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ve Me In
w. NYOTA
0.
“흣, 으, 아아.”
한 평 남짓한 방 안에 습한 소리와 살결이 부딪히는 소리가 가득 울렸다. 침대에 얽힌 두 남자의 움직임이 한층 격해지더니 날카로운 신음과 함께 이내 모든 동작이 한꺼번에 멎었다. 하아, 하아, 숨을 가쁘게 몰아쉰 민호는 제 위에서 허리를 놀리던 진우의 어깨를 끌어당겨 얼굴에 정신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간지러워.”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서 소년같이 순박한 웃음이 터졌다. 방금 전까지 제 위에서 한껏 야한 모습을 보였다고하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민호는 그런 진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느리게 진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밀려오는 공허함. 방금 전까지 뜨겁게 몸을 섞었지만 민호는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가진 건 진우의 순간 뿐이라는 걸. 하지만 그는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김진우의 순간이 아닌 전부를. 마음 안에서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가는 욕심에, 그럴수록 여실히 느껴지는 가슴의 빈 자리에 답답함을 느낀 민호는 어렵게 입을 뗐다.
"진우 형,"
"응?"
"...우리 무슨 사이예요?"
1.
송민호가 김진우를 처음 만난 곳은 갓 새내기가 되어 가입한 동아리의 개강파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들에게 선배들이 우글우글 모여있는 곳은 어색하지 않을래야 어색할 수 밖에 없는 장소였다. 엉거주춤 서서 선배들을 대충 눈으로 훑던 민호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동그란 눈을 가진 하얀 남자. 살짝 지은 미소에도 움푹 패인 보조개가 눈에 띄었다. 민호와 마찬가지로 후배들의 얼굴을 죽 훑던 남자와 민호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주 잠시, 그러나 분명히.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개강파티 내내 자꾸 시선이 그 선배에게 계속 갔다. 약간 어두운 술집 조명 아래에서도 그 사람이 있는 쪽은 조금 더 밝은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는지 남자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한 번쯤 옆에 가볼까 싶었지만 하도 주변에서 민호를 잡아대는 통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시간이 깊어지고 몇몇 이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할 무렵, 자리가 어수선해지면서 민호의 옆자리가 비었다. 그 선배 옆은 어떠려나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마지막으로 앉아있던 자리에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안녕.”
옆에서 들린 낯선 목소리. 민호가 고개를 휙 돌리자 자신이 찾고 있던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민호 옆자리에 앉더니 민호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쩍 가까워진 얼굴에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잘생긴 후배님이네. 이름이 뭐랬더라?”
“송민호입니다. 선배님.”
생각보다 서글서글한 사람이네, 그 사람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선배님이라 불린 남자는 까르르 웃으며 민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냥 형이라 불러도 되는데. 후배님이랑 두 학번 차이 밖에 안 나. 나긋한 손길에 민호의 얼굴에도 살풋 웃음기가 번졌다.
“그럼 그럴까요, 형?”
“훨씬 듣기 좋네. 그럼 민호, 같이 짠할까?”
그렇게 만난 남자가 김진우다. 자리를 비우는 이들이 늘어나고, 꽤나 규모가 컸던 개강파티가 소수의 인원만 남을 때까지 진우는 줄곧 민호의 옆에 있었다. 그다지 의미 없는 스몰톡이 오갔지만 민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비식비식,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냥, 잘 맞는 사람 같았다. 별거 아닌 이야기도 이렇게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어? 김진우, 안 갔어? 지금 열두 시 반 넘었으면 막차 놓친거 아냐?”
“...네? 형 가야했어요?”
화두가 한창 민호의 자취 얘기로 빠진 와중에 누군가 물었다. 깜짝 놀란 민호와는 달리 진우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나 민호가 재워줄거래.”
