙어입니다. 우리 펭귄 친구들이 아주 좋아하죠!”

 

어디선가 높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족관 안에서 마이크를 타고 울리는 소리였다. 그 안에선 한 남자가 간간이 허리춤에 찬 마이크를 들어 펭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바구니에서 생선을 꺼내 펭귄들에게 던져주면서. 유리 너머를 향해 환하게 웃으면서 마이크에 대고 뭐라 뭐라 떠드는 남자의 볼에 보조개가 패였다. 솔직히 미쳤다고 생각했다.

 

미쳤어...”

뭐가?”

 

승윤은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민호에게 물었다. 귀여운 사람이 귀여운 애들한테 밥을 주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정상이야? 6반 남자애들이 득실거리는 아쿠아리움에서 저 안에 있는 아쿠아리스트만 유일하게 반짝거렸다. 그 남자는 자기 앞에 떼를 지어 몰려있는 펭귄들을 보면서도 다정하게 웃었다. 남자의 입꼬리가 오르내릴 때마다 민호의 심장도 함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도 모르고.

우리 펭귄 친구들이 이제 식사를 마쳐가네요! 마지막까지 우리 친구들이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 즐겁게 관람하시길 바랍니다.”

이내 바구니를 탈탈 털어 마지막 남은 생선까지 펭귄들에게 다 먹인 진우는 창 너머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신을 향해 격하게 손인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진우는 웃음이 터졌다. 오늘 고등학교 견학 온다더니 쟤네들인가 보네. 진우의 손짓에 민호는 심란해졌다. 이상하다. 손은 저 형이 흔드는데 왜 내 심장이 같이 흔들리지.

 

.” 옆에서 진우를 따라 손을 방방 흔드는 승윤을 민호가 불렀다.

?”

나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것 같다.”

? 펭귄이랑? 미친놈 아냐, 이거?!”

정신 나간 놈처럼 자길 쳐다보는 승윤에도 민호는 방금 본 그 아쿠아리스트 생각뿐이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그 뒤로 민호는 밥 먹듯 아쿠아리움에 발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자신의 사랑에 유일한 방해물이 있다면, 그건 입장료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었다. 일주일에 삼만 원 밖에 안 되는 쥐꼬리만 한 용돈을 모아 이 주에 한 번 그 형을 보러 가기 시작하면서, 민호의 빈곤한 생활 역시 함께 시작됐다. 긴축 정책에도 감당하지 못 하는 자금난에 민호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돈 나올 구실이라곤 부모님 주머니밖에 없는 가난한 학생인 게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용돈을 올려 달라는 무언의 시위에 황당한 건 민호의 엄마와 아빠였다. 그러나 민호는 사랑의 힘으로 극복 못 할 것이 없었다. 이유도 모른 채로 시작된 민호의 되지도 않는 억지에 결국 두손 두발을 든 건 부모님이었다. 이만 원을 더 올려주겠다고 엄마의 선포를 끝으로, 이제 일주일에 한 번씩 아쿠아리움을 찾아갈 수 있다는 기쁨에 민호는 집 안 곳곳을 날뛰었다. “저거 완전 또라이네.” 뒤에선 두 살 어린 여동생이 민호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관자놀이 옆을 검지 손가락으로 빙빙 돌렸다.

 

 

송민호, 오늘 학교 끝나고 피시방 고?”

안 돼. 나 돈 아껴서 형 보러 가야 해. 이번 주에 돈 너무 많이 썼어.”

이 애처로운 미친놈아... 너 그 형 이름은 아냐?”

좋아하는데 꼭 이름을 알아야 돼? 물론 궁금하긴 하지만...”

 

이름도 모르는 형에게 빠져 제정신이 아닌 민호를 승윤은 못 볼 걸 봤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민호의 손에는 초코 소라빵이 들려있었다. 저것도 승윤이 사준 거였다. 승윤은 이제 볼이 미어터지게 빵을 우물우물 씹는 민호가 짠하기까지 했다. 눈물 없이 못 봐주겠네, 진짜.

 

내가 두 시간 정도는 네 피시방 비용 대줄 수 있으니까 같이 가자고, 존나 어이없는 새끼야.”

진짜?!”

 

반색하는 민호의 눈은 초롱초롱하다 못해 울기 직전이었다. “나 사실 피시방 되게 가고 싶었던 거 알지?” 치대는 민호를 뿌리친 승윤이 기분 나쁘다며 어깨를 툭툭 털고 몸을 떨었다.

 

 

 

*

 

 

 

아무래도 내 스케줄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진우는 오늘도 어김없이 자기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고등학생 남자애 때문에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렸다.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얼굴도 외웠다. 물론 이름까지. 자꾸만 자기를 관찰하는 시선이 기분 나빠 하루는 똑같이 그 남자애를 쳐다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알았다. 저 애가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걸. 얼굴이 빨개지며 진우는 그 애 얼굴에서 피가 나는 줄 알았다황급히 고개를 돌리는데 솔직히 모를 수가 없었다. 황당한 마음에 가슴팍에 떡하니 붙어있는 명찰을 확인했다. 송민호라는 그 고등학생은 진우가 다시 할 일을 시작하자, 아닌 척 또 곁눈질을 했다. 그걸 보고 확신이 들었다. 저렇게 어설퍼서야. 너 나 보고 있는 거 다 보이거든. 민호의 시선에 정신이 팔려 있던 진우가 손에서 갑자기 따끔한 통증이 일어 화들짝 놀랐다. “아야!” 황급히 펭귄 부리에서 빼낸 손가락 살폈다.

 

내가 아무리 정신을 팔고 있어도 그렇지이, 내 손가락은 먹는 게 아니란 말이야.”

 

살짝 물린거라 다치진 않았지만 놀란 마음에 손가락을 쓸어내렸다. 난감하네, 진짜. 눈에서 하트를 뿅뿅 내뿜으며 자기를 보는 민호도, 그 눈길이 계속 신경 쓰이는 자신도 모두 난감했다. 하다 못해 이제는 좀 귀엽게 느껴지잖아. 귀엽게 생긴 애가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안 좋을 이유가 없었다. 근데 쟤 고등학생인데. 유리창을 투과해 쏟아지는 민호의 타오르는 눈빛에 진우의 입에선 한숨이 절로 나왔다.

