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당신에게 (Written by. 열정맨)
2017. 11. 26. 21:37
BGM 검정치마 / EVERYTHING
내 마음 당신에게
w. 열정맨
5년간의 연애가 끝났다. 진우에게 2000일 동안 우주였던 사람은 먼지가 되었다. 그는 작은 입자로 나눠져 흩어졌다. 우주가 사라진 행성은 부서졌다. 22살에 시작된 첫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남은 건 먼지와 눈물밖에 없었다. 그가 사라졌고, 진우에게는 신경쇠약이 생겼다. 조울증이 찾아왔고, 불면증이 도졌다. 수면제 서너 알을 억지로 입으로 털어놓고 나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물도 잘 마시지 않아 빠짝 말라버린 입에는 음식물이 들어가기만 하면 도로 역류하기 일쑤였다. 보기 좋게 잡혀있던 몸은 점점 말라갔고, 빛나던 눈은 생기를 잃어갔다.
근 한 달을 미친 사람처럼 지내던 진우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다. 진우의 우주였던 사람의 후배, 민호였다. 그는 반 쯤 맛이 가버린 진우를 처음으로, 유일하게 찾아왔다.
“...형, 밥 먹자.”
민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안부를 묻는 말도, 위로를 담은 말도 아니었다. 그 말에 진우는 그동안 지겹게도 흘리던 눈물을, 이젠 영영 말랐을거라 생각했던 눈물을 다시 쏟아내었다. 현관 앞에 가만히 서있던 민호는 몸을 발발 떨며 우는 진우의 어깨를 안고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절반의 물건이 빠져버린 집은 냉했고, 공허했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두 사람 사이에는 별 말이 오가지 않았다. 버틸만하냐, 많이 힘드냐. 따위의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말은 일체 나오지 않았다. 최소한의 예의였다. 민호는 다만 그의 두 눈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제대로 안 챙겨먹었지? 얼른 먹어. 진우의 고개가 작게 끄덕거렸다. 묽게 끓인 흰 죽. 진우의 첫 식사였다. 모래를 삼키는 것처럼 괴롭지도, 역류하지도 않는 밥을 먹었다.
밥을 먹게 되니 최악이었던 몸 상태는 꽤나 금방 회복되기 시작했다. 힘이 없어 축축 쳐지지 않았고, 썩은 동태 눈깔이던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밥을 다 먹은 뒤에야 진우는 겨우 한 마디 했다.
민호야, 내가 밥 먹을 자격이 있어? 그 물음에 민호는 지금껏 살아온 25년 중에 가장 열변을 늘어놓았다. 당연하지, 형. 산 사람은 살아야 될 것 아니야. 근영이 형도 형 이렇게 정신 못 차리고 힘들어하는 모습 보기 싫을거야. 얼른 털어내고 일어나야지. 얼마가 걸리든, 이제는 ... 잊어야 해.
잊어야 하는구나. 진우가 대답했다. 맞네. 잊어야 돼. 근데, 아직 한 달이야. 난 걔랑 오 년을 만났어. 아직도 눈 감으면 걔 얼굴이 떠오르고,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아직은... 전혀 잊혀지지가 않아, 민호야. 다시 울 듯한 표정의 진우에, 민호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형에게 근영이 형이 소중했듯이 나도 그 형이 소중한 사람이었어. 물론... 우리의 소중함은 조금 다르지만. 형, 얼마가 되더라도, 근영이 형을 마음에 반절은 묻어놓더라도 형이 좀 편해지길 바라.
노력해볼게. 고맙다, 야. 나 보러 와줘서. 예전에 군더더기 없는 그 밝은 미소만큼은 아니었지만 작게 입꼬리를 올린 진우가 아까와는 반대로 민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시간을 확인한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어, 갈게. 첫마디처럼 간결한 인사에 진우가 조금 더 웃음을 띄워냈다.
그가 나가고, 다시 진우만이 남았다. 단지 공허할 뿐이라고 느껴졌던 공간에는 아주 조금, 온기가 돌았다. 그 날, 수면제는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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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거듭했고, 낮과 밤은 반복되었으며 계절은 어느 덧 세 번이 바뀌었다. 가을이었다. 시간은 늘 흐른다는 법칙에 맞게 진우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고, 올 스톱이던 사회생활도 다시 시작됐다. 그간에 그의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은, 당연하게도 민호였다. 묵묵히 그의 옆을 지켰고, 시간만 나면 집을 찾아와 조금은 귀찮게 굴었다. 이제 진우에게서는 10개월 전의 폐인 같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절반 정도는 그를 잊었다. 반은 가슴에 묻었고.
민호가 요즘도 근영이형 생각나? 물으면 아니, 이젠 목소리가 가물가물하네. 라고 답할 정도였다. 그래도 첫사랑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은 사실이네. 진우가 멋쩍게 웃으면 민호도 따라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나도 첫사랑 아직도 생각나는데, 뭘. 6년이 지났는데도.
진우와 민호가 함께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다. 그 속에서 진우는 안정을 찾아냈고, 호감을 키워나갔다. 진우에게 그는 빛이었고, 구원자였다. 영원한 어둠 속에 잠식됐던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운 왕자 쯤. 언제 아팠냐는 듯이, 그 사람은 점점 흐려져 갔고 본래 흐렸던 민호는 뚜렷해져 갔다. 또렷히 보이는 그를 보며 진우는 부정할 수 없었다. 세 계절 만에, 얼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는 사실을. 힘들 때 옆에 있어준 사람이라 감사한 마음일거라 생각했지만 감사함과는 영 다른 느낌이었다. 민호와 있을 때면 다른 잡념이 떠오르지 않고, 오직 그만 보였다. 그를 제외한 모든 게 뿌옇게 흐려진 것만 같았다. 빼도 박도 못하는 사랑의 서막이었다.