그런 적 없었다. 물어본 선배에게 대충 대답을 한 진우는 '나 재워줄거지?' 뒤늦게서야 양해를 구하며 미소를 지었다. 민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면이었지만 그냥, 상관없을 것 같았다. 얼렁뚱땅 약속을 하고 난 뒤로는 오히려 민호가 시계를 자주 보기 시작했다. 언제 들어가자고 말할까. 별다른 것도 아니고 제 친구들 재워주듯이 오늘은 선배 한 명 재워주는 것뿐인데 평소와는 다르게 긴장이 됐다. 진우는 그런 민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른 이들과 한창 여유롭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진우가 민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것은 새벽 두 시 반을 넘긴 시간이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뺨이 발그레해진 진우가 민호에게 활짝 웃었다.
“아, 조금 피곤하네. 갈까, 민호야?”
2.
둘이 마신 양만 해도 족히 열 병이 넘어갈텐데, 진우는 좀처럼 취한 기색이 없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멀쩡히 걸어온 진우는 민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넓지 않은 그 공간을 분주히 누볐다. 이것저것 집안을 둘러보는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민호는 천진해보이는 그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여분으로 마련해둔 이불을 깔 준비를 했다. 민호의 곁으로 다가온 진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불은 또 왜?”
“제가 바닥에서 자게요. 형 침대 쓰세요.”
민호의 방 한켠에 놓인 매트리스는 성인 남자 두 명이 넉넉하게 누울 사이즈가 되진 못했다. 이불을 깔려는 민호의 손을 진우가 막았다.
“아냐, 그냥 저 위에서 같이 자자.”
멈칫. 그 말에 민호의 움직임이 멎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우를 쳐다보자 진우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집주인 바닥에 재우는 손님이 어딨어. 살풋 웃는 미소가 말했다. 그럴싸한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손님을 바닥에 재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민호는 이내 이불을 도로 넣었다.
불은 껐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두 명이 누울 정도의 공간이 나와 일단 눕긴 했지만, 예상했던 만큼 좁은 탓에 서로의 살이 바짝 맞닿아있었다. 평소의 민호라면 살 부대끼는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지금 억지로 두 눈을 감은 민호의 가슴은 이상한 긴장감으로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옆으로 돌아누운 진우의 숨결이 어깨에서 감돌았다.
"...민호야."
"네?"
"잠이 안와?"
"네..."
푸흐흐, 옆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민호는 그 웃음에 몸을 틀어 진우와 눈을 맞췄다.
"형은 왜 안자요?"
"...그냥."
가까이 붙어있자니 시야에 들어오는 게 커다란 눈밖에 없었다. 진우는 눈을 곱게 접어 웃고있었다. 까만 눈동자는 바깥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빛에도 반짝이고 있었다. 민호는 한참이나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빛이 새삼 가까워졌다고 느낀 순간,
쪽-
촉감이 먼저, 그 다음이 소리였다. 민호의 입술에 말랑한 감촉이 와닿았다. 갑작스러운 진우의 행동에 민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니까, 이건. 황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더듬는 민호를 보자 진우가 아까보다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귀여워."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진우는 도로 눈을 감아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이 진우의 입에서 샜다. 그렇게 혼자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 때까지도 민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민호는 천천히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방금 송민호는 -적어도 머리가 크고 나서는- 처음으로 남자와 뽀뽀를 했다. 그것도 입술로. 술기운이 단번에 몸에서 빠져나갔다. 아까도 쉬이 잠들지 못했는데, 지금부터는 더더욱 잠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진우는 대체 왜 자신에게 뽀뽀를 한 걸까? 차라리 꿈이었으면 싶었지만 꿈이라기엔 그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놀란 심장은 쉽게 진정되지도 않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걸 거야. 밝아오는 창을 보며 겨우 내린 결론이었다. 역시나 잠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대로 잠드는 것도 글렀다 싶은 민호는 하염없이 잠든 진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사처럼 잠든 얼굴을 보고 있자니 겨우 진정시킨 마음이 다시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바깥이 좀 더 밝아지고, 햇살과 함께 진우의 눈이 천천히 떠질 때까지 민호의 눈은 진우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잘 잤어?”
눈을 뜨자마자 싱긋 웃는다. 미소가 아주 습관인 사람이었다. 민호는 한숨도 못잤다는 말은 하지 못해 씨익 웃고는 피곤한 얼굴에 마른세수를 했다. 어쨌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대하는 걸 보니 어제 진우는 멀쩡한 게 아니라 취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기억을 못하는거고. 괜히 자신만 신경을 곤두세운 것 같아 멋쩍은 마음이 들었다. 양손에 파묻었던 얼굴을 든 민호는 피곤한 기색을 감추며 자연스러운 척 진우에게 물었다.