 

 

5교시부터 수업에 집중하지 못 한 민호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친 듯이 뛰어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일주일을 꾹 참고 드디어 그 형을 보러 가는 날이었다. 아저씨, 제발 좀 빨리 달려요! 급한 마음에 기관사는 꿈에도 모를 애원까지 하면서 잠실역에서 내린 민호는 허겁지겁 건물로 들어갔다. 입장료를 계산할 땐 만 원 밖에 남지 않은 제 용돈 생각에 손이 조금 떨렸다. 괜찮아. 만 원으로 사흘 버틸 수 있어. 이제는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전시관으로 성큼 걸었다. 하도 많이 알짱거려서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요즘 제 삶의 가장 큰 낙인 펭귄존에 다다른 민호는 그만 당황해 얼어붙고 말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제가 상상한 것과는 다른 광경에 민호는 머릿속으로 요일을 계산했다. 요일도 정확했다. 이상하다, 오늘 제대로 찾아 온 게 맞는데...

 

없어...”

 

펭귄 밥 주는 시간을 놓칠까봐 부랴부랴 뛰어왔는데, 아직도 나타나지 않은 진우 때문에 민호는 망연자실해졌다. 스케줄이 바뀐 건가? 아님 오늘 출근 안 했나? 혹시... 일 그만둔 거 아냐?! “저기요.” 누군가 민호를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민호는 온갖 망상에 빠진 상태였다.

 

저기, 송민호?”

 

이번엔 누군가가 민호를 쿡 찔렀다. 그 느낌에 민호는 뒤를 돌아보고 또다시 얼음이 되고 말았다. 아니, 저기 계셔야 할 분이 어째서 내 앞에...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놀란 민호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너 나 기다리는 거 아니야?”

, 근데, , 어떻게...” 놀란 민호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뗐다.

어떻게 알았냐구?”

 

너 같음 맨날 일터에 와서 나만 쳐다보는데 모르겠니. 나가자. 내가 밥 사줄게. 민호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뒤돌아 출구로 걸어가는 진우를 얼결에 민호가 따라 나섰다. 혹시 꿈일까봐 자기 뺨을 세게 때려가면서. 손바닥과 볼이 부딪히며 내는 파열음에 앞서 걷던 진우가 돌아보자, 민호가 황급히 손을 등 뒤로 숨기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위로 끌어올렸다. 때린 볼이 얼얼했다.

 

 

그제서야 민호는 제 앞에 앉아있는 이 형의 이름이 김진우임을 알았다. 나는 김진우야. 파스타 면을 돌돌 말며 무심하게 제 이름을 알려주는 진우에 민호는 그동안 재미도 없는 수족관에 드나들며 얼굴 도장을 찍던 제 지난 노력들이 생각나 하마터면 울 뻔했다. 승윤 앞에선 이름 따위 몰라도 된다고 허세를 부렸어도, 사실 누구보다 간절하게 궁금했던 이름이었다.

 

내 이름 몰랐어?”

 

난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요즘엔 사이트 들어가면 다 나와. 난 네가 찾아봤을 줄 알았어. 먹고 있던 파스타가 느끼한지 피클을 집으며 말하는 진우의 말에 민호가 ...” 하며 탄식만 내뱉었다. 바보같이 사이트를 들어가 볼 생각은 못 했네.

 

저는 송민호예요.”

알아, 나도.”

어떻게 알아요?!”

아까 내가 네 이름 불렀잖아.”

 

그리고 네 명찰 보고 알았어. 진우가 손가락으로 명찰을 가리켰다. 민호는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진우를 좋아하기만 했지, 진우와 말을 해본다거나 함께 밥을 먹는 건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서. 심지어 진우가 식사를 마치고 민호에게 스무디를 사줄 때 민호는 잠깐 돌아서서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말도 안 돼. 이건 꿈일거야.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컵을 꼭 붙든 채 멍 때리고 있는 민호를 진우가 부르기 전까지도 민호는 제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너 왜 그래?”

이거 꿈 아니죠?”

 

잠깐 정신이 나가 보이던 민호가 대뜸 꿈이 아니냐고 묻는 소리에 진우는 웃음이 터졌다. 귀엽네, . 나 고등학교 다닐 때도 이랬나? “꿈 아니니까 얼른 먹기나 해.” 민호 입에 친히 빨대를 물려주고 나서야 민호가 새콤한 스무디를 먹기 시작했다. 빨대를 빠느라 볼이 움푹 들어가는 게 귀여웠다. 몇 번을 들이키던 민호는 스무디 컵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일하는 곳에 가서 맨날 훔쳐봐서 기분 나쁠 만도 한데, 진우는 민호에게 그 얘기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혼내기는커녕 맛있는 밥도 사주고 심지어 스무디까지! 제 앞에서 같이 음료를 마시고 있는 진우를 보자 마음이 부풀었다. 아무래도 진우 형은 천사가 아닐까. 진우의 마음이 예뻤고 얼굴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태어나서 본 사람들 중에 최고였으니까또 귀한 시간을 내 저와 함께 있어주는 진우에게 황송한 마음까지 들었다. 나도 형한테 뭐라도 해주고 싶어! 민호는 당장 진우를 위해 뭐라도 해주지 못 해 맘이 달았다.

 

! 그럼 다음에 제가 영화 보여드릴게요!”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민호의 얼굴엔 무슨 일이 있어도 제게 꼭 보여주고 말겠다는 결의까지 느껴졌다. 나보고 지금 벼룩에 간을 빼먹으라고? 어이가 없었다. 고딩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러나 진우는 거절하는 대신 민호에게 핸드폰을 달라고 말했다. 영문을 모르는 민호가 홀린 듯 폰을 내밀었다. 민호의 폰을 받아든 진우가 자신의 연락처를 입력했다.