그 무렵에 민호는 사랑을 말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고민하는 나날이었다. 가장 걱정인 부분은, 형이 시작을 무서워하면 어쩌지_였다. 무너지는 그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봤고, 회복하는데 거의 일 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깊숙한 곳 어디든 두려움이 남아있을 가능성도 제외할 수 없었다. 민호는,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진우를 더 이상 보기 싫었다. 진우를 남겨둔 채 홀연히 떠나가버린 그 사람은 잊고 웃을 일만 있기를, 행복함만 느끼기를 바랐다. 이제야 간신히 아픔을 잊은 진우를, 공연히 제가 휘적이게 되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사랑을 거절당하는 것도, 그가 다시 울적해지는 걸 보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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끙끙 앓기만 하다 짧은 가을이 지나갔다. 일 년이었다. 진우의 우주가 사라졌다가 다른 세상이 만들어지기까지. 낙엽은 다 떨어졌고, 날은 추워져 손과 발이 어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곧 크리스마스였다. 잘 알지 않는가? 누구든, 그 날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도 막상 그 날이 되면 괜스레 설렌다는 것.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이브에, 민호와 진우가 만났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예정인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기만 하면 들리는 카페에 민호가 꽤 긴장된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탄절을 핑계로, 진우에게 사랑을 얘기할 생각이었다. 약속된 시간이 가까이 되자 진우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민호가 벌써 왔나, 카페를 두리번대던 진우가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먼저 와 있었네?”
“준비가 일찍 끝나서. 형거 시켜놨어, 앉아.”
센스 있네. 고마워. 맑게 웃은 진우가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눈 오는 것도 썩 좋진 않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따듯한 데 앉아서 보기만 하는 건 그나마 괜찮다, 그치?
예전처럼 다시 말이 많아진 진우의 얼굴을 보던 민호는 멍해짐을 느꼈다. 막상 얼굴을 보니 얘기를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카페에서는 별 시답지 않은 얘기들이 오고 갔다. 너 졸업하는데 뭐 갖고 싶은 건 없냐, 올해 승윤이 다시 한국 들어온다더라, 승훈이 형 대학원 간다더라... 같은. 영양가 적은 대화를 하다, 크리스마스 이븐데 술 먹을래? 오랜만에. 라는 진우의 제안에 카페를 나섰다.
고기집으로 가는 와중에도 눈이 내렸다. 길이 조금 미끄러운 탓에, 진우는 여러 번 미끄러졌고 결국 민호에게 업히다시피 꼭 붙어 갔다. 겨우 겨우 도착해서야 민호는 식은땀을 훔칠 수 있었다.
오늘이 뭔 날인가 싶었다. 평소에는 많아도 소주 두 잔이면 더 이상은 마시지 않던 진우가 연신 술을 마셔대고 있었다. 잘 익어가는 고기도 열심히 먹어대면서. 무슨 일 있어? 걱정이 담긴 민호의 말에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며 혼자 한 병 반을 비우던 진우가 결국 취해버렸고, 테이블에 고개를 박았다.
하, 또 언제 집까지 데려다주지. 오늘은 꼭 고백하려고 했는데, 망했다. 그 탓에 입맛이 썼다.
가게에서 나올 때는 12시가 다 되어 있었다. 여전히 눈은 내렸고, 조금 쌓인 탓에 미끄럽지는 않았다. 찬바람을 맞으니 정신이 조금 드는 지 민호의 등에 업혀있던 진우가 앓는 소리를 냈다. 민호야... 미안. 나 오늘 좀 많이 마셨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지, 진우는 틈새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민호야. 나 이제 걔 생각 많이 안 난다. 작년에는, 진짜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거든. 걔 없는 내가 상상이 안 가고, 내 옆에 더 이상 걔가 없는 게 너무 무서웠어. 아무리 울어도 다시는 못 만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어. 그래서 평생 근영이 생각만 하다 죽을 것 같았어. 이제 내 인생에는 사랑이 없을 것 같았다? 근데... 나 진짜 나쁜 놈인가봐. 근영이 없어진 지 일 년 밖에 안 됐는데... 좋은 사람이 생겼어.
민호의 걸음이 멈췄다. 그러자 으차, 하고 진우가 내려왔다. 누군데요, 형이 좋다는 그 사람이. 울음이 억눌린 목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가 싱긋 웃었다.
여기까지 나 업고 온거야? 힘들었겠네. 저기 봐, 앞에. 그의 말에 앞을 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겨울의 한강이 보였다. 애처럼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민호야.”
내가 좋다는 사람, 너야. 그 말에 민호는 애써 눌러 담던 눈물을 결국 왈칵, 쏟아냈다. 일 년 동안 고마웠어. 이제 우리, 어정쩡한 사이 말고 애인하자. 아, 혀엉...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단 말이야...
민호에게 있어서는 몇 개월만에 맺은 결실이었고, 진우에게는 온 세상이 다시 만들어진 것이었다. 여전히 눈은 내렸다.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폭죽이 터졌고, 진우가 민호의 품에 안겼다. 날은 추웠지만 당신과 함께라 따뜻한 것 같았다. 비로소 잃어버린 걸 찾은, 완전함을 가슴 가득히 느낄 수 있었다.
26살, 28살의 삶에서 가장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내 마음 당신에게 Fin.
Written By. 열정맨 (Twitter Account : @YEOLJUNG_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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