“해장하러 갈래요, 형?”
술에 취했을거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마음 한구석의 의심이 가시지 않았는지 민호는 계속 진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는 그런 민호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에게 구는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어떻게 먹었는지 모를 밥을 다 먹고 나오자 이제 헤어질 시간이었다. 어쨌든 어젯밤 있었던 일은 자신만 기억하는 해프닝으로 마무리 해야겠다 싶었던 민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진우 형."
쪽-
“잘가 민호야.”
갑자기 다가온 체온에 민호의 몸이 또 한 번 굳었다. 입술을 뗀 진우는 어제부터 줄곧 봐온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에 보자, 손을 흔들며 짧게 인사를 했다. 이건, 확실히 취중은 아니었다. 그럼 어젯밤의 일도... 남겨진 민호는 우두커니 서서 멀어져가는 진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버스 정류장을 향해 통통 뛰어가는 진우의 귀끝이 흩날리는 벚꽃잎 때문인지 아까보다 조금 더 분홍빛을 띤 것 같기도 했다.
3.
그 때부터였다. 김진우와 묘한 사이가 된 건. 가볍게 뽀뽀로 시작한 스킨십이 빈도가 잦아지고, 농도가 짙어져키스로, 섹스로 이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묘하다는 것은 어쨌든 스스로 납득이 불가하다는 것을 뜻했다. 민호는 도무지 자신이 왜 그렇게 김진우에게 약한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들이 김진우 앞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진우가 민호의 생활에 더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마음 한구석에 피어난 이름모를 감정도 그 크기를 점점 키워가고 있었다.
"...우리 무슨 사이예요?"
몇 번을 참다가 겨우 물은 것이었다. 남들이 흔히 말하는 연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지금까지 연인이라고 할 만한 어떠한 애정표현도 오가지 않았으니까. 나긋하게 자신을 끌어당기는 김진우와 그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송민호. 딱 그렇게 정의내릴 수 있는 관계였다.
"우리?"
얇은 입술을 앞으로 쪽 빼밀더니 흐음, 고민하는 목소리를 낸다. 이내 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민호를 향해 웃었다.
"무슨 사이긴. 그냥 친한 형동생 사이지."
지금까지 진우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충분히 예상한 대답이었건만, 울컥한 마음이 치솟았다. 당장이라도 따져묻고 싶었다. 형은 '친한 동생'과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냐고. 하지만 민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화를 꾹 삼켰다.
민호가 진우와 몇 차례 몸을 섞으며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섹스를 할 때의 진우에게서 평소엔 볼 수 없는 표정이 나온다. 김진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미소였다. 늘 친절하고 상냥한 진우는 간혹 보면 정말로 미소밖에 지을 줄 모르는 사람같았다. 누군가에게 기분 나쁜 말을 들어도, 귀찮은 일을 떠맡아도 한결같이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섹스할 때의 진우는 누구보다 제 감각에 충실했다. 찡그린 얼굴, 흥분에 들뜬 얼굴, 간지럽다며 까르르 웃는 얼굴. 민호는 그런 순간이 좋았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김진우의 표정을 자신만 볼 수 있다는 것이.
진우의 다양한 표정을 보다보니 민호는 정말로 즐거워서 웃는 진우의 웃음과 그 외의 웃음이 미묘하게 다르단 것도 눈치 챌 정도가 되었다. 그 차이가 너무나도 미묘하여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간극. 그리고 방금 제 질문에 답을 하며 보인 미소는, 아무래도 거짓같았다. 김진우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4.
사실 민호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진우와의 미묘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진우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새내기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나 여자 쪽에서 먼저 고백해서 사귀게 된 케이스였다. 딱히 헤어질 이유는 없었다. 진우와 섹파 비슷한 관계가 된 후에도 민호는 여자친구와 헤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진우랑 하는건 연애라고 하기엔 어색했고, 혜진과의 관계는 과에서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까.