 

그냥 보고 싶은 영화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 내 번호 저장 했으니까.”

 

핸드폰을 받아 든 민호는 핸드폰에 입력된 열한 자리 번호를 한 번, 진우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폰을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민호에 진우는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좋은가. 진우와 다르게 민호는 속으로 오열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 침대에 누운 민호가 핸드폰 화면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입술이 절로 씰룩거렸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 안에서 카톡 친구 목록에 띈 진우를 봤을 땐 핸드폰을 끌어안기까지 했다. 단정하게 내린 앞머리를 한 채로 브이를 하고 찍은 진우의 셀카. 민호가 자기도 모르게 그 사진을 보며 앓는 소리를 내자, 옆에 앉은 사람이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정작 민호는 진우의 사진을 보는데 혈안이 되어 그 사실을 몰랐지만. 세상에... 여기 진우 형 번호가 있어. 진짜 말도 안 돼. 진우와 함께 있던 시간이 비현실적이라 민호는 제 볼을 꼬집었었다. 살이 눌리는 압력에 볼이 아팠다. 진짜로 꿈이 아니구나. 볼을 벅벅 문지른 민호가 핸드폰을 품고 침대 위를 이리저리 뒹굴었다. 심지어 진우 형이 연락하라고 했어! 카톡에 들어간 민호가 진우를 찾아 대화를 걸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이라는 전제는 새까맣게 까먹은 채.

[형 저 진짜 연락해도 돼요?]

 

메시지를 보내고도 한참을 진우가 읽었다는 숫자 1 표시가 사라지지 않아 조마조마했다. 형 지금 씻는 건가? 아님 잠들었나? 혹시... 나 차단한 거 아냐?! 내가 오늘 뭘 잘못했지 싶어 머리를 쥐어뜯으며 좌절하고 있는 사이 웅, 소리와 함께 매트리스를 타고 약한 진동이 일었다. 민호는 평생 그렇게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본 적 없을 정도로 몸을 번쩍 일으켜 앉았다. ‘이미 연락 했잖아;;’ 돌아온 건 세상 시크함은 다 두른 대답이었다.

[? 제가 언제요?]

[지금 하고 있는 건 연락이 아냐?]

그치, 이것도 연락이기는 한데... 뭔가 퉁명스러운 진우의 말투에 어딘지 모르게 상처받고 말았다. 아까는 그래도 이렇게까지 차갑지는 않았는데, 역시 내가 귀찮은건가. 괜히 진우를 피곤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민호는 시무룩해져 답장을 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 같아도 고등학생, 그것도 남자애가 연락한다고 그러면 좀 성가실 것 같기는 해.

 

[뭐 보고 싶은 거 있어?]

 

몇 분이 지나도 민호의 대답이 없자, 이번엔 진우가 조금 당황했다. 내가 너무 까칠하게 말했나. 놀리는 게 재밌어서 쏴붙이듯 말한 건데 아무래도 민호가 기가 죽은 것 같았다. 이래서 어린 애들은 피곤하다는 생각과 다르게 진우의 엄지손가락이 키패드 위를 유영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냐는 질문에 잠깐만요!’ 라고 답을 보낸 민호가 다시 잠잠해졌다. 영화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장 뒤에 붙은 느낌표가 어쩐지 신이 난 것처럼 느껴졌다.

 

진우의 예상대로 풀이 죽어 있던 민호는 진우의 카톡을 보자마자 금세 화색이 되찾고 영화관 어플을 뒤지고 있었다. 뭘 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같이 보는 상대가 진우 형이라는 게 중요할 뿐. 민호는 러닝 타임이 제일 긴 영화를 찾았다. 또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라, 최대한 오랜 시간 동안 진우와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유에서였다. 때마침 러닝 타임이 거의 세 시간에 육박하는 영화가 극장에 개봉한 참이었다. 마치 이걸 봐달라는 듯이 타이밍마저 환상적이었다. 온 세상이 제 사랑을 돕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인터스텔라요!]

[그래 그럼 내일 괜찮아?]

[저 아무 때나 다 돼요! 시간 상관 없어요 조조도 되고 심야도 되고 다 괜찮아요ㅜㅜ]

[그럼 시간 알아보고 연락할게]

시간을 알아보고 연락을 주겠다던 진우에게 정말 몇 분 뒤에 다시 연락이 왔다. ‘내일 435분 꺼 괜찮지?’ 무조건 좋다는 말에 진우는 그럼 내일 보자는 인사와 함께 대화를 끊었다. 내일 보자. 민호는 그 네 글자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아싸! 내일도 만난다!”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 하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방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방에서 쿵쾅거리는 소리에 기어이 민호의 엄마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여기가 운동장이야? 뛸 거면 나가서 뛰어!”

 

엄마의 불호령에도 민호는 마냥 신이 나 어쩔 줄 몰랐다. “그럼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부리나케 겉옷을 걸치고 나가는 민호에,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동생이 한심하다는 듯 민호가 나간 문을 흘겼다. 제 오빠지만 저럴 때 보면 한심해서 아는 척도 하기 싫었다.

 

*

 

 

 

송민호라는 남자애가 오면 그냥 들여보내 주실 수 있나요. 제 이름을 말할 거예요. 입장료는 제가 낼게요.”

일터가 아닌 밖에서도 따로 만나기 시작한 민호는 여전히 아쿠아리움에 진우를 찾아왔다. 학생이라 입장료도 만만치 않을텐데... 도대체 돈은 어디서 나길래 자주 찾아오냐는 제 물음에 민호는 씩 웃었다. 형 만나러 올 정도는 있어요.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민호는 냠냠,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집중했지만 진우는 계속 마음이 쓰였다. 말은 안 해도 부담이 클 게 뻔했다. 진짜 벼룩의 간을 빼 먹고 말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지난 번엔 이제부터 아쿠아리움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민호에게 말했다가 제대로 사달이 났다. 진우는 평생 그런 곤혹은 처음이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요?’