"무슨 생각 해?"
혜진은 눈치가 빨랐다. 자신이 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귀신같이 알아챘다. 카페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던 민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어어, 그냥 피곤해서.' 말을 얼버무렸다. 차마 진우를 생각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혜진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지만 별다른 추궁 없이 이내 대화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진우에게 그 질문을 한 이후, 민호는 부쩍 진우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친한 형동생 사이. 그런 단순한 사이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단순한 형동생 사이로 남고 싶지 않았다. 제 안에서 서서히 커져가던 이름 모를 감정이 점차 구체적인 형태로 자리잡고 있었다.
"혜진아."
"응?"
"너 나 좋아해?"
한창 다가올 기념일 이야기를 하던 혜진은 뜬금없이 던져진 질문에 푸흐흐,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다른 얼굴이 겹쳤다. 남들에게 상냥한 얼굴로 짓는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즐거울 때 나오는 웃음소리. 민호의 가슴이 점점 죄책감으로 무겁게 짓눌렸다.
"그럼. 좋아하지."
"...."
"너는?"
혜진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민호를 쳐다보았다. 괜히 입 안이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을 하려 입을 떼려던 순간,
지이이잉-
테이블 위에 놓인 민호의 핸드폰이 무겁게 울렸다.
[민호야]
[나 아파]
민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혜진이 놀란 눈을 하고 민호를 쳐다보았다.
"미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대답을 듣지도 않고 민호는 카페를 빠져나왔다. 꾹, 전화버튼을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형, 어디예요?"
동아리 방 문을 벌컥 열자 소파에 진우가 앉아있는 게 바로 눈에 들어왔다. 빠른 걸음으로 진우에게 다가간 민호는 당장 무릎을 확인했다.
"많이 다친 거예요?"
"계단에서 넘어졌어."
빨갛게 맺힌 핏자국과 더러운 흙이 여기저기 묻어있는 무릎. 민호는 진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는 길에 급하게 산 연고와 반창고를 꺼냈다. 제 마음도 몰라주는 사람 때문에 여자친구도 팽개치고 달려오고, 뭐가 예쁘다고 약도 사오는지. 바보같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진우의 무릎을 다루는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상처 주변에 묻은 먼지를 살살 닦아내고, 꼼꼼히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고.
"이제 됐죠?
부러 퉁명스럽게 말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진우는 그런 민호를 올려다보더니 헤헤,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그럼 저는 그만,"
"근데 나 무릎 아직 아픈데. 정류장까지만 데려다주면 안돼?"
... 결국 또 져버렸다. 도무지 저 미소 앞에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게 설령 진짜가 아니라 할지라도. 팔짱을 끼고 정문으로 내려가는 길에 진우는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진짜 아픈 거 맞아?"
"응. 나 진짜 아파."
괜히 입술을 삐죽 내밀며 더욱 몸을 붙여오는 진우 때문에 민호는 또 다시 크게 한숨을 쉬었다. 김진우도 문제지만, 확실히 자신도 문제였다.
5.
“승훈이 형, 혹시 진우 형 못봤어요?”
민호는 막 수업을 끝나고 강의실을 나서던 승훈을 붙잡았다. 오늘 아침, 같이 듣는 교양 수업에 나오지 않았던 진우가 오후 네 시가 넘어가는 지금까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나 연락이 안 된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에는 늦어도 두어 시간 안에 꼬박꼬박 답장을 해왔는데. 전화를 몇 통이나 해보고, 카톡도 보내봤지만 진우는 묵묵부답이었다.
“진우? 진우 오늘 아프다던데?”
그래서 오늘 팀플도 빠졌어. 덤덤하게 진우의 소식을 전하는 승훈에게 짧게 감사의 표시를 한 민호는 곧장 진우의 집으로 향했다. 서로 묘한 관계가 된 이후로 몇 번 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찾아가는 길은 익숙했다. 괜히 가는 길 내내 입술을 씹었다. 진우는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띵동-
생각보다 문은 금방 열렸다. 빼꼼 열린 틈으로 딱 봐도 하얗게 질린 진우의 얼굴이 보였다. 미처 진우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민호는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아프다면서요? 죽 좀 사왔어요.”
“누가 말해줬어?”
“승훈이 형이요.”
현관이었지만 아랑곳 않고 땀으로 살짝 젖은 앞머리를 젖히고 이마를 짚었다.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말릴 기운도 없는 듯 진우는 민호의 손길을 받아내고는 이내 좁은 방 한 켠에 놓인 침대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끙, 작은 동작에도 앓는 소리를 내며 눕는 등이 부쩍 야위어 보였다. 평소에는 갖은 핑계로 잘만 불러내더니, 정작 이렇게나 아플 때는 아무도 부르지 않고 혼자 청승맞게 구는 꼴이라니.
“왜 연락 안 받았어요.”
“아침에 승훈이한테 연락하고 내내 잤어.”
“뭐 좀 먹긴 했어요?”
왜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냐는 서운한 마음은 핼쓱한 얼굴에 대고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진우는 힘없이 고개를 젓는다. 민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포장해온 죽을 주섬주섬 꺼냈다. 민호의 움직임을 따라가던 진우는 천천히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함께 포장된 반찬까지 준비해 진우의 입으로 들이미는 민호의 입에서 참다못한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사람 좀 부르던지. 제대로 챙겨 먹지도 않으면서.”
“뭐하러. 딱히 부를 만한 사람도 없는데.”
나 있잖아요. 이 말 또한 꾹 삼켰다. 죽을 호호, 불고는 진우의 앞에 내밀자 한숨을 푹 쉬더니 얌전히 입을 벌렸다. 한동안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묵묵히 민호가 죽을 떠다 식혀주면 진우가 그걸 받아먹는 단순한 움직임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곧잘 먹는 진우를 보자 속상했던 민호의 마음도 풀려가는 것 같았다. 아기새같아. 기특한 마음에 진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졌다.
가져온 죽과 약까지 다 먹이고서야 민호는 진우를 다시 눕혀주었다. 민호는 설거지와 뒷정리까지 마무리를 하고 나서 얌전히 눈을 감은 진우의 옆에 털썩 걸터앉았다. 촘촘한 속눈썹을 한 올 한 올 관찰하고 있는 와중에 진우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손 많이 가게 해서 미안해.”
아프면 사람 맘이 약해진다더니, 평소에 저에게 하는 짓은 미안하단 얘기 안 했으면서 지금은 미안하단다. 피식, 짧은 웃음이 샜다. 민호는 대답 없이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진우의 손을 쥐었다. 손끝까지 화끈한 열기가 올라있었다. 엷은 미소를 띠며 진우가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유혹하지 마. 나 아직 안 나았어.”
그러면서도 손에 닿는 서늘한 온기가 좋았던지 저의 이마에 민호의 손을 가져다댔다. 웃겨, 유혹은 누가 하는데. 민호는 진우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넘겼다. 진우는 민호의 손길을 얌전히 받아내고 있었다. 빨갛게 물든 입술에서 색색, 가쁜 숨소리가 샜다.
“형,”
“....”
“... 우리 사귈래요?”
감겼던 눈이 살짝 뜨였다. 다음으로는 입에서 푸흐흐, 웃음이 터졌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손을 들어 올린 진우가 민호의 옆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이구, 귀여워. 우리 민호.”
그게 끝이었다. 힘없이 팔을 떨구고 다시 눈을 감은 진우의 입에서는 평소에도 질리도록 보던 그 미소 외에 다른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또 그 표정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짓던 그 표정. 다른 사람들에게 늘 지어주는 그 사람 좋은 얼굴. 민호는 점점 더 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의 김진우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얼굴을 해야 했다. 초조함에 절로 입술을 씹게 되었다. 한참이나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던 진우는 이내 몸을 틀어 민호를 등지고 돌아누워버렸다. 잠깐의 침묵. 표정을 알 수 없는 진우에게서 약간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몸이 이래서 바래다주진 못하겠네. 혼자 갈 수 있지?”