 

자리에서 우뚝 서서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구며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차라리 알려달라고 사정하던 민호. 진우는 여태껏 남자애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순간 민호를 울린 제가 진짜 나쁜 놈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교복 소매로 눈을 벅벅 닦으며 어깨를 들썩거리는 민호 때문에, 진우는 민호가 제 의도를 파악하지 못 하고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게, 흐윽, 아니면 뭔데요!’

엉엉, 소리를 내며 하도 서럽게 우는 바람에 길 한복판에서 덩치 큰 남자애를 끌어안고 달래느라 죽는 줄 알았다. 필연적인 쪽팔림은 덤이었다그 뒤로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는 말은 민호와 진우 사이에서 금기어였다. 세상 다 무너진 얼굴을 하고 그것만은 안 된다는 애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해.

 

사촌 동생이랑 많이 친한가봐요? 난 사촌들이랑 잘 지내는 사람들 좀 부럽더라. 우린 다 데면데면해서.”

 

민호를 제 사촌 동생이라고 거짓말한 진우는 입장료는 됐다는 말에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기쁜 소식을 민호에게 알려주기 위해 진우는 사무실에서 빠져나와 비상구로 가 계단에 걸터앉았다. 민호가 수업을 듣고 있을 시간이라 지금 문자를 보내도 되나 망설여졌지만, 사실은 제가 빨리 전해주지 못해 마음이 달았다. 짧은 문자를 보내고 확인한 시계는 어느새 개장 시간이 15분밖에 남지 않았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우가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일해야지. 민호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재밌는 곳도 많이 데려가려면.

 

 

 

죽을 것 같던 1교시 화학수업이 끝나자 민호는 책상 위로 크게 엎어졌다. 누가 1교시부터 화학을 넣어둔 거야. 옆에서 1교시 내내 졸지 못해 함께 괴로워하던 승윤은 화장실을 가고 없었다. , 형 보고 싶다. 책상에 엎어진 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 민호가 사진첩에서 진우의 사진을 보기 위해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제 매표소에서 내 이름 얘기하면 그냥 들여보내 줄 거야. 내가 부탁해 놨으니까 부담 없이 와. 수업 잘 듣구.]

 

알림창에 떠 있는 배려심 가득한 문자. 민호는 마음이 부풀다 못해 이대로 터질 것 같았다. 어떡해. 나 진짜 진우 형 사랑하는 것 같아. 민호는 그 문장들을 거의 외울 기세로 계속 읽었다. 모든 글자가 다 지워지고, 세상에 그 문장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돌이켜 보면 언제나 자기를 생각해주는 건 진우였다. 자꾸 조르면 짜증이 날 법한데 군말 없이 자신을 만나줬고, 또 연락 한 번 거른 적 없었다. 민호는 당장이라도 진우에게 달려가 말하고 싶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져버려서, 말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형을 좋아한다고. 내가 비록 지금은 어리지만 나를 조금만 기다려줬으면 좋겠다고. 얼른 자라고 싶을 만큼 내가 형을 너무 좋아한다고. 아니,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도저히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어떻게 고백해야 형이 받아줄까. 정신이 자꾸만 달아나는 게 옆에서도 느껴졌는지 정신 좀 차리라면서 승윤이 민호의 등을 세게 내리쳤다. 여섯 번째로 등짝을 후려치는 손길에, 민호는 그때서야 어느덧 점심 시간이 됐음을 알았다.

 

급식당에서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민호가 이상했던 승윤은 민호에게 뭔 일이 있음을 확신했다. 보나마나 이유는 하나였다.

 

, 송민호. 형이 뭐라고 했어? 이번엔 헤어지재?”

사귄 적도 없는데 뭘 헤어져...”

아니 지금 당신들이 하고 있는 게 연애가 아님 뭔데요. 그 동안 완전 데이트였잖아.”

그래서 고백하려고.”

?!”

 

놀리듯 한 말이었지만, 진짜 민호가 고백을 하겠다고 나올 줄 몰랐던 승윤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저 대책 없이 용감한 새끼. 그러거나 말거나 민호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교실로 돌아와선 본격적으로 민호와 승윤이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고백해야 진우 형이 송민호의 마음을 받아줄 것인가에 대한 토론을 시작됐다. 주로 의견을 내는 건 민호였고, 그 의견을 대차게 까는 건 승윤이었다.

 

그럼 양초로 하트를 만드는 건,”

완전 유치해서 하트를 만들 바엔 그냥 나가 죽는 건 어떨까 싶다.”

미친놈아 나 진지하다고!”

나도 진지하게 말리는 거라고 생각은 안 하냐, 이 개새끼야.”

“... 그럼 레스토랑 같은데 가서 음식 안에 반지를,”

돈도 없어서 나한테 빌붙어 사는 새끼가 허세만 잔뜩 들어가지고. 진우 형이 너 돈 조금이라도 쓰면 질색한다며. 그런 사람이 레스토랑 가면 자기가 계산하지 너보고 하라고 하겠어? 근데 그것도 웃기겠다. 고백은 네가 하는데 계산은 형이 하는 거.”

옳은 말 좀 그만 할래? 존나 옳은말쟁이 새끼.”

그리고 반지 들어있는 밥 먹다가 그거 삼켜서 앰뷸런스 오고 아주 신명나고 좋겠네. 나 구경하러 가도 되냐?”

아씨, 그럼 어떻게 해. 참신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고백을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상상력이 빈약한 애였나. 자괴감에 빠져가는 민호를 옆에서 지켜보던 승윤이 혀를 끌끌 찼다. 진짜 어렵네. 민호가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괴롭다는 듯 성대는 긁으며 괴음을 냈다. 미칠 노릇이었다.

 

네가 굳이 어려운 길로 가잖아. 거창하게 뭘 할 생각을 말고 네 진심을 보여주라고.”