민호는 대답 대신 진우의 등에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갈게요, 짧은 인사를 건네는 민호를 진우는 끝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쾅- 집을 나선 민호는 일부러 문을 더 세게 닫았다. 혹시나 싶어 문 앞에서 잠깐 뜸을 들였지만 닫힌 문 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나쁜지는 알 수 없었다. 섣부른 고백을 한 자신 때문인지, 그걸 가볍게만 받아넘긴 김진우 때문인지, 예쁜 입꼬리에 걸려있던 하염없이 부자연스러운 미소 때문인지, 민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6.
혜진과 헤어졌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혜진이 먼저 이별을 통보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더라도 끝날 관계였다. 진우에게 사귀자고 말 한 그 날부터 확신이 들었다. 더 이상 혜진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늦게 끝낸 데 대한 후회가 들 정도였다. 자신과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진우의 말도 민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별을 맞이하고 돌아오는 길에 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심한 통화음이 몇 번 흐른 후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형,”
- 어.
"몸은 좀 어때요?"
- 다 나았어. 몸살이었나 봐. 그 때는,
“나 헤어지고 오는 길이에요.”
긴 정적이 흘렀다. 민호는 핸드폰 너머의 침묵이 길어지자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한참 만에 답이 돌아왔다.
- ... 너 어디야.
진우는 집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를 결심한 듯 민호의 표정은 고요했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진우는 빠른 걸음으로 민호에게 다가갔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진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첫마디에 민호의 단호한 표정이 흐트러졌다. 이는 제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걱정해주고, 그것도 아니라면 위로해줄 줄 알았는데. 평소의 그 태평한 김진우라면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지금 진우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왜 헤어졌어?"
그러니까, 지금 김진우는,
"나 때문에 그랬어?"
화가 난 것 같았다.
"저번에 사귀자는 둥 이상한 소리하더니, 그거 때문이야?"
"..."
"너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처음보는 진우의 화난 얼굴. 약간 상기된 낯빛과 찡그려진 미간. 평소엔 화도 안내는 사람이 자신에게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뭘까, 민호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다른 마음이 불쑥 솟아올랐다.
"형 화난 거 처음 보는 거 같아요."
솔직하게 할 말은 해야 했다. 엉뚱한 민호의 대꾸에 할 말이 턱 막힌 건 진우였다. 뒤늦게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진우는 입을 막았다. 자기도 모르게 너무 많은 것을 표현한 것 같았다. 송민호는 그런 진우의 마음을 아는지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왜 아무 말 안해요?"
"...."
"네. 그거 때문이에요. 저 형 좋아해요. 많이 사랑해요."
"...."
"형은... 어떤데요?"
"...."
“....”
한참동안 아무 말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진우를 보더니 민호는 조금씩 진우에게 다가갔다. 진우의 시선은 민호에게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코앞까지 다가간 민호는 진우의 머리를 폭 안았다. 얼떨결에 딸려온 진우의 머리가 민호의 가슴에 통 부딪혔다. 머리 위에서 민호의 목소리가 낮게 웅웅 들렸다.
"맘에도 없는 소리 하는 것 같아서 신경 쓰일 때 많았는데, 이렇게 화내는 거 보니까 솔직하고 좋네요."
이건 민호의 진심이었다. 누구라도 처음 봤을 진우의 화난 얼굴. 화를 낸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지금의 민호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진우가 -어쩌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솔직한 감정을 표현했다. 그것도 자신에게. 민호는 진우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나직한 민호의 말에 진우는 대꾸할 말을 잊었다.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안아주지도 않아 어정쩡한 둘의 자세.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민호는 천천히 진우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송민호는 웃고 있었다.
"나는 헤어졌고, 다시 걔랑 사귈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형 마음만 말해줘요. 내가 원하는 답이면 더 좋겠지만, 그냥 형의 진심을 알고싶어요."
나랑 사귀기 싫으면 싫다고, 좋으면 좋다고 말해줘요. 싫다고 해도 괜찮아. 깨끗이 맘 접을게요 그러면. 다정한 목소리로 제 할 말을 마친 민호는 깔끔하게 뒤돌아섰다. 진우에게는 아마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민호는 이제 보지 않아도 진우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마 지을 표정을 결정하지 못한 채 멀어지는 저를 바라보고 있겠지. 진우의 진심이 어떤지 아직은 본인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 결과가 어떠하든 딱 한 번이라도 들을 수 있었으면 했다. 김진우의 솔직한 마음을.
7.
진우의 가장 첫 기억은 낡은 결혼사진을 쓰다듬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틈만 나면 “너네 엄마는 참 웃는게 곱다. 그래서 내가 반했지.” 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는 진우가 커갈수록 그 예쁜 미소를 가진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아주 가끔 집안의 물건을 깨기도 했다. 자신과 닮은 어머니를 사랑했던 어린 진우는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미소가 좋다면서, 왜 어머니를 웃게 해주지 않는걸까. 실은 그 어머니의 미소가 아버지 외에도 다른 남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그래서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냈다는 것은 진우가 조금 더 크고 나서 알게 된 일.
결국 부모님은 갈라섰다. 진우야, 오늘부터 새 아빠가 오실거야. 부드러운 손길과 미소를 가진 어머니가 말했다. 진우의 집에 찾아온 건 정확히는 새 아빠'들'이었다.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년 단위로 아빠들이 바뀌는 풍경은 어느 새 진우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있었다. 새 아빠들이 매번 처음 올 때 마다 어머니에게 하는 말, '사랑해, 희정아.' 굳이 듣지 않아도 그 말이 뻔하게 떠오를 무렵, 진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사랑이란 거, 참 별 거 아니구나. 제 어머니가 짓는 가벼운 웃음 하나로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기댈만한 온기가 필요할 때가 있었다. 진우는 그걸 위해 어머니를 닮은 자신의 미모를 이용했다. 놀랍도록 쉬웠다. 웃으며 몇 번 베푼 호의에 다들 마음을 쉽게 열었다. 그렇게 관심을 받고, 사랑을 독차지하고.
진우는 참 웃는게 예뻐.
잘 웃는 거 봐. 성격 좋을 거라니까.
나도 저렇게 웃으면 누구한테나 사랑받을 수 있을 듯.
애인을 사귀는 데 있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벼운 관계가 좋았다. 자신의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한 남자는 결국 어머니와 이혼했고, 진우는 살면서 그토록 미련한 감정을, 그 때문에 짊어질 상처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진우는 늘 얼굴에 가면을 썼다.
민호에게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접근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송민호는 잘생겼고, 첫눈에 한 번 꼬셔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으니까.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는 게 더 마음에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시들해지겠지, 다른 사람들처럼. 여전히 큰 기대를 하지 않는 진우였다.
하지만 송민호는 조금 달랐다. 다정하고, 귀엽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늘 진심인 모습이 계속 눈에 밟혔다. 애인 있는 사람은 이전에도 몇 번 만나보긴 했지만 민호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민호를 만나기 전에 만났던 사람들, 그들이 저를 두고 원래 사귀던 사람에게 돌아가는 뒷모습에는 항상 진우의 쓴웃음만이 남았다. 결국, 그들이 진우에게 속삭이던 사랑의 깊이는 딱 그만큼이었다. 하지만 민호는,
"이번엔 또 왜요."
꾸준하게 진우에게 다가오고자 했다. 뻔히 보이는 자신의 핑계에도 늘 달려와주고, 말도 안되는 이유로 부리는 투정도 받아주는. 그 때부터였을까, 쓸모없다고 취급해 잊고 있던 감정들이 불현듯 진우의 마음 속에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가끔 혜진에게서 연락이 오면 민호가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곤란해 하던 때도 있었다. 그 때 진우는 '그냥 헤어지면 안돼?'라고 묻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물론 실천에 옮기진 않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를 한 대 치고 싶어졌다. 상대방에게 뭘 요구한다는 건, 자신이 바라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우가 바라는 건 몸 이상도, 이하도 되어서는 안 됐다. 딱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지금까지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는데.
"손 많이 가게 해서 미안해."
아프면 사람 마음이 약해진다더니, 딱 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간 말이었다. 하지만 신세를 많이 진 건 사실이었다. 아플 때 누가 이렇게 자신을 챙겨준 적이 있었던가. 괜히 모르는 척 민호의 손길에 기대어 열기를 식히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려온 고백에 진우의 마음이 철렁했다.