 

 

 

며칠을 밤낮으로 고민한 끝에 민호의 손에 들린 건 인형 두 개였다. 한 손엔 진우를 닮은 토끼와 진우 형이 토끼를 닮지 않았냐고 진지하게 묻는 민호 때문에 승윤은 어이가 없어 코웃음 쳤다한 손엔 펭귄 인형을 쥐고 민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근사하고 멋있는 고백을 하고 싶었는데 결국 인형이네. 토끼 인형을 살짝 흔들자 토끼 귀가 따라 흔들렸다. 포장을 하기도 애매한 물건이라, 포장 대신 인형 목에 빨간 리본을 다는 걸로 만족해야 한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내 고백 이대로 괜찮을까. 커다란 쇼핑백에 인형들을 넣으면서도 민호는 습관적으로 계속 한숨이 나왔다. 이번엔 쇼핑백 밖으로 토끼 귀가 축 처져 있었다.

 

쇼핑백을 들고 터덜터덜 진우의 일터로 향했다. 아쿠아리움 앞에 도착하자, 민호는 온갖 감정에 사로잡혔다. 진우에게 고백을 할 생각에 가슴이 떨리기도 하고, 제 고백이 거절 당할까봐 두려운 마음이 들어, 민호는 차마 들어가지 못 하고 입구 앞에서만 서성거리다 결국 입구 근처에 쪼그려 앉았다. 옆에 내려놓은 쇼핑백에선 뛰다가 튀어 나온 건지 토끼 귀가 삐져 나와 있었다. 민호는 귀를 신경질적으로 쇼핑백 안으로 집어 넣었다. 그래, 이런 인형을 받고 형이 좋아할 리가 없어. 고백은 나중에 하고 오늘은 그냥 선물만 주자.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고백은...

 

송민호? 너 왜 거기 있어?”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쪼그려 앉아 있던 민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멋대로 떠다니는 상념에 정신을 놓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는지, 퇴근한 진우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앞에 서서 민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민호는 진우의 얼굴을 보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오면 연락을 하지 왜 안 했어.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저도 방금 왔어요. 형 벌써 끝났어요? 일단 좀 걸을까요?”

 

저녁은 먹었어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 민호가 걱정된 진우는 민호의 옆에 바짝 붙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지 민호는 오늘따라 유난히 기운이 없어 보였다. 왜 그래.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제 질문에 민호는 별 일 없으니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고 씩씩하게 말했다. 별 일 없는 게 아닌데. 잔뜩 기가 죽어 있잖아.

 

정말 학교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듯 하루 일과를 읊던 민호가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건물 밖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다 싶을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공원에서 우뚝 멈춰 선 민호를 따라 진우 역시 멈춰 섰다.

 

!”

 

박력 있게 진우를 부르던 기세와는 다르게 민호는 자꾸만 우물쭈물 거렸다. 무슨 일 있는 거 맞네. 진우는 민호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무슨 이윤지 계속 안절부절 못 하던 민호가 갑자기 진우의 앞으로 커다란 쇼핑백을 들이밀었다. 나 주는거야?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무슨 선물이야?”

, 형이 좋아서 샀어요!”

, 씨발 망했다! 귀여워서 샀다고 말한다는 게 형이 좋아서 샀다고 쓸데없이 솔직하게 말하고 말았다. 헛나온 진심에 민호는 추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온몸에서 땀이 나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형이 좋다고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돌리고 싶었다. 많이 바라지도 않고 딱 몇 초 전으로. 망했어, 진짜! 민호가 속으로 자책하며 오열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진우는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제 손에 딸려 나온 건 인형이었다. 목에 빨간 리본도 예쁘게 단. 두 손에 들린 토끼와 펭귄 인형들을 번갈아 보던 진우가 난데없이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 허리까지 숙여가며 웃음을 멈추지 못 하는 진우 때문에 민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거 봐. 내가 웃음만 살 것 같았어. 이래서 나중에 고백하려고 한 건데! 이미 형에게 줄 인형을 샀다고 했을 때 승윤에게 엄청난 비웃음과 괄시를 받은 터였다. 그래도 내 용돈에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었단 말이다. 앞에서 웃음을 그치지 못 하는 진우를 보며 민호는 울고 싶었다. 한참을 인형을 꼭 붙잡고 웃던 진우가 진정이 되기 시작했는지 팔을 들어 소매로 눈가를 찍었다.

 

... 민호야?” 인형을 끌어안은 진우가 민호를 불렀다.

, ?”

나 이거 지금 고백하는 거라고 생각해도 돼?”

 

진우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 하던 민호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 이젠 나도 모르겠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저 열... 여덟 살이요.”

형이 미성년자는 조금 무서운데.”

미성년자는 무섭다는 진우의 말에 민호의 고개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 이해할 수 있다. 내가 형이었어도 고등학생이 좋다고 달려들면 무섭겠지. 그래도 형에게 차이고 싶진 않았는데... 속이 시끄러워진 민호는 더 이상 진우를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거절의 말을 기다렸다.

 

, 그러니까... 형이 기다려줘도 될까?”

?”

기다려줄게. 민호가 다 클 때까지.”

 

생각도 못 한 말.

 

그 사이에 민호가 마음이 식을 수도 있고,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겠지? 학교에 예쁜 여자애들도 많을 거 아냐.”

그래도 형이 제일 좋아요! 진심이에요!”

하하, 또 웃기 시작한 진우에 민호의 가슴이 들썩였다. 웃는 형이 너무 예쁘고 좋아서. 형의 웃음소리를 따라 제 심장도 함께 파도쳤다. 사람이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을까.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민호는 오른손을 가슴을 꾹 눌렀다.

 

그래도 마음 식으면 안 돼, 알았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 헤드뱅잉 수준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민호에 진우가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어디서 자기같이 귀여운 걸 들고 와서 내가 좋다고 고백하는데 내가 어떻게 안 넘어가고 버텨. “그렇게 흔들면 머리 아프겠다.” 진우의 한 마디에 민호의 고갯짓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진우는 그 모습이 웃겼지만 간신히 웃는 것만은 참았다. 이 이상 웃으면 놀리는 거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형이 기다릴게.”

“... 정말이죠?”

. 이렇게 박력 넘치고 귀여운 고백은 또 처음이다. 근데 펭귄은 왜 골랐는지 알겠는데, 토끼는...”

, 형 닮아서요!”

 

살면서 토끼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어본 진우가 그만 참지 못하고 또 웃기 시작했다. 어린애 만나니까 좋네. 나이 스물 일곱에 토끼 닮았다는 말도 들어보고. 토끼와 펭귄 인형을 한 팔로 끌어안은 진우가 남은 손으로 민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는 저보다 더 커서 하는 짓은 완전 애기 같은 민호. 빨리 자라서 형한테 와, 알았지? 진우의 말에 민호가 또다시 고장 난 로봇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 고마워. 너무 귀엽다.”

“... .”

근데, 나한테 최고의 선물은...”

 

 

네 마음이야.

 

 

 

*

 

 

 

페니의 몸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 놀란 진우가 전시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유난히 펭귄들 무리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어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어디서 다친 건지 기어이 페니의 몸에 선명한 흉터 생기고 말았다. 속이 상한 진우가 상처를 꼼꼼히 살펴보다 페니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프지 말고 빨리 나아라. 간단하게 연고를 발라주는 진우에게서 벗어난 페니가 이번엔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페니가 수영하는 걸 짠하게 지켜보던 진우가 바닥에 놓은 바구니를 집어들었다.

 

?”

 

전시관을 나서기 전에 잠깐 유리창 밖엔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야구 잠바를 입고 저를 향해 손을 흔들더니, 여기서 기다리겠다는 듯 검지손가락으로 제가 서있는 바닥을 콕콕 찍으며 가리켰다. 그 모습에 진우가 환하게 웃으며 전시관을 뛰쳐나갔다. 아무래도 퇴근 시간에 맞춰서 온 모양이었다. 라커룸으로 가서 얼른 옷을 갈아입은 진우가 서둘러 아까 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민호가 펭귄들을 구경하고 있는 게 보였다. 몇 년을 봐와서 지겨울텐데. 민호는 이제 저 안에 있는 펭귄들의 이름도 다 외우고 있었다. 제가 주절주절 동물들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한 번도 흘려 듣지 않고, 귀 기울여 들어주어서.

 

서두르지 말라니까. 맨날 얘기해도 맨날 까먹지, 형은.”

 

민호가 기다릴까봐 거울도 안 보고 나왔더니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나보다. 손으로 가볍게 제 앞머리를 털어주는 민호의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던 진우가 빨리 나가자며 민호를 보챘다.


오늘 팀플 모임이라 하지 않았어?”

형 만나려고 빨리 끝냈어. 나 잘했지.”

잘했네, 우리 민호. 아이, 예쁘다.”

나 이제 어린애 아니거든.”

너 어린애 아닌 거 내가 몸소 겪고 있잖아.”

 

능청스러운 진우의 말에 민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귀까지 빨개지는 민호를 보자 진우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눈치는 꽝이면서 이런 말은 또 기가 막히게 잘 알아들었다.

 

형 배고파?”

아니, ?”

빨리 가서...”

.”

“... 잘까?”

 

귀여운 도발에 이번엔 진우가 소리를 내 웃었다. 정작 그 말은 한 당사자도 멋쩍었는지 낮게 웃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우리 민호. 내가 좋다며 꼭 자기같이 귀여운 인형을 내밀던 어린 날의 민호가 떠올라 진우는 가슴 한 켠이 몽글거렸다. 빨리 자라서 오라고 했더니, 정말 다 커서 이렇게 내 옆에 있고 말이야. 저런 유혹도 할 줄 알고. 진우는 대답 대신 민호를 잡아 끌었다. 순순히 민호가 끌려왔다.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

안녕하세요. 조디(Jody)입니다.

월간송진 창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매일 웹진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울부짖던 지난 날들이 꿈처럼 느껴지네요. 주최자님께 무한한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이 글을 다 읽어주신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창간호에 저의 부족한 글이 실려 괜한 폐가 되진 않을까 떨리고 부끄럽지만, 부디 재미있게 읽어주셨기를 바랍니다.

그럼, 모두들 즐거운 송진하세요!



Written By. Jody (Twitter Account : @jody_0926)

선물 (Written by. 미래)
2017. 11. 26. 21:14

선물

 



w. 미래

 

 

오늘도 사물함에는 선물과 편지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 미친 스토커 새끼…. 짜증나 진짜.’

 

그 스토커 같은 녀석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다. 내게 닿아오는 익숙한 시선과 매일 내 사물함 속에 하나 둘 씩 자리를 잡고 있는, 전혀 내 취향을 고려하지 못한 딸기우유와 각종 간식 따위들이 거슬린다는 게 끝이다. 미처 챙기지 못한 준비물 일 때도 있었다. 부피도 항상 다양했지만 항상 편지봉투가 함께했다. 처음 그 편지를 읽었을 때 구구절절 늘어놓은 나를 향한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점점 원하지 않는 일종의 관심 표시가 지긋지긋했다.

 

 

 

 

* * *

 

 

 

 

나만 교복인가? 다들 참 부지런들 하다...’

 

1교시 체육. 다른 녀석들은 학교를 오자마자 일찍부터 갈아입었는지 다들 체육복 차림이었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어서 체육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는데 어째 사물함에는 내가 아무렇게나 집어넣었던 딸기우유와 딸기 맛 사탕, 그리고 지겨운 편지만이 존재할 뿐 체육복이 있어야 할 그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아 망할,

 

찌누~ 너 오늘 체육복 없냐? 빌려 줄 테니까 바로 줘. 우리 다음 체육임!”

. 고맙다. 나 간다.”

 

오지랖이 태평양급인 넓은 강승윤 덕분에 체육복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체육복을 갈아입으려고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벗은 상체가 시야 가득 들어왔고, 나는 순간 당황해서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누군가의 맨 몸을 봤다는 것보다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교실에 사람이 있는 게 예상 밖이었다. 그것도 잠시 나는 다시금 멀쩡한 정신으로 걸어 들어와 다급한 손길로 교복 마이와 넥타이를 끌어내렸다. 안에 받쳐 입은 얇은 티셔츠 한 장만 남겨두고 바지를 벗으려 할 때였다. 이름 모를 까만 그 놈은 마른 얼굴 위로 세수를 하며 급히 교실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뭐야, 쟤 왜 저래. 못 볼 꼴 봤다는 건가.”