사실 진우의 마음이 철렁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까지도 숱하게 있어온 일이다. 저가 좋다는 남자들에게 진우는 '우리가 무슨 사이라도 돼?' 비웃어주고는 떠났다. 하지만 민호를 떠나고 싶진 않았다. 진우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어쨌든 신세를 졌으니 굳이 냉정해질 필요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귀엽다는 말로 어영부영 무마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송민호는 만만치 않았다.
- 나 헤어지고 오는 길이에요.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차분하게 얘기하고, 돌려보내자.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민호를 불러낼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민호의 얼굴을 보자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따지고 보면 다 민호 때문이었다. 요며칠간 계속 사귀자는 말 때문에 잠 이루지 못한 것도, 헤어졌다는 말에 묘한 희열로 두근거렸던 마음 한구석도. 자신을 이렇게까지나 흔들어놓는 것이 싫어서,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네가 뭔데 내 세상을 무너트려.
이렇게 화내는 거 보니까 솔직하고 좋네요.
끝끝내 송민호는 진우의 예측을 빗나가는 사람이었다. 민호가 그렇게 뒤돌아 가버리고 난 후 며칠간, 그 얼빠진 대답이 진우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정말 민호는, 이런 나를 좋아해줄 수 있는 걸까? 김진우 본인도 아직 다 알 수 없는, 예쁘고 잘 웃는 김진우가 아닌 다른 모습들을?
애초에 쓸데없는 기대라 치부해왔건만, 진우의 마음 한 구석에 움을 튼 감정은, 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자라나기만 했다. 끝없이 스스로를 속여도 이미 감정이, 표정이 진우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이었나. 며칠을 어두운 방안에 누워있던 진우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결심한 듯 핸드폰을 들었다.
[잠깐 만나.]
8.
자신의 답장만 기다리고 있던 것 마냥 민호는 튀어나왔다. 먼발치에서부터 뛰어오는 송민호의 모습에 진우의 입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다시 한 번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제는 자신도 더는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것을.
"하아, 하아, 왔어요."
자신이 연락한 뒤로 줄곧 뛰었는지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하지만 무릎에 손을 얹어 숨을 고르는 와중에도 자신을 향해 지어보이는 개구쟁이같은 미소에,
"그...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진우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 용기가 생겼다. 민호는 숙였던 몸을 폈다.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걸음에 진우의 눈동자가 떨렸다. 차마 눈을 마주볼 용기는 없어서 시선이 자꾸 다른 데로 샜다.
"나... 이런 거 진짜 처음이고,"
"...."
"그래서... 잘 못할지도 모르는데,"
"...형..."
"그래도, 말 해볼게."
진우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의 박동이 손끝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끝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자신은 겁을 먹고 있었지만, 그래도,
"...도...해..."
지금 말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네? 잘 안 들려요, 형."
벙긋거리는 입 모양을 이미 다 읽었으면서 시치미를 뗀다. 이미 민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번져가고 있었다. 진우는 민호를 밉지않게 흘기고는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세 번은 못할 짓이었다.
"나도,"
"나도?"
그러니까,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서.
"좋아..해,읍,"
겨우 뱉어낸 고백은 곧이어 다가온 키스에 막혀버렸다. 뒷머리를 부드럽게 받치며 더 깊게 혀를 섞는 움직임에 진우의 눈이 절로 감겼다. 어디다 둘 지 몰라 잠시 방황하던 손이 민호의 옷자락을 쥐었다. 한참동안 입술을 나누다 떨어진 민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 진우의 가슴이 더 빠르게 두근거렸다. 조막만한 얼굴에 꽉꽉 들어찬 행복이 보여 진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고마워요."
"뭐가."
"나한테 솔직해줘서."
“....”
“또 나 좋아해줘서.”
진우는 민망함에 민호의 품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민호는 그런 진우를 온 마음으로 받아주었다. 연습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이 벅찬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고맙다고 표현하는 것도,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하지만 오랫동안 걸어 잠근 마음의 빗장을 열어버린 사람이 곁에 있어줄 것이기에 진우는 달라질 내일이 두렵지 않았다.
Written By. NYOTA (Twitter Account : @star_cluster4)