 

그리고 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나간 그 녀석의 귀가 약간 붉어보였다.

 

 

 

 

 

벌써 점심을 먹은 후 5교시 수업이었다. 투둑- 뜨듯한 액체가 흐르는 느낌에 급히 코를 막았다. 코피가 난 것보다는 그 피가 흰 공책에 떨어져 붉게 물들이는 것에 당황했다. 한 손으로 대충 코를 막고 휴지를 찾아보려 가방을 뒤적거렸다. 수업 중 난데없는 내게 쏠리는 몇몇 애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선생님의 목소리만이 울려대던 교실에 반갑지 않은 소음을 만들어 낸 나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는 애들이 있는 건 당연한 것이다. 물론 그 외의 다른 애들은 자고 있었지만.

 

, 휴지 없는데, 일단 나가야겠다.’

 

김진우. 이거. 얼른 닦아.”

 

선생님 눈치를 한번 보고 화장실에 가기로 마음먹은 순간, 뒤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오늘 아침, 사람이 빠져나간 교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던 애였다. 다시 말하지만 그 애의 이름 따위 내가 알리가 없었다. 정확히 말해서는 아침에 그 애가 아무렇게나 벗어 두었던 마이의 명찰을 봤던 것도 같지만.

 

놈은 나에게 정갈하게 접혀있는 휴지들을 쥐여 주었다. 나는 수업 분위기를 깨는 게 싫어서 그 녀석이 건넨 휴지를 급히 받아 들었다. 받아든 휴지가 내 피로 인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동안 내 뒤통수엔 올곧은 시선이 따라붙었다. 항상 그랬듯이 신경을 끄기로 했다.

 

 

 

 

* * *

 

 

 

 

~ 오늘도 받은 거야? 걔도 참 어지간하다. 안 그래? 아니 우리 진우가 좀 인기 많을 상이긴 한데, 그래도 좀 사내새끼끼리 징그럽다.”

뭐 어때. 우린 덕분에 꽁으로 먹고 좋지. 이럴 땐 그냥 조용히 가져와 먹는 거야. 센스 없긴.”

아 됐고. 김지누 너 걔 누군지는 알아? 너한테 선물 보내는 새끼 말이야. 마니또인지 비밀친구인지 뭐 이런 것도 아니고 진짜 유치하게 이게 뭐냐. 걔도 참 김진우 관심 받기엔 틀려 먹은 놈이다~ 너 그 편지도 항상 안 읽고 버리잖아. 내용 궁금한데.”

아 뭐래. 야 너네 이런 소리 할 거면 가라. 진짜 재미없어.”

 

학교에 오면 항상 내 사물함을 차지하고 있는 기분 나쁜 누군가의 선물은 오늘도 어김없이 강승윤과 이승훈의 몫으로 돌아갔다. 물론 편지는 항상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뜬금없이 코피가 난 후로 괜히 기분이 이상해서 누워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십 년 넘게 들러붙어 있는 유일한 친구라는 새끼들이 매일같이 일종의 선물을 놓고 가는 어떤 미친 놈과 나를 엮으려 드는 게 기분이 나빠서 날카롭게 대꾸했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서 강승윤이 지겨운 딸기우유를 쪽 빨아 마시는 것을 보며 거부감이 치밀었다. 나는 그 선물이 소름 돋기 시작했다. 애들 말처럼 남고에서 내게 주는 그 관심이 이상했으니까.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의도가 뭔지도 모르는 거니까. 무관심에서 조금의 호기심이 생긴 순간이었다.

 

 

 

 

 

국어 필기한 사람! 아무도 없냐? 좀 보여줘! 아 시발 망했다아

 

 

휑한 노트를 들고 안절부절 돌아다니는 그때 그 애가 교실을 소란스럽게 했다. 그 녀석과 친해 보이는 대여섯 명 중의 몇은 이미 엎드려서 낄낄거리는 것으로 보아, 다들 필기를 안 한 것 같았다. 평소의 나였다면 그냥 고개를 돌리고 말았겠지만, 수업시간에 코피를 흘리던 내게 휴지를 건네주던 게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교실에서 방방 뛰는 그 애에게 다가가 내 노트를 주고 말았다.

 

엇 시바 누구야. 존나 고맙.. ? 어엇!”

그냥 빨리 써. 수업 종 치기 전까지 노트 돌려줘.”

! 얼른 쓰고 줄게!”

 

비글새끼 마냥 웃는 상으로 그의 친구들과 교실을 발발 뛰어 다니는 모습만 봤었는데, 내가 말을 걸자 광대를 잔뜩 끌어올려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내 노트를 받아갔다. 그의 가슴팍을 슬쩍 보며 노트를 건네었다. 나를 보던 녀석은 책상에 앉아 노트 위로 펜과의 마찰을 서둘러 만들어냈다.

 

나 괜히 오지랖 부린 건가.’

 

이번에는 똑똑히 보았다. 그의 명찰에 새겨진 이름을. 나는 송민호의 당황한 모습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하굣길이었다. 오늘 등굣길부터 어째 날이 흐리다 했더니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산은 없는데,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고, 겨울이라는 계절이 실감나게 날은 전보다 어둑어둑해졌다. 하필 승훈이나 승윤이도 먼저 가 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슬리퍼를 신발로 갈아 신으려다가 곧 비에 젖게 될 것 같아서 그냥 그대로 신고, 학교 현관에서 비를 최대한 피할 수 있게 옷을 벗어 머리 위로 둘러 가릴 준비를 했다.

 

하나, ,

 

하늘은 그런 나를 비웃는 듯 했다. 뛰면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빗물이 튀겨 스며들기 시작했다. 더 추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속으로 욕을 읊조리며 발걸음을 더 빠르게 옮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옆에는 나 보다 큰 어두운 그림자와 인기척이 있었고, 내 머리칼로 스며들던 빗물은 무언가에 튕겨 다른 소리를 내었다. 송민호였다. 그 애는 내게 초록색 우산을 쥐여 주려고 했다. 수업시간의 그 휴지 조각처럼.

 

너 써. 나는 안 써도 괜찮아. 집이 가깝거든. 아 아까 노트 빌려줘서 고맙기도 하고... 그럼 나 갈 게. 내일 봐!”

 

나는 멋대로 내게 우산을 주려는 그 애의 손목을 급하게 잡아챘다. 뭔 일 있냐는 듯이 웃으며 마주쳐오는 시선을 차마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말을 했다. 이런 거 진짜 불편하다.

 

그냥, 같이 가. 너 비 맞으면 내가 불편해. 우산 주인은 너잖아. 너희 집 가깝다며. 같은 방향인 것 같은 데.”

.. ? 그래 그럼 아파트 1층까지만 데려다 줘! 우산 줘. 내가 들게.”

 

어째서인지 내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녀석이 내게 너무 과한 배려를 해서 그런 탓이다. 우리는 그렇게 5분 정도 둘이 쓰기엔 비좁은 우산을 쓰고 걸어갔다. 송민호는 별안간 실실 웃음을 흘리며 실없는 소리를 했다. 별안간 정적이 흘렀을 무렵, 나는 이승훈이 점심시간에 내 가방 속에 던지듯 넣어 두었던 그 딸기우유가 떠올랐다.

 

너 먹을래? 버리려다가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 누가 준 건데?”

아 어떤 미친 스토커 새끼.”

 

나는 그 애에게 그 미친놈에 대해서 말했고, 욕을 늘어놓았다. 왜 계속 그런 걸 보내는 지 이해가 되냐고 물었다.

 

“......”

“...왜 말이 없냐?”

“......”

“......”

.. 집 다 왔다. 나 그럼 갈게.”

 

송민호는 싱겁게 말을 끝내더니, 내 말에 어두운 기색을 보였다. 또 다시 어색해지려는 찰나 녀석은 자기네 아파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동시에 그 녀석의 어깨가 생각났다. 모른 척 하기 힘들 정도로 내게 밀어 준 우산이 그런 생각을 증폭시켰다.

 

 

 

 

* * *

 

 

 

 

오늘은 어쩐지 교실에 들어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평소보다는 일찍 등교해서 교실에는 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오늘도 내 사물함에 놓였을 선물들을 떠올렸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제 정말 지긋지긋해.’

 

나는 자리에 내 가방을 걸어두고 사물함을 확인했다. 처음이었다. 사물함에는 선물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뒤적여 보았지만 없었다. 분명 한 사람이 보냈을 다양한 선물을 받은 후로 하루도 빠진 적이 없었는데. 뭐 원했던 거니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사물함을 닫은 후, 내 책상으로 가면서 내 뒷자리에 걸린 가방을 봤다. 송민호의 자리. 그 애가 나보다 먼저 온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책상을 확인하다가 나는 미처 들어가지 못한, 그의 책상 서랍 속 분홍색의 편지 봉투 다발을 발견했다. 익숙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송민호가 어디 있는지 찾으려 했다. 순간 고개를 돌려내다 본 창문에는 그 애가 서있었다. 허무하고 공허한 시선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끝까지 마주보지 못한 채 내가 먼저 피했다.

 

나는 알아챘다. 학년이 바뀌고 언젠가 부터 내 사물함 속을 매일 채워주던, 각종 기념일에 맞춰 익명의 선물 꾸러미를 주던, 돌아보면 느껴지지 않던 수업시간의 그 시선들이, 어제 저녁 송민호에게 욕을 했던 그 미친 스토커 같은 새끼가 모두 송민호라는 것을. 잠시 멈춰있던 회로가 다시금 일을 할 무렵 고개를 돌려 쳐다 본 창 밖에는 원래 아무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해져 있었다.

 

 

 

* * *

 

 

 

그 날 이후부터는 선물세례는 이어지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 애는 나에게 들킨 게 힘들겠지. 나는 그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죄책감도 들었다. 항상 교실 쓰레기통에 쳐 박아 넣었던 그의 편지와 선물들. 누가 준 건지 물은 그에게 심하게 그를 욕했던 것. 미처 무시했던 그의 젖은 어깨와 그날 아침 마주쳤던 눈빛. 그리고 그의 편지를 한 번도 읽지 않고 매번 버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애가 궁금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애의 눈에서 공허함을 본 날부터.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그를 찾아갔다. 그 존재를 알게 된 이상 그의 마음을 모른 척 하기는 힘들었다. 나는 최후 결론을 내렸다. 이건 아니야.

 

, 맞지. 그 동안.”

“...”

너 나 좋아해?”

질문이 이상한 거 아니야?”

너 아직도 나 좋아해?”

“......”

나 그동안 너무 부담스럽고 불편했어. 힘들고 싫었어.”

그동안 미안했어. . 좋아해서. 이제 안 좋아 해볼게. 그거 당장은 접기는 힘든데, 노력해볼게.”

“......”

나 욕하고 편지 그 따위 찢어버려도 다 괜찮아. 근데 그거 다 나라는 거 알았으니까, 무서워서, ”

 

내가 내 마음을 온전히 꺼내두기 까지 참지 못한 니가 시작하지도 않은 사랑에 급히 이별을 고한다. 흐르는 눈물이 보이는데도, 애써 웃으려는 너의 손목을 잡는다. 나는 왜 계속 너에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내 말 끝까지 들어. 나 아직 너한테 사과 다 못했어. 그리고, 왜 니 마음대로 끝내. 시작도 안했는데

 

나 궁금해졌어. 계속 네가 신경 쓰이는 이유가 뭔지. 그동안 받았던 네 편지와 선물들이. 네가 매일 아침 일찍 내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 뭔지.

 

네가 궁금해졌어.



Written By. 미래 (Twitter Account : cnalice_